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 229

갈아타는 곳을 찾아

갈아타는 곳을 찾아 이러구러 별 뜻 없이 유쾌하게 키득거리다가 일상처럼 소주잔을 홀짝홀짝 기울이다가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조심조심 제기면서 지하철 역사로 들어선다. 그리고 머뭇거린다. 지상의 모든 것 복잡함과 번거로움을 몇 개의 선과 몇 개의 점으로 단순화한 지하철 노선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린다. 어디쯤에서 선을 바꾸고서 어느 점을 향해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는 것이 빠른지, 편한지를 따져보며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머뭇거린다. 지금까지 지나온 선은 무슨 색이었고 어디쯤에서 선을 바꾸었으며 지금 취해 머무는 점은 어디인지 잠시 머뭇거린다. 과거의 선과 점들이 앞으로의 선과 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낯선 역사의 풍경 속에 우두커니 서서 시답잖게 머뭇거린다. 이리 가나 ..

밀물이 밀려드는 바닷가에서

밀물이 밀려드는 바닷가에서 밀물이 밀려드는 바닷가에서때를 아는 듯한 뿌연 바닷물이 저 멀리서 차근차근 밀려오기에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저 앉았다. 그래야 할 것 같다. 버겁게 흘러오는 물에 대한 예의이기에. 짭짤한 갯내음 사이로앞에서 뒷물을 끌어오는 물결이나바로 뒤에서 앞물을 밀고 가는 물살이나저 멀리 있을 법한 기조력이나끊어질 듯 이어지는 근원이나그저 그저 바라봐야만 할 것 같다.성근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바람을 잠시나마 달래면서. 여기까지 찾아오기 참으로 힘겨웠겠지만잠시 발 아래서 찰랑이다가 때를 아는 바닷물은 곧 밀려갈 터이다.하지만 여전히 앉아 있을 것이다.그래야 할 것 같다.힘겹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의례이기에. (2024.5.25)

옛글을 읽다가

옛글을 읽다가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인데 그때를 지금으로 힘겹게 불러내어 지금의 말과 마음으로 그때를 살피다가, 여기는 여기이고 거기는 거기인데 여기에서 거기로 낯설게 다가가서 거기의 발자취 찾아 여기처럼 더듬는데, 문득 떠오르다 홀연히 나타나는 옛사람들. 몸짓이 거세된 사람들. 지금의 여기로부터 달아나려는 사람들.

영종도 예단포 바닷가 들국화

영종도 예단포 바닷가 들국화 영종도 예단포 인적 뜸한 바닷가에 하루를 달려온 저물녘의 햇빛 아래 한 해를 더듬어가는 늦가을의 서늘함에 이파리는 자취처럼 시들어 부서졌는데 빛깔은 농염하게 시간을 덮어가고 향기는 쩌렁쩌렁하게 빛깔을 감쌌구나. 어허, 이리 외딴 곳에 느지막이 피어나서 어허, 이리 풍경을 향기로 물들이며 그렇게 길가는 시선을 모아서 거두는가. 국화 옆에 나란하게 바닷바람 맞으면서 국화 옆에 손을 잡고 지는 해를 바라보느니 아내여, 저 국화같이 아름다운 인연이오. (2023.11.06)

34. 에필로그

34. 에필로그 신기정가 지은이 산중처사 어리석은 이 인생이 제 팔자 제 몰라서 망령된 어린 마음 부귀를 구하려니 어화 허사로다, 세상사 허사로다. 공명은 아니 오고 흰 머리 뿐이러니 지천명 되온 후에 내 팔자 내 알리라. 좁쌀밥이 다 익을 제 긴 잠에서 깨어나니 꺼림 없는 녹수청산 한가한 서운 골에 안개 노을 의지하고 사슴이 벗이 되어 우연히 정한 터가 이곳이 별천지라. 이름 좋고 경치 좋은데 한 칸 초가 짓고지고. 불타산 맑은 곳에 흰 구름을 높이 쓸어 절벽 위에 하늘 아래 네 면이 석벽이라. 하늘이 만들었으니 인력이 아니로다. 무릎이 옮겨지니 넓고 큰 집 바라겠나. 절묘한 산정에서 눈앞을 바라보니 자맥봉은 저기 있고 임수봉은 앞에 뵌다, 뒤에서는 연화봉서 맑은 바람 건듯 불어 봉봉마다 장한 기상 산..

33. 기획관 송미영

33. 기획관 기획관 송미영 “문화관광과에 오래 있었어도 문화원은 처음 와 보네요.” 문화원 현관 바로 옆의 소파에 앉으며 송미영이 밝게 웃는다. “여기서는 성수산이 안 보이네요. 저 산은 이름이 뭐에요?” 처음 문화원에 왔을 때보다 산빛은 더 야위어졌다. 햇빛도 짧아지면서 누런빛이 비슷하게 내리쬐면서 앙상함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곳으로 옮겨 온 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주변 지명은 아는 게 없다. 문화원 직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냥, 앞산이래. 눈이 오면 군데군데 있는 파란 산죽이랑 어울려서 볼 만한 그림이 된다고 하던데. “가사 한 편 쓰더니 주무관님 시인이 다 되셨네요. 저 나무도 느티나무인가요? 멀쩡하네. 군청 앞의 느티나무는 못살 거 같다고 하던데요.” 느티나무가 아니라 팽나무이다...

32. 여섯 살 변예슬

32. 여섯 살 변예슬 성수산에서 내려온 물이 호박벌의 북쪽을 뚫고 흘러가고 있다. 성수산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모르지만, 서운군의 공식 강수량은 이틀간 합하여 55밀리였다. 다행히도 예상한 강수량을 밑돌았다. 또 태풍은 예상보다 빠르게 남쪽으로 지나갔다. 서운군이 태풍 때문에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겨울 작목을 위한 새 비닐하우스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고, 벼 수확도 거의 끝난 상태였다. 다만 군청 앞에 있는 500년 된 느티나무의 큰 가지 셋 중 두 개가 부러졌는데, 살지 죽을지는 내년 봄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축제 개막일을 하루 앞둔 호박벌은 작업이 한창이다. 부스들이 만들어지고, 트럭들이 바삐 들락거린다. 질퍽한 바닥에는 고운 자갈들이 깔리고 있다..

31. 지역축제팀

31. 지역축제팀 어제 일요일 밤, 현대어로 옮긴 신기정가를 J대학교 정일영 교수와 가사연구원 주신호 연구사에게 메일로 보냈다. 한 번 읽어 보시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오늘 아침 컴퓨터를 켜 보고 메일함을 열어보니, 답이 없다. 주 연구사는 조금 전에 메일을 받았고, 정 교수는 아직 메일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약속한 월요일 아침, 현대어로 번역된 신기정가를 usb에 담고 원 대표에게 전화한다. 곧 출발합니다. 아, 저는 지금 협력업체에 와 있습니다. 이리로 직접 오시죠. 내비게이션에 찍으라며 주소를 하나를 보내 준다. J시 인근의 공단이다. 차를 몰고 간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에서 이르는 곳에 원 대표가 우산을 받으면서 기다리고..

30. 축제팀 현경숙

30. 축제팀 현경숙 결국, 결정했다.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10년 넘는 공무원 생활에서 내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목은 ‘신기정가’이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 ‘기’자가 ‘터 기(基)’자인지, ‘기록할 기(記)’자인지 따질 필요도 없다. 그냥 한자는 빼고 한글로만 ‘신기정가’라고 쓰면 된다. 작자는 ‘산중처사’. 어떤 이유에서 맨 뒤의 ‘산중처자’를 맨 앞에 ‘산중처사’라고 옮겨 적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옮겨 적었던 사람이 잘못 이해했던 것이겠지만, 그냥 ‘산중처사’로 한다. ‘지은이 미상’ 하는 것보다는 그게 좀 더 그럴듯하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진에 들어 있던 시조 한 편, 결국 버리지 못한다. 선택지 중 세 번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