다시 읽는 텍스트 94

이명선의 '홍경래전' - 4. 장수들

4. 장수들 반란을 일으키어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면, 모사(謀士)니, 부호(富豪)니, 명사(名士)니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직접 병대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서 지휘하는 장수가 필요하다. 경래도 이러한 장수를 얻느라고 도 각처로 돌아다니며 별별 수단을 다 썼다. 경래가 제 편으로 끌어넣은 장수 중에 먼저 홍총각(洪總角)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총각은 곽산(郭山) 사람으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원이름은 이팔(二八)이나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여, 홍총각으로 통하였다. 기운이 장사라, 먹기도 남의 세 몫 먹고, 일도 남의 세 몫하고, 자기도 남의 세 몫 잤다. 산에 발매를 가면 우연만한 나무는 손으로 쑥쑥 뽑아 버리고, 좀 큰 나무는 도끼질을 하는데, 그 도끼가 보통 도끼는 휘휘 날린다..

이명선의 '홍경래전' - 3. 동지들

3. 同志(동지)들 경래의 동지로서 먼저 우군칙(禹君則)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군칙은 경래가 제일 먼저 사귄 동지다. 그는, 태천(泰川)에서 내가 내다 하고 뽑내는 우가네 집의 첩의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천문지리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하였는데, 서류(庶流)인 고로 처음부터 과거를 볼 자격이 없고, 집 안에 드나 집 밖에 나나 경멸과 확대가 자심하여, 억울한 자기의 심정을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집을 버리고 각처로 떠돌아다니며, 지사(地師)로 자처하였다. 간혹 부잣집 모이자리나 정해주고 돈푼이나 받으면, 바로 주막으로 달려가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들이키어 평소의 불평불만을 술로 마비시켜 버렸다. 경래는 경신(庚申)년 간에 가산군 청용사(嘉山郡 淸龍寺)에서 ..

이명선의 '홍경래전' - 2.다복동

홍경래전(洪景來傳) 이명선(李明善) 2. 多福洞 (다복동) 경래가 식구를 거느리고 이사한 곳은 다복동(多福洞)이라는 곳이다. 다복동은 가산(嘉山)과 박천(博川) 양군 사이에 있는 동리의 이름인데, 그리 크고 널지는 못하나, 상당한 요지(要地)다. 동리 좌우에는 그리 험하지는 않으나 나무가 잔뜩 들어선 산이 삑 둘러있고, 산 넘어 한옆으로는 서울서 의주(義州)로 통하는 큰 길이 있고, 앞으로는 대 령강(大寧江)이라는 강이 흘러 있어, 수륙(水陸)의 편리가 매우 좋다. 뿐만이 아니라, 여차 즉 하면 강과 좌우의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딱 버틸 수도 있고, 산 숲속에는 몰래 묻어 박히어 무슨 비밀의 일을 꿈이기에도 똑 들어맞았다. 아니, 경래가 여기로 옮겨 왔을 때에는 이미 심상치 않은 무시무시한 기분이 전..

이명선의 '홍경래전' - 1.귀향

홍경래전(洪景來傳) 이명선(李明善) 1. 歸鄕 (귀향) 순조 십일 년 구월(純祖 十一年 九月)의 일이다. 홍경래(洪景來)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자기 고향인 평안도 용강군 다미면 세동 화장곡(平安道 龍岡郡 多美面 細洞 花庄谷)에 나타났다.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산속의 절에 가서 공부하겠고 뚝 떠나가고 서는, 십 년 이상이나 종무소식이든 그가, 제법 서늘해진 가을바람을 안고 표연히 나타났다. “그래, 그렇게 오랫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를 가 있었나?” “산속에 들어가서, 몇 해가 걸리든지 성공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하더니 이때까지 산속에 있었나?” “아마 공부가 어지간히 다 된 게지. 십 년이나 했으면 문장 다 됐지, 못 되겠나?” — 이렇게 옛 친구들은 물어보았으나, 경래는 ..

백석의 '수라'와 김창완의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

수라(修羅)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디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

연암의 '영초고(嬰處稿) 서문'

정민의 '연암독본1' - 비슷한 것은 가짜다. '그때의 지금인 오늘' 자패子佩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의 시를 지음은, 옛사람을 배웠다면서 그 비슷한 구석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않으니, 어찌 소리인들 방불하겠는가?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時俗의 잔단 것을 즐거워하니 지금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내가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볼만하겠다. 옛날로 말미암아 지금 것을 보면 지금 것이 진실로 낮다. 그렇지만 옛사람이 스스로를 보면서 반드시 스스로 예스럽다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보던 자도 또한 하나의 지금으로 여겼을 뿐이리라. 그런 까닭에 세월은 도도히 흘러가고 노래는 자주 변하니, 아침에 술 마시던 자가 저녁엔 그 장막을 떠나간..

도산 안창호의 '청년에게 부치는 글'

青年에게 부치는 글 島山 安昌浩 人格完成 團結訓練 대한 청년 제군에게 대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또 하여야만 될 말이 많으나 경우로 인하여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다만 그 중의 몇 가지만을 말하려 한다. 지금 우리는 참담 비통한 苦海에서 헤매며 암흑한 雲霧 중에 방황 주저하고 있다. 이 비상한 경우에 처한 대한 청년 제군이 이 고해를 開除하고 운무를 開除하고 나아갈 길을 어떻게 정하였는가. 오늘 일반 민중에게 큰 기대를 많이 가진 제군, 또 스스로 큰 짐을 지고 있는 제군의 하여야 할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하고 힘쓸 것은 인격훈련과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라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현하 우리 생활에 직접 관계가 없는 듯이 생각하여 냉대시하는 이도 있고, 또는 이 ..

김법순과 김푼수의 손 그림 증서

풀이 신 영 산 右 標(우표) 事段(사단)은 本人(본인)이 與(여) 右宅傭女(우택용녀) 金紛守(김푼수)로 有厥情約(유궐정약)이온 바, 該女(해녀)가 幼有重病(유유중병)ᄒᆞ야 以終身復(이종신복) 役次(역차)로 宅之買萬(택지매만) 醫治(의치)가 三經三次而萬價至參百兩云(삼경삼차이만가지삼백냥운)ᄒᆞ이 今當率去該女之境(금당솔거해녀지경)에 右 萬價(우만가)를 不得不代爲辨納(부득부대위변납) 故(고)로 錢參百兩準數辨納(전삼백냥준수변납)ᄒᆞ고 該女(해녀)은 卽爲率去(즉위솔거)ᄒᆞ거온 日後(일후)에 若舊炳(약구병)이 復發(복발)이거나 或有其他(혹유기타) 事段(사단)이라도 更無退悔之意(갱무퇴회지의)로 成出此文(성출차문)ᄒᆞ고 與該女(여해녀)로 共納手形(공납수형)ᄒᆞ야 以爲憑據(이위빙거)ᄒᆞᆷ. 隆熙 四年(융희사년) 陰曆(음..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

자산어보 서(玆山魚譜 序)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명현 옮김 茲山者, 黑山也. 余謫黑山, 黑山之名, 幽晦可怖. 家人書櫃, 輒稱兹山, 茲亦黑也. 자산자 흑산야 여적흑산 흑산지명 유회가포 가인서궤 첩칭자산 자역흑야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두운 느낌을 주어서 무서웠다. 집안사람의 편지에서는 번번이 흑산을 자산이라 표현했다. ‘자(玆)’자 역시 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茲山海中魚族極繁, 而知名者鮮. 博物者所宜察也. 余乃博訪於島人, 意欲成語, 而人各異言, 莫可適從, 자산해중어족극번 이지명자선 박물자소의찰야 여내박방어도인 의욕성어 이인각이언 막가적종 자산 바다의 어족은 지극히 번성하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아는 어족은 거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