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 94

이명선의 '홍경래전' - 14. 정주 농성

14. 定州(정주) 籠城(농성) 송림의 패전으로 남군은 정주로 몰리고, 사송야의 패전으로 북군은 그 중심을 잃게 되어, 이미 대세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다. 허황, 김견신을 대장으로 하는 의주의 의병은, 정월 십일 일에 사용이 지키는 양책참을 쳐 회복하고 더욱 기세를 높이며 남하하고, 사송야 싸움에 이긴 관군은, 이와 전후하여 선천을 쳐 회복하고, 의기충천하여, 북쪽으로 처 올라왔다. 남하하는 의병과 북행하는 관군 틈에 끼이어, 잔병을 거두어 사이 길로 숨어서 정주성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때는 청천강 이북의 팔읍을 점령하여 평안도 전부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를 보이든 경래의 혁명군도, 기병한 지 이십여 일에 작전의 실패와 반역자의 속출로 도처에서 패퇴하여, 정월 이십 ..

이명선의 '홍경래전' - 13. 반역자

13. 反逆者 (반역자) 경래는 송림 싸움에 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아주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성곽이 견고하여 지키는데 유리한 정주에 우선 임시로 입성하여, 여기를 지키면서, 북군의 남하하는 것을 기다리고 창성(昌城) 강계(江界) 등지의 구원병을 재촉하여, 다시 남진을 꾀하자는 것이, 경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제 상처도 완전히 나아서, 직접 진두에 나서서 지휘하게 되면, 사기(士氣)도 왕성해지겠고 전국을 다시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창시와 송지염(宋之濂)이, 둘이 경래 앞에 나타나 난국의 타개책을 말하였다. 송지염은 원래 강계(江界)의 향임(鄕任)으로, 만주에 있는 중국 상인들과 어울리어 크게 장사를 시작하였다가, 수천 냥의 공금만 허비하고 이것을 갚을..

이명선의 '홍경래전' - 12. 송림싸움

12. 松林(송림) 싸움 이십 일 밤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어 혼수상태에 빠졌던 경래는, 그 이튿 날 저녁에야 겨우 의식을 회복하였고, 이십이 일 점심때부터 겨우 정신을 차리어 들어 누운 채로 군칙 등과 만나서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명령한 것이, 송림에 있는 홍총각에게 밀서를 보내어, 안주 공격을 중지시키는 일이었다. 자기들도 모르게 이러한 커다란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군칙은 펄펄 뛰며, 홍총각을 곧 불러다가 규율을 위반한 책임을 추궁하자고 서둘렀다. 경래는 책임을 추궁할 의사는 없었으나, 대린 이하 네 명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안주 병사 이해우가 무슨 커다란 모략을 하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음으로, 어쨌든 우선 홍총각을 박천으로 부르는 것이 ..

이명선의 '홍경래전' - 11. 안주

11. 安州 (안주) 안주(安州)는 평안도에서 제일가는 요지다. 바로 북에 청천강(淸川江)을 끼고 있고, 의주로 통하는 대로의 길목이라, 사십이 주의 병마(兵馬)에 대하여 명령권을 가진 평안 병사(平安兵使)의 본영(本營)이 있다. 따라서 성곽이 견고하고, 출반군졸이 늘 주둔하 고 있어, 시골 보통 소읍과는 그 형편이 매우 다르다. 안주가 이러한 요지니만큼, 경래도 여기를 함락시키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였었다. 그리하여 관군(官軍)의 병력이 이리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평양에서 대동관을 폭발시켜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도리어 이쪽의 비밀만 탄로시킨 결과로 되었으나, 경래의 안주 공격의 용의가 상당히 신중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안주에 있는 내..

이명선의 '홍경래전' - 10. 운명의 순간

10. 運命(운명)의 瞬問(순간) 십구 일 저녁에 가산을 출발하여 동행한 경래의 대부대는, 이십 일 새벽에 목적지 박 천(博川)읍을 정면으로 들이쳐서 단번에 함락시켰다. 박천군수 임성고(任聖皐)는 약졸(弱卒) 수십 명을 거느리고 도망하다가 중도에서 뿔뿔이 헤어쳐버리고, 성고는 서운사(棲雲寺)라는 절에 숨었다. 그러나 그의 노모(老母)가 경래의 군졸에게 잡히어 옥중에서 신음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고는 할 수 없이 절에 서 내려와서 경래의 진에 이르러, 나를 대신 죽여달라고 자원하였다. 죽여주시오 하니, 이것은 항복 이상이다. 군칙, 창시는 성고의 효성이 지극한 것을 칭찬하며, 죽이기는커녕 특히 후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효는 백행지본(孝百行之本)이니,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고, 이러한 효자를 학..

이명선의 '홍경래전' - 9. 북군

9. 北軍 (북군) 북군의 근거지는 곽산(郭山)으로, 부원수(副元帥) 김사용(金士用)은, 아장(亞將) 김희 련(金禧鍊)과, 김국범(金國範), 이성항(李成沆), 한처건(韓處坤)을 거느리고 십팔 일 점심나절에 곽산에 도착하였다. 모두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혹은 걸인의 행색을 하고, 혹은 붓 장사 행색을 하여 가지고, 하나씩 몰래 숨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곽산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중대한 난문제에 봉착하였다. 그것은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이 별장(別將) 최봉관(崔鳳寬)을 잡아 족치다가, 의외의 큰 사건이 탄로되어, 곽산의 김창시(金昌始), 박성신(朴星信)이 모두 여기 참가하였다는 것을 알자, 곧 포교(捕校)를 곽산으로 파송하여, 창시의 아버지와 (창시가 없었음으로),..

이명선의 '홍경래전' - 8. 기로

8. 岐路 (기로) 경래가 가산읍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밤도 너무나 깊었고, 또 선봉대가 벌써 점령할 것은 다 점령하여 버렸음으로, 그대로 쉬고, 이튿날 일찍이 수뇌부만 모이어 긴급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제일 먼저, 가산군수를 죽인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홍총각과 희저와 정면충돌을 하고 말았다. 희저는 어젯밤에 연홍의 집에서 자면서, 홍총각의 행동은 정의를 위하여 이것은 혁명군으로서는 절대로 용납되지 못한다는 것을 누누이 듣고 왔었으므로, 이것을 제 주장인 것처럼 내세웠다. “항복하려고 대장을 불러달라는 것을 죽이는 것은 항복한 것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오? 항복하는 자도 죽인대서야, 누가 항복을 하겠오? 우리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오.” “그 ..

이명선의 '홍경래전' - 7. 가산의 연홍

7. 嘉山(가산)의 蓮紅(연홍) 신미년(辛未年) 십이월 십팔 일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할 무렵에, 경래는 장병들에게 일제히 무장을 시키어 다복동 넓은 마당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대원수의 복장을 하고 단 우에 올라 공순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참모 김창시를 시켜서 격서(檄書)를 낭독케 하였다. 격서의 문구는 물론 한문으로 된 것이나, 그 내용은 대개 서북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누누이 말하여 도저히 그대로 참고 있지 못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서북 은 기자(箕子) 때부터,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천하에 그 이름을 휘날리든 구역(舊域)으로, 을지문덕(乙支文德), 양만춘(楊萬春), 서산대사(西山大師), 김경서(金景瑞), 정봉 수(鄭鳳壽) 같은 영특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고, 임진왜란 때에는 평안도 사람 힘으로..

이명선의 '홍경래전' - 6. 십이월 십팔일

6. 十二月(십이월) 十八日(십팔일) 신도회의가 끝나자, 각처의 거두들은 모두 바로 제 근거로 돌아가고, 다복동의 군졸의 훈련도 더 한층 격렬해졌다. 창시는 원래 정감록(鄭鑑錄)을 절대로 신입하고 있었음으로, 내년에 기병할 것을 미리 일반에게 암시하기 위하여, 임신 기병(壬申起兵)의 넉 자를 열여덜 자로 파작(破作) 하여 일사횡관하니, 귀신탈의하고, 십필가일척하니, 소구유양족이라 (一士橫冠, 鬼神脫依, 十疋加一尺, 小丘有兩足) — 이러한 괴상한 문구를 만들어 민간에 유포시키었다. 그리고 또 칠월 달부터 건방(乾方)에 헤성(彗星)이 나타나, 민간에서는 무슨 큰 변고가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판이라, 창시는 이것을 이용하여, 건방은 서북방(西北方)을 가르치는 것이니까, 서북방에서 큰 난이 일어나겠다는데 그..

이명선의 '홍경래전' - 5. 신도회의

5. 薪島會議 (신도회의) 경래가 고향에 가서 가족을 다리고 다복동에 돌아온 며칠 후에, 경래는 몰래 각처로 사람을 보내어, 그때까지 연락하여 두었든 각처의 거두(巨頭)들을 신도(薪島)로 소집하여 긴급히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신도(薪島)는 다복동 바로 앞을 흐르는 대영강(大寧江)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경래는 여러 사람의 이목을 피하여 대개 이 섬 속에 거처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모여든 거두는 가산(嘉山), 박천(博川), 태천(泰川),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철산(鐵山), 영변(寧邊), 안주(安州)와 같은 가까운 데는 물론이고, 구성(龜城), 용천(龍川), 삭주(朔州), 강계(江界) 같은 먼 데까지 - 거의 평안도 전세를 통하여, 현재의 왕조에 불평을 품은 유력자는 거의 전부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