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 94

김동환의 '월미도 해녀요'

월미도 해녀요(月尾島 海女謠) ​ 김동환 놀 저물 때마다 멀어지는 내 집은 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 사는 몸이라 엄마야 압바가 그리워지네 진주야 산호를 한 바구니 캐서 이고서 올 날은 언제이든가 고운 천 세 발에 나룻배 끌을 날 언제던가 보면 볼사록 멀어지네 내 집은 엄마야 압바야 큰애기라 부르지 마소 목이 메여 배따라기조차 안 나오우 '습작시대(1927)'

박팔양의 '인천항'

인천항 박팔양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의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삐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제 축항「카페-」로부터는 술취한 불란서 수병의 노래 「오! 말세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김기림의 시 ;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김기림 ​ 기차 모닥불의 붉음을 죽음보다도 더 사랑하는 금벌레처럼 기차는 노을이 타는 서쪽 하눌 밑으로 빨려갑니다. 인천역 ‘메이드 · 인 · 아메-리카’의 성냥개비나 사공의 ‘포케트’에 있는 까닭에 바다의 비린내를 다물었습니다. 潮水 오후 두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여서는 쉬파람을 불며 불며 검은 潮水의 떼를 몰아가지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고독 푸른 모래밭에 자빠져서 나는 물개와같이 완전히 외롭다. 이마를 어르만지는 찬 달빛의 은혜조차 오히려 화가 난다. ​이방인 낯익은 강아지처럼 발등을 핥는 바다바람의 혀빠닥이 말할 수 없이 사롭건만 나는 이 항구에 한 벗도 한 친척도 불룩한 지갑도 호적도 없는 거북이와 같이 징글한 한 이방인이다. ​밤 항구 부끄럼 ..

법정스님의 시 '1974년 1월 - 어느 몰지각자의 노래'

1974년 1월 - 어떤 몰지각자(沒知覺者)의 노래 법정(法頂) 1974.1. 1. 나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자 대한민국 주민 3천5백만 다들 지각이 있는데 나는 지각을 잃은 한 사람. 그래서, 뻐스 안에서도 길거리에서 또한 주거지에서도 내 곁에는 노상 그림자 아닌 그림자가 따른다. 기관에서 고정배치된 네개의 사복 그 그림자들은 내가 어떤 동작을 하는지 스물네시간을 줄곧 엿본다. 이 절망의 도시에서 누구와 만나 어떤 빛깔의 말을 나누는지 뭘 먹고 뭘 배설하는지 그들은 곧잘 냄새를 맡는다. 나를 찾아온 선량한 내 이웃들을 불러 세워 검문하고 전화를 버젓이 가로채 듣는다. 그들은 둔갑술이라도 지녔는가 거죽은 비슷한 사람인데 새도 되고 쥐도 되어 낮과 밤의 동정을 살피니 2. 시정은 평온하..

성기조의 '근황'

영면하신 스승님을 기리며.. 근황(近況) ​ 성기조( 1934. 6. 1. ~2023.10.16) ​ 잘 그려진 신선도(神仙圖)를 본다. ​ 그림 속의 노인과 말벗이 되어 천년도 넘는 옛날로 돌아가 우물 속에서 물을 퍼 올리듯 인정(人情)을 퍼 올리면 산굽이, 굽이를 돌아오는 학(鶴)의 울음 바람은 유현(幽玄)한 곳에서 꽃내음을 찾아낸다. ​ 노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따라오라고, 자꾸만 따라오라고 뒤범벅이 된 세태(世態) 시끄러운 거리 그리고 온갖 불신(不信)을 싸워 이겨 세상을 빨래하고 이슬 같은 인정을 찾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정자(亭子) 속으로 들어간다. ​ 잘 그려진 남화풍(南畵風)의 신선도(神仙圖) 그 속의 노인이ㅡ.

정학유의 흑산도 여행기 '부해기(浮海記)'

己巳(1808) 정학유 정민 역 2월 3일 지금 임금 원년 신유년(1801) 겨울에 -곧 가경 6년이다.- 중부(仲父)이신 손암 선생께서 흑산도로 귀양 가셨다. 섬은 나주 바다 가운데 있으니 큰 바다를 천 리나 건너야 한다. 바람과 파도가 몹시 거세서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이라도 감히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였다. 정묘년(1807) 봄에 학초(學樵)가 조운선을 타려고 행장을 이미 갖추었으나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중부께서는 아득히 기다리시다가 달을 넘기고서야 궂은 소식을 들었다. 궁하고 외로운 처지를 슬퍼하다가 도리어 병이 되어 해를 넘기도록 앓아 누워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었다. 무진년(1808) 봄에 내가 강진에 가서 거칠게 아버님을 봉양하였다. 아버님께서 내 손을 붙드시더니 울면서 말씀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