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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의 '홍경래전' - 1.귀향

New-Mountain(새뫼) 2022. 10. 2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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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전(洪景來傳)

 

 

이명선(李明善)

 

 

1. 歸鄕 (귀향)

 

순조 십일 년 구월(純祖 十一年 九月)의 일이다.

홍경래(洪景來)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자기 고향인 평안도 용강군 다미면 세동 화장곡(平安道 龍岡郡 多美面 細洞 花庄谷)에 나타났다.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산속의 절에 가서 공부하겠고 뚝 떠나가고 서는, 십 년 이상이나 종무소식이든 그가, 제법 서늘해진 가을바람을 안고 표연히 나타났다.

“그래, 그렇게 오랫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를 가 있었나?”

“산속에 들어가서, 몇 해가 걸리든지 성공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하더니 이때까지 산속에 있었나?”

“아마 공부가 어지간히 다 된 게지. 십 년이나 했으면 문장 다 됐지, 못 되겠나?”

— 이렇게 옛 친구들은 물어보았으나, 경래는 그렇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우물우물해 버렸다. 그리고서는

“어디 사람의 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가? 공부만 하더라도 그렇지, 파고 들어가면 도무지 한이 있어야지. 그러나 사내로 태어나서 기왕 한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에야 끝장을 보고서 말아야지. 그대로야 도중에서 물러설 수 있나? 그래서 이번에 다시 결심을 굳게 하여 가지고, 앞으로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공부를 계속해 나가서, 철저히 한 번 그 끝장을 보아볼 작정일세”

하고,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다.

“아니, 그러면 또 공부하러 떠나겠다는 말인가?”

옛 친구들은 깜짝 놀라서 이처럼 반문하였으나,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수삼 일 내로 곧 떠나야 되겠네. 사실은 가족들을 다리러 왔네. 어머니도 너무 고생이시겠고, 처자들도 떼어놔 둘 수만도 없어서, 이번에는 아주 이사를 해 버릴까 하네.”

“흠, 이사를? - 그동안에 어디 가서 자리를 잘 잡아서 매우 재미를 보는 모양일세그려.”

“무어, 별 재미있겠나만, 어떻게 해서 집안 식구들은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네.”

“암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렇게 수삼 일 내로야 떠날 수 있겠나? 인제 며칠 안 있으면 신곡을 먹게 되겠는데, 추수나 해 가지고 이사를 하여도 해야지, 일련 내내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 가지고, 그냥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하기야 가물에 다 타서 소출인들 변변할까마는 - .”

사실, 그 해 신미년(辛未年)의 가물은 퍽 심하였으며, 예년 같으면 벼가 누 - 렇게 익어, 들이 환 - 할 터인데, 올해는 벼가 처음부터 몇 치 자라지 못하였고, 돼지 꼬랑이만한 이삭이 가물에 타서 배배 꼬여 있었다. 작년에도 가물로 소출이 적었으나 올해는 작년보다도 훨씬 심하여, 농민들은 가을이 되어도 들에 나가서 논밭을 돌아볼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자네 이사 간다는 데는 농형이 어떤가? 풍년이겠지 - .”

“풍년? 천만에 - . 풍년 든 곳은 조선 팔도를 다 돌아다녀 봐도 아마 없을 것일세. 풍년 든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농사하고 인연을 딱 끊어보자는 것일세, 농사를 안 지면 풍년도 흉년도 없지 않나.”

“농사를 안 짓고 어떻게 산단 말인가? 평안감사라도 한 자리 땄단 말인가?”

“평안감사? 우리 평안도 개똥 불상놈들한테 그런 것을 누가 시켜준다나? 시켜주지 않으니까 이렇게 이사를 하겠다는 것이지.”

“안 시켜주는데 어떻게 이사를 하여?”

“안 시켜주니까 이사를 하겠다는 거여. 왜 우스워? 허허허.”

경래는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며, 자못 유쾌한 듯이 거리낌 없이 웃어 버렸다. 그의 친 구들은, 그가 십 년 전에 집을 떠나가기 전에도, 하는 것이 매우 달러서 자기들과는 서로 딱 들어맞지 않았으나, 지금 와서는 완전히 떨어져서 아주 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이란 집을 떠나서 오래 돌아다니면 저렇게 되는 것인가 - 막연히 판단하였다.

경래는 이사를 떠나는 전날, 제법 큰 잔치를 베풀었다. 술도 빚고, 떡도 하고, 농사 짓 는 데 쓰는 소까지 잡았다. 동리 사람들은 물론 많이 모여들었고, 굶는 집이 많은 판이라, 근동에서 몰려온 청하지 않은 객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러 손 중에서 경래가 유달리 관심을 갖고, 또 대접도 특별나게 한 것은, 유학권(柳學權)이라 하는 그의 외숙이다. 유학권은 거기서 육십 리나 떨어진 중화군(中和郡)에 사는 것을 사람을 시키어 일부러 불러온 것인데, 경래는 어려서 그에게 글을 배웠던 것이다.

“그래, 그동안 공부는 많이 진보되었느냐?”

유학권은 술을 몇 잔 마시고서 넌지시 경래에게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많이는 못 되었습니다만, 어지간히는 되었습니다.”

“그려? 허허허. 네 공부는 어릴 때부터 좀 다른 공부였으니까 - .”

“무어 다를 것도 없습니다. 다 그 공부가 그 공부지요.”

“그 공부가 그 공부라니? 그럴 수가 있나?” “아니, 그 공부가 그 공붑니다.”

“글쎄, 그럴 수가 있나? 그래, 추풍역수장사권(秋風易水壯士拳)으로 백일함양천자두 (白日咸陽天子頭)를 - 하는 공부가 어째 보통 공부란 말이냐?”

“네, 그 공부도 보통 공부와 결국은 같습니다.”

경래는 여전히 고집을 세웠다.

여기서 문제 되는 시는, 경래가 열두 살 때에 ‘송형가(送荊軻)’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을 때, 경래가 지은 시다. 경래가 이 글을 짓고서 참말로 천자의 대가리를 때릴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 둘러메는 것을 보고서, 선생인 유학권은 이 아이가 장내 큰일 저지를 짓을 짐작하고, 그만 겁이 덜컥 나서 집으로 돌려보내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경래는 제집에서 대개 자습으로 경사(經史) 일반을 공부하고, 과거를 보러 평양에도 가고 서울에도 갔었으나, 한 번도 급제하지 못하고, 이십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죽고 세상일이 도무지 맘에 맞지 않아, 산속에 들어가서 공부하겠다고 핑계하고 집을 떠나, 이래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십 년 동안에 경래는 그저 막연히 한문 책 권이나 들추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반다시 천자의 대가리를 때릴 공부를 하였을 것이라고 - 유학권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암만해도 너는 보통 사람 같지는 않다. 네가 여덟 살 때에 지은 거좌해압산(踞坐海鴨山)하여, 세족요포강(洗足腰浦江)을 - 하는 시를,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데, 암만 생각해 봐도 보통 시가 아니야.”

“그것을 무어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것이 있습니까? 또 그렇게 친다 할지라도, 천자의 대가리를 때리려면 다 그만한 때를 만나야지, 거저야 됩니까? 용이 하늘에 올라가려면 비와 구름을 맛나야 하는 것처럼 - .”

“그야 물론 그렇지. 용이 하늘에 올라가려면 비와 구름을 만나야지. 네 가난 데가 용 강이니까, 용이 될는지 뱀이 될는지. 되어보아야 알겠지요. 되다 못되면 이심이라도 되겠지요. 용강 이시미는 자고로 유명하니까 - .”

“이시미? 허허허, 박첨지에 나오는 이시미 말이지. 그도 그려. 허허허.”

술이 얼큰히 취한 유학권은 웃음으로 돌리며, 또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퍽이나 소심한 이 글방 선생님이 이처럼 대담하게 문답을 하고 웃고 하는 것은, 아마 술의 조화인 것 같다. 그러나 소심할 글방 선생님이, 이 근방에서는 경래가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리라는 것을 아는 단 한 사람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경래는 어머니와 처자를 거느리고, 북쪽을 향하여 먼 - 길을 떠났다. 이때까지 살던 집과, 얼마 되지 않으나 미구에 신곡을 먹게 된 전지를, 사촌과 육촌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걸 다 깨끗하게 청산하여버리고 총총하게 떠났다.

“별사람 다 있구먼.”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로구먼.”

“어릴 때부터 호탕하여 엉뚱한 짓만 하더니, 서른두 살이나 먹은 오늘에 와서도 여전 하구만 그래.”

동리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리었다.

경래가 고개 위에 서서 다시 한번 화장곡 동리를 돌아다 보았을 때에, 양지바른 산비탈에서 나무하는 머슴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또 왔다네 또 왔다네

김경서(金景瑞)가 또 왔다네. 들이치자

들이치자. 평양성(平壤城)을 들이치자.

 

“저 노래가 무슨 의민지 아시겠습니까?”

경래는 다리를 쉬고 있는 어머니한테 물었다.

“모르겠다 무슨 소린지 - . 예전에는 못 듣든 노랜데, 요새 새로 떠돌아 다니는 노랜가 보더라.”

“우리 평안도 김경서가 또 새로 나타났다는 노랩니다. 김경서 말이에요.”

“임진왜난(壬辰倭亂)에 큰 공을 세웠다는 장수 말이지?”

“네, 그런 장수가 또 나타났다는 말이에요. 우리 평안도에 - .”

“그렇게 되면 오작이나 좋겠니. 해마다 심해져 가고 나빠만 가는 세상을, 그런 장수가 나서 빨리 바로 잡아주어야지. 그대로야 어디 살아갈 수가 있니?”

“어머니는 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웬 이름은 새삼스럽게 - .“

“경래의 경은 김경서의 경 자고, 래 자짜는 올 래 잡니다. 그러니 김경서가 또 왔다는 것은,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호호호. 너는 이제 농담도 곧잘 하는구나. 호호호.”

“허허허.”

경래도 어머니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그대로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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