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국문소설,판소리 75

이인직의 신소설 '귀의 성'

鬼(귀)의 聲(성) 이인직 제 1 권 깊은 밤 지는 달이, 춘천 삼학산(三鶴山) 그림자를 끌어다가 남내면(南內面) 솔개 동내〔松峴〕 강동지(姜同知) 집 건넌방 서창에 들었더라. 창호지 한 겹만 가린 홑창 밑에서 긴 베개 한 머리 베고 넓은 요 한편에 혼자 누워 있는 부인은, 나이 이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돋아 오는 반달같이 탐스럽더라. 그 부인이 베개 한 머리가 비어서 적적한 마음이 있는 중에, 뱃속에서 팔딱팔딱 노는 것은 내월만 되면 아들이나 딸이나 낳을 터이라고 혼자 마음에 위로가 된다. 서창에 비치는 달빛으로 벗을 삼고, 뱃속에서 꼼지락거리고 노는 아이로 낙을 삼아 누웠으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잠 못 들어 애를 쓰다가 삼학산 그림자가 창을 점점 가리면서 방 안이 우중충하여지는데, 부인도 생각을..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혈의 누(血─淚) 이인직(李人稙, 1862~1916)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의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 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 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 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 말락 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이 그 모양을..

풀어 쓴 '옹고집전'

옹당 우물과 옹당 연못이 있는 옹진골의 옹당촌에 한 사람이 있되, 성은 옹이요, 이름은 고집이라. 성질과 버릇이 고약하여 풍년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심술이 맹랑하여 모든 일에 고집을 피우더라. 집안 살림을 보게 되면 석숭의 부유함과 도주공의 명성이나 위세도 부러워하지 아니하더라. 앞뜰에는 쌓아놓은 곡식이요, 뒤뜰에는 화려한 담장이라. 울 밑에 벌통 놓고, 오동나무 심어 정자 삼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집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고, 사랑방 앞에 연못 파고 연못 위에 작은 돌산을 쌓아 놓고, 돌산 위에 한 칸 초당을 지었으되, 네 모퉁이에 풍경을 달았더라. 은은하게 맑은소리 바람결에 흩어 들려오고, 못 가운데 금붕어는 물결 따라 뛰노는데, 동쪽 뜨락의 모란꽃은 반만 피어 너울너울, 왜철쭉 진달래는 활짝..

'진대방전' 전문과 현대어풀이

진대방전 옛날 송나라 시절에 탁주 땅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성은 진이요, 이름은 대방이라. 대대로 이름난 집안으로 집안 살림이 넉넉하니, 이는을 사람들이 다 일컫는 바이러라. 그 아비 느지막이 대방을 낳으니 사랑함을 보석같이 하니, 자연 교활한 아이가 되어 부모의 가르침을 듣지 아니하더니 열다섯 살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방탕하여 글도 읽지 아니하고 술과 여자에 빠져들어 집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그 아비 경계하여 이르기를, “내 늦게야 너를 얻어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저렇듯 방탕하여 부모를 돌아보지 아니하니 이는 반드시 집을 망하게 할 것이라.” 하고, 자주 꾸짖으되 듣지 아니하고 점점 더 심하더니, 그 아비 죽은 후로 더욱 방탕하여 무뢰한 무리와 떼를 지어 거리낌 없이 다니니 마을 사람들이 뉘 아니 미워..

박태보전 전문 주해

박태보전(朴泰輔傳) 주해 신영산 조선 숙종(朝鮮肅宗) 시절에 공의 명은 태보(泰輔)요, 자는 사원(士元)이니 충심이 백일(白日)을 꿰이는지라. 숙종대왕이 중전 인현왕후(中殿仁顯王后) 민씨(閔氏)씨를 폐위하신 후, 궁 희빈장씨(宮 禧嬪張氏)를 올려 왕비를 삼으려 하시니, 간특(奸慝)한 소인들은 상(上)의 뜻을 맞추고 충직(忠直)한 신하 간하는 자 있으면 상이 진노하셔서 참화(慘禍)를 입었더라. 기사(己巳) 사월 이십사일은 중전 탄신일(誕辰日)이니, 이날 백관(百官)과 백성들의 하례(賀禮)를 상이 다 물리치고 만약 거역하는 자 있으면 곧 파출(罷黜)하라 하시니, 이날로부터 더욱 궁중이 소란한지라. 전 응교(應敎) 태보가 또한 파직 중에 들었는지라. 나아가 다투고자 하나 어찌 못하여, 파직한 자 사십여 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