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소설과 산문

이명선의 '홍경래전' - 6. 십이월 십팔일

New-Mountain(새뫼) 2022. 10. 28. 14:11
728x90

6. 十二月(십이월) 十八日(십팔일)

 

신도회의가 끝나자, 각처의 거두들은 모두 바로 제 근거로 돌아가고, 다복동의 군졸의 훈련도 더 한층 격렬해졌다.

창시는 원래 정감록(鄭鑑錄)을 절대로 신입하고 있었음으로, 내년에 기병할 것을 미리 일반에게 암시하기 위하여, 임신 기병(壬申起兵)의 넉 자를 열여덜 자로 파작(破作) 하여 일사횡관하니, 귀신탈의하고, 십필가일척하니, 소구유양족이라 (一士橫冠, 鬼神脫依, 十疋加一尺, 小丘有兩足) — 이러한 괴상한 문구를 만들어 민간에 유포시키었다. 그리고 또 칠월 달부터 건방(乾方)에 헤성(彗星)이 나타나, 민간에서는 무슨 큰 변고가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판이라, 창시는 이것을 이용하여, 건방은 서북방(西北方)을 가르치는 것이니까, 서북방에서 큰 난이 일어나겠다는데 그 난을 타서 서북 지방에서 일대 영웅이 출현하여 나라를 새로 세울 증조라고 해석해서 유포시켰다. 그리고 연이어서 이것을 구체화(具體化)한 이야기를 하나 꾸며서 유포시켰다.

선천군(宣川郡) 검산(劍山) 속 일월봉(日月峰) 밑에 군왕포(君王浦)라는 데가 있어, 그 물을 끼고 가야동(伽倻洞)이라는 깊숙한 골이 있고, 그 물속에 홍의도(紅衣島)라는 섬이 하나 있는데, 이 섬에서 삼십 년 전에 이인이 하나 나왔다.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올 때에 벌서 이가 다 나고, 말을 하며,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다섯 살 먹든 해에 이상스러운 중이 하나 찾아와서 이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 그리고서는 그 후에 일절 소식이 없었다. 그리다가 얼마 전에 비로소 그 아이가 그동안 중국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도승(道僧)한테서 도술을 배워 가지고 도로 조선으로 나와 강계(江界) 땅에 숨어서 있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그런데 어느결에 벌서 십만 대병을 모아 가지고 때만 노리고 있어, 북으로 만주 쪽을 들이쳐서 청(淸)나라를, 무찌를 것은 물론이고, 남으로 평양, 한양을 들이쳐서 청나라에 복종하고 있는 이조(李朝)를 뒤집어 엎어 버릴 것이다. 건방에 나타난 헤성은, 곧 이인이 때를 만난 것을 하늘이 지시한 것으로, 미구에 나라가 뒤집히는 큰 난리가 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몇 해 전에 경래가 압록강 상류 지방을 갔을 때에 만난, 만주의 마적단 두목 정시수(鄭始守)의 이야기를 신비화한 것이다.

이 이외에도 별별 유언비어가 제조되어, 읍내 장터로, 시골 사랑방으로 순식간에 좍 — 퍼져나갔다.

한편 각지에서 군기와 군량이 더욱 활발하게 다복동으로 모여들었다. 선천(宣川) 사는 유문제(劉文濟)와 최봉관(崔鳳寬)이는 총하고 칼하고 창을 소에 한 바리 잔뜩 실어 보내고, 정주(定州)에 사는 정진교(鄭振喬)는 탄환과 촛대를 실어 보내고, 철산(鐵山)에 사는 정복일(鄭復一)은 여러 가지 깃발을 만들어서 배에 실어 보내고, 용만(龍灣)에 사는 여러 동지들은 군졸의 옷과 화려한 주단을 여러 바리 말에 실어 보내고, 선천(宣川) 사는 계형대(桂亨大)는 군량 백여 석을 배로 실어 보내고, 곽산(郭山) 사는 박성간(朴聖幹)은 돈 오백 냥과 쌀 열닷 섬을 실어 보내고, 영변(寧邊) 사는 남명강(南明剛)과 김우학(金遇鶴)은 돈 이천 냥과 말안장 열여섯을 실어 보내고,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물자가 다복동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내응 동지(內應同志)인 것은 부언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다복동에 사람이 들끓고 인마의 왕래가 더욱 빈번하게 되니, 자연 소문이 널리 퍼져서 관청에까지 차차 알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전처럼 금점을 한다고 속였으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바로 알려져서, 뭐라고 변명할 여지가 없이 되었다. 더구나 홍총각이니, 이장군이니 하는 - 농민들 사이에 평판이 자자한 장수들이 다복동에 모였다는 소문은 그들에게 은근히 큰 기대를 갖게 하고 제 일인 것처럼 흥분케 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경래도 신도회의에서 결정한 - 내년 정월에 기병하겠다는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칙, 희저, 창시, 사용, 홍총각, 제초와 긴급회의를 열어서, 금년 십이 월 이십 일에 기병하기로 결정하였다.

홍총각과 제초는 더 일찍이 기병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각지에 있는 동지들과의 연락도 있고 해서 결국 십이 월 이십 일에 낙착한 것이다.

그리고 경래는 그 자리에서 부서(部署)와 작전 계획을 확정하였다. 부서는 -

홍경래 - 평서 대원수(平西大元帥)

우군칙 - 총참모(總參謀)

김창시 – 참모(參謀)

홍총각 – 선봉장(先鋒將)

이제초 – 선봉장(先鋒將)

윤후험 - 후군장(後軍將)

이희저 - 도총(都總) (군량과 군수품을 관활하는 책임이다)

김사용 - 부원수(副元帥)

이처럼 정하였다.

이 부서에 있어, 모두 타당하여 별 의견이 없었으나, 다만 홍총각이 선봉장인데 대하여, 군칙, 창시, 희저가 모두 반대하였다. 너머 경솔하게 나대기 때문에 그러한 중요한 책임을 지우는 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래는 절대로 홍총각을 신임하였고, 제초도 만약 홍총각의 부서를 갈면 자기도 그만두겠다고 주장하여 결국 원안대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홍총각과 제초를 중심으로 하는 패와, 군칙, 창시, 희저를 중심으로 하는 패와 완연히 두 패로 갈리어, 경래로서도 이 두 패 사이를 원만히 묻어 나가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예상되었다.

작전은, 평양, 서울을 향하여 남진하는 남군(南軍)과 의주(義州)를 향하여 북행하는 북군(北軍)과 둘로 나누어, 남군의 근거지는 다복동으로 하고, 북 군의 근거지는 곽산(郭山)으로 정하였다. 다복동은 벌써 몇 해 전부터 근거지로 되어있었으나, 곽산은 홍총각과 창시의 고향이고, 또 그곳에 제일가는 부자 박성간(朴聖幹)과 첨지(僉知) 박성신(朴星信)이 이편이었음으로, 북군의 근거지로 된 것이다.

물론 주력은 남군에 두고, 경래가 직접 지휘하며, 군칙, 창시, 홍총각, 제초, 후험, 희저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여 돕게 하고, 북군은 사용이 지휘하는데, 김희련(金禧鍊), 김국범(金國範), 이성항(李成沆), 한처곤(韓處坤) 등의 제장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 안주(安州), 평양(平壤), 정주(定州), 영변(寧邊) 등 - 중요한 곳에는, 여러 장졸 중에서 아주 심복이 될 만한 자만 수십 명 뽑아서, 혹은 걸인 행색을 하고, 혹은 붓장사의 행색을 하고, 몰래 각 골에 숨어 들어가서, 거기서 내응 동지들과 잘 연락하여, 이십 일에 일제히 봉기하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동지들 사이에는 병부(兵符) 대신에 암호를 박은 은패(銀牌)와, 공(空) 자, 배(背) 자를 쓴 기를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십이 월 이십 일에 기병하자는 이 결정도, 일에 착오가 생기어 또 한 번 당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평양으로 보낸 십여 명의 장졸들이 그곳 내응 동지들과 연락하여 폭동을 일으키자는 계획이 실패에 돌아간 것이다. 관변의, 다복동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그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기 위하여, 십이 월 십오 일 밤에 객사(客舍) 대동관(大同館)을 불 지르고, 감사(監司)를 위시한 고관들을 닫는 대로 암살하여 버리자는 계획이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춥던 날이 갑자기 풀리는 바람에 대동관 밑에 묻었든 화약통과 그 끈에, 얼음물이 녹아 적시어서, 그날 밤중에 터지지 않고, 그 이튿날 점심때가 지나서 터졌다. 이러한 대낮에 터지고 보니, 아무리 대기하고 있던 장졸들도 폭동을 일으킬 도리가 없고 신변이 위험하여져서, 각기 도망하여 다복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중의 한 사람이 관원에게 붙들리어, 다복동의 일이 전부 탄로되고, 여기서 바로 가산(嘉山) 군수한테 통첩을 보내어, 십구 일에는 다복동을 습격하리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또 선천(宣川)에서 십칠 일에 피난 가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는 바람에, 내응 동지 로 있는 별장(別將) 최봉관(崔鳳寬)이가 잡히어, 이 입에서 철산(鐵山)의 정복일(鄭復一), 곽산의 김창시(金昌始) 박성신(朴星信)의 이름이 나왔다.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은 이것을 곧 곽산군수한테 통지하며, 한편 포교(捕校)를 보내어 김창시와 박성신을 잡게 하였다. 이때에 김창시는 없었음으로 그 아버지와 박성신이 잡히었고, 이 소식이 바로 다복동에 전하여졌다.

또 십칠 일 밤에 박천(博川)에서, 경래의 파견한 군졸이 하나 붙들리어, 경래와 희저의 이름이 나와, 십팔 일에는 벌써 가산군수는 이 통지를 받아서, 희저의 집을 몰래 둘러싸고 취조를 시작하였으며, 희저의 식구들은 용하게 여기서 빠져나와 다복동에 이 위급한 사태를 알리었다.

이처럼 사방에서 속속 비밀이 탄로되고, 관원의 추급이 급하게 되어, 이 이상 더 지체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경래는 이십 일 예정이던 것을 이틀 당겨서, 십팔 일 밤에 즉 시로 기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에는 홍총각, 제초 편이나, 군칙, 창시, 희저 편이나, 쌍방이 모두 찬성하였다. 홍총각 편으로서는 예정보다 하루라도 빠르니 좋았고, 군칙 편으로서도 모두 자기의 가족들, 친척들이 위태롭고, 집을 습격 당하여 가산이 탕진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주저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다만 홍총각이나, 제초는 원래부터 가족도 없고, 가진 재물도 없고 해서, 오로지 눈앞에 닥쳐올, 나라를 다투는 큰 승부에 피가 뛰고,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데 대하여, 군칙, 창시, 희저는 전혀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막상 딱 당하고 보니 가슴이 뜨금하며 일종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고관대작을 한 희망도 허망이려니와, 그보다도 당장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욱 섭섭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가진 사람도 안 가진 사람도 모두 합심하여, 기어이 난리는 터지게 되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