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시와 노래 27

박몽구의 '영종도 추씨'

영종도 추씨  박몽구  오랜만에 육지에 나가면사람들은 억대 부자가 왔다고 놀려대고모주꾼 친구들은 밤새워 술값이나 씌우려고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허나 천상 농부인 그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사실 지금이라도 논밭 몇 평 팔면번쩍번쩍한 자가용도 사고 아파트도 산다지만더이상 제비꽃 구경할 수 없고육지 사람들의 오물만 버려져 악취만 풍기는개발이 도대체 누구 코에 걸리는 물건인지 몰라그는 안주도 없는 술을 바닥 보이도록 들이켰다푹푹 빠지는 개펄이 싫던 판에땅 팔고 집 팔아 육지로 간 벗들은벌써 있는 것 다 까먹고고향에 돌아오려 해도 오두막 한 칸 얻어 들기 어려운데새마을연수원이 들어선다며 대대로 모셔온 산소까지 파헤치더니바다가 죽은 자리에는 국제공항이 들어선다는 소문만사람들의 등을 떠밀어내고 있다.추씨는 부슬..

한강의 '서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김동환의 '월미도 해녀요'

월미도 해녀요(月尾島 海女謠) ​ 김동환 놀 저물 때마다 멀어지는 내 집은 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 사는 몸이라 엄마야 압바가 그리워지네 진주야 산호를 한 바구니 캐서 이고서 올 날은 언제이든가 고운 천 세 발에 나룻배 끌을 날 언제던가 보면 볼사록 멀어지네 내 집은 엄마야 압바야 큰애기라 부르지 마소 목이 메여 배따라기조차 안 나오우 '습작시대(1927)'

박팔양의 '인천항'

인천항 박팔양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의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삐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제 축항「카페-」로부터는 술취한 불란서 수병의 노래 「오! 말세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김기림의 시 ;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김기림 ​ 기차 모닥불의 붉음을 죽음보다도 더 사랑하는 금벌레처럼 기차는 노을이 타는 서쪽 하눌 밑으로 빨려갑니다. 인천역 ‘메이드 · 인 · 아메-리카’의 성냥개비나 사공의 ‘포케트’에 있는 까닭에 바다의 비린내를 다물었습니다. 潮水 오후 두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여서는 쉬파람을 불며 불며 검은 潮水의 떼를 몰아가지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고독 푸른 모래밭에 자빠져서 나는 물개와같이 완전히 외롭다. 이마를 어르만지는 찬 달빛의 은혜조차 오히려 화가 난다. ​이방인 낯익은 강아지처럼 발등을 핥는 바다바람의 혀빠닥이 말할 수 없이 사롭건만 나는 이 항구에 한 벗도 한 친척도 불룩한 지갑도 호적도 없는 거북이와 같이 징글한 한 이방인이다. ​밤 항구 부끄럼 ..

법정스님의 시 '1974년 1월 - 어느 몰지각자의 노래'

1974년 1월 - 어떤 몰지각자(沒知覺者)의 노래 법정(法頂) 1974.1. 1. 나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자 대한민국 주민 3천5백만 다들 지각이 있는데 나는 지각을 잃은 한 사람. 그래서, 뻐스 안에서도 길거리에서 또한 주거지에서도 내 곁에는 노상 그림자 아닌 그림자가 따른다. 기관에서 고정배치된 네개의 사복 그 그림자들은 내가 어떤 동작을 하는지 스물네시간을 줄곧 엿본다. 이 절망의 도시에서 누구와 만나 어떤 빛깔의 말을 나누는지 뭘 먹고 뭘 배설하는지 그들은 곧잘 냄새를 맡는다. 나를 찾아온 선량한 내 이웃들을 불러 세워 검문하고 전화를 버젓이 가로채 듣는다. 그들은 둔갑술이라도 지녔는가 거죽은 비슷한 사람인데 새도 되고 쥐도 되어 낮과 밤의 동정을 살피니 2. 시정은 평온하..

성기조의 '근황'

영면하신 스승님을 기리며.. 근황(近況) ​ 성기조( 1934. 6. 1. ~2023.10.16) ​ 잘 그려진 신선도(神仙圖)를 본다. ​ 그림 속의 노인과 말벗이 되어 천년도 넘는 옛날로 돌아가 우물 속에서 물을 퍼 올리듯 인정(人情)을 퍼 올리면 산굽이, 굽이를 돌아오는 학(鶴)의 울음 바람은 유현(幽玄)한 곳에서 꽃내음을 찾아낸다. ​ 노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따라오라고, 자꾸만 따라오라고 뒤범벅이 된 세태(世態) 시끄러운 거리 그리고 온갖 불신(不信)을 싸워 이겨 세상을 빨래하고 이슬 같은 인정을 찾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정자(亭子) 속으로 들어간다. ​ 잘 그려진 남화풍(南畵風)의 신선도(神仙圖) 그 속의 노인이ㅡ.

한하운의 '작약도'

작약도(芍藥島) ㅡ인천여고 문예반과 ㅡ 한하운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芍藥島)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 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래소리 해미(海味)가에 흥겨우며 귀여운 신부와 한 백년 이렁저렁 소꼽놀이 어느새 섬과 바다와 소녀들은 노을 활활 타는 화산 불 인천은 밤에 잠들고 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 배는 해각(海角)에 다가서는데 소녀들의 노래는 선희랑 민자랑 해무(海霧) 속에 사라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녕 또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 작약도 : 영종도와 월미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으로 현재명 물치도임.

정태춘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정태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사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박경리의 '핵폭탄'

영화 오펜하미어를 보고 와서 핵폭탄 박경리 핵폭탄 한 개 천신만고의 산물인 그 한 개 좌판에 달랑 올려놓고 행인을 물색하는 노점상의 날카로운 눈초리 고독한 매와 같다 하기야 그것이 한 개이면 어떻고 천 개이면 어떠한가 터질 듯 기름진 거상이건 초췌한 몰골의 영세상이건 신념은 같은 것 죽음의 조타수임에 다를 바 없지 문명의 걸작이며 승리의 금과옥조 세계를 쥐고 흔든다는 것은 죽음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죽음의 행진 은밀한 그 발자욱 소리 죽음의 향연, 옥쇄를 앞둔 술잔 죽음의 난무, 멈출 수 없는 분홍신의 춤 미쳐서 세상이 보이지 않는 무리에게는 처참하고 웅대한 멸망의 서사시야말로 황홀한 꿈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파리 운동장이 된 굶주린 아이들 얼굴 주마등같이 지나가는 저 광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