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 98

백기완의 '장산곶매 이야기'

장산곶매 이야기 백기완   옛날에 황해도 구월산 줄기가 황해바다를 만나 문뜩 멈춘 장산곶 마을의 솔숲에는 낙락장송을 둥지로 삼아 살고 있는 매가 있었다. 그중 장수매를 동네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생각해왔다. ​ 장산곶매는 1년에 딱 두 번 대륙으로 사냥을 나가는데 사냥 떠나기 전날 밤에는 자기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고 ’딱 딱 딱‘ 부리질로 자기 둥지를 부수고 날아갔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장산곶매가 부리질을 시작하면 같이 마음을 졸이다가 드디어 사냥에서 돌아오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대륙에서 집채보다 더 큰 독수리가 쳐들어와서 온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그놈은 송아지도 잡아가고, 아기도 채어 갔다. 사람들이 어쩌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데 이때 장산곶매가 날아올라 맞대하..

취미로서의 번역 - 무라카미 하루키

취미로서의 번역 -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소설가가 번역하는 거니까 보통 번역자와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의식 내지 자부심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지만, 한동안 경험을 쌓고 여기저기머리를 쿵쿵 부딪히고 나니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되도록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지극히 수수하고 중립적으로 텍스트에 몸을 맡기고, 그 결과 종착점에서 절로 '뭔가 다른' 부분이 나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독특한 맛을 내려고 노린다면 번역자로서는 아무래도 이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훌륭한 오디오 장치가 최대한 자연음에 가까워지기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의 진짜 묘미는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는가. 그것 하나다. 스..

박몽구의 '영종도 추씨'

영종도 추씨  박몽구  오랜만에 육지에 나가면사람들은 억대 부자가 왔다고 놀려대고모주꾼 친구들은 밤새워 술값이나 씌우려고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허나 천상 농부인 그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사실 지금이라도 논밭 몇 평 팔면번쩍번쩍한 자가용도 사고 아파트도 산다지만더이상 제비꽃 구경할 수 없고육지 사람들의 오물만 버려져 악취만 풍기는개발이 도대체 누구 코에 걸리는 물건인지 몰라그는 안주도 없는 술을 바닥 보이도록 들이켰다푹푹 빠지는 개펄이 싫던 판에땅 팔고 집 팔아 육지로 간 벗들은벌써 있는 것 다 까먹고고향에 돌아오려 해도 오두막 한 칸 얻어 들기 어려운데새마을연수원이 들어선다며 대대로 모셔온 산소까지 파헤치더니바다가 죽은 자리에는 국제공항이 들어선다는 소문만사람들의 등을 떠밀어내고 있다.추씨는 부슬..

한강의 '서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김동환의 '월미도 해녀요'

월미도 해녀요(月尾島 海女謠) ​ 김동환 놀 저물 때마다 멀어지는 내 집은 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 사는 몸이라 엄마야 압바가 그리워지네 진주야 산호를 한 바구니 캐서 이고서 올 날은 언제이든가 고운 천 세 발에 나룻배 끌을 날 언제던가 보면 볼사록 멀어지네 내 집은 엄마야 압바야 큰애기라 부르지 마소 목이 메여 배따라기조차 안 나오우 '습작시대(1927)'

박팔양의 '인천항'

인천항 박팔양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의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삐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제 축항「카페-」로부터는 술취한 불란서 수병의 노래 「오! 말세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김기림의 시 ;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김기림 ​ 기차 모닥불의 붉음을 죽음보다도 더 사랑하는 금벌레처럼 기차는 노을이 타는 서쪽 하눌 밑으로 빨려갑니다. 인천역 ‘메이드 · 인 · 아메-리카’의 성냥개비나 사공의 ‘포케트’에 있는 까닭에 바다의 비린내를 다물었습니다. 潮水 오후 두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여서는 쉬파람을 불며 불며 검은 潮水의 떼를 몰아가지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고독 푸른 모래밭에 자빠져서 나는 물개와같이 완전히 외롭다. 이마를 어르만지는 찬 달빛의 은혜조차 오히려 화가 난다. ​이방인 낯익은 강아지처럼 발등을 핥는 바다바람의 혀빠닥이 말할 수 없이 사롭건만 나는 이 항구에 한 벗도 한 친척도 불룩한 지갑도 호적도 없는 거북이와 같이 징글한 한 이방인이다. ​밤 항구 부끄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