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 94

한하운의 '작약도'

작약도(芍藥島) ㅡ인천여고 문예반과 ㅡ 한하운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芍藥島)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 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래소리 해미(海味)가에 흥겨우며 귀여운 신부와 한 백년 이렁저렁 소꼽놀이 어느새 섬과 바다와 소녀들은 노을 활활 타는 화산 불 인천은 밤에 잠들고 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 배는 해각(海角)에 다가서는데 소녀들의 노래는 선희랑 민자랑 해무(海霧) 속에 사라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녕 또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 작약도 : 영종도와 월미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으로 현재명 물치도임.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졸업식 연설문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연설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 중 하나를 졸업하는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이 자리가 대학 졸업에 가장 가깝습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

정태춘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정태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사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박경리의 '핵폭탄'

영화 오펜하미어를 보고 와서 핵폭탄 박경리 핵폭탄 한 개 천신만고의 산물인 그 한 개 좌판에 달랑 올려놓고 행인을 물색하는 노점상의 날카로운 눈초리 고독한 매와 같다 하기야 그것이 한 개이면 어떻고 천 개이면 어떠한가 터질 듯 기름진 거상이건 초췌한 몰골의 영세상이건 신념은 같은 것 죽음의 조타수임에 다를 바 없지 문명의 걸작이며 승리의 금과옥조 세계를 쥐고 흔든다는 것은 죽음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죽음의 행진 은밀한 그 발자욱 소리 죽음의 향연, 옥쇄를 앞둔 술잔 죽음의 난무, 멈출 수 없는 분홍신의 춤 미쳐서 세상이 보이지 않는 무리에게는 처참하고 웅대한 멸망의 서사시야말로 황홀한 꿈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파리 운동장이 된 굶주린 아이들 얼굴 주마등같이 지나가는 저 광활..

충정공 민영환 관련 대한매일신보 기사 - 인천영화학교

대한매일신보 풀어 쓴 이 신영산 민충정 혈죽가 인천영화학교 학생들 민충정공께서 절개를 지켜 돌아가실 적에 입던 피 묻는 옷과 피 묻은 칼을 두었던 방에서 대나무가 나왔단 말을 듣고, 본 학교 교사 박용래 씨가 데리고 있던 학생 이서준 최영창 두 사람을 서울로 올려보내 충정공댁에 가서 자세히 보고 오라 하였더니, 두 학생이 즉시 서울로 올라가 충정공댁에 가 본즉 과연 방안에 마루 놓고 마루 위에 네 벽하고 네 벽 위에 각 장으로 장판을 하였는데, 당당한 충절죽이 늠름히 나왔는지라. 두 학생이 돌아와서 여러 학생과 더불어 본 대로 한 바탕 설명하였더니, 모든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충절가를 지었는데 왼쪽과 같았더라. 어화, 우리 학도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소. 대한 동포 합심 기초 민충정의 공로로다. 이학준 ..

박남철의 자본에 살어리랏다

자본에 살어리랏다 박남철 1. 자본에 살어리랏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資本에 살어리랏다 머리랑 다리랑 먹고 資本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개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개 본다 믈 아래 가던 개 본다 '중과' 오일레밍oil-lemming 가지고 믈 아래 가던 개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중개'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다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돌도 黃金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利子에 살어리랏다 남의 자기 굴조개랑 먹고 利子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

기형도의 가을무덤-제망매가

가을 무덤- 祭亡妹歌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神經을 앓는 中風病者로 태어나 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

법정의 수필 '초가을 산정에서'

초가을 산정에서 - 법정 해발 890미터, 산 위에 올라와 오늘로 사흘째가 된다. 물론 혈혈단신 내 그림자만을 데리고 올라왔다. 휴대품은 비와 이슬을 가릴 만한 간소한 우장과 체온을 감싸줄 침낭, 그리고 며칠분의 식량과 그걸 익혀서 먹을 취사도구. 산에서 사는 사람이 다시 산을 오른다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로 산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적이 미치지 않은 보다 그윽한 산을 오르고 싶은 것이다. 새삼스레 등산을 하기 위해서거나 산상의 기도를 위해서가 아니다. 무슨 수훈(垂訓)을 내리기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한 꺼풀한 꺼풀 훨훨 벗어버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떨치고 나서게 된 것.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보다 더 투명해지고 싶어서, 더욱더 단순해지고 싶어서 산정(山頂)에 오른 것..

외솔 최현배의 시조 '한힌샘 스승님을 생각함'

한힌샘 스승님을 생각함 -가신 지 열다섯 해 에 최현배 백두산(白頭山) 앞뒤 벌에 단군 한배 씨가 퍼져 오천년(五千年) 옛적부터 고운 소리 울리나니 조선말 조선 마음이 여기에서 일더라. 골잘의 배달겨레 대대(代代)로 닦아내매 아름다운 말소리를 골고루 다 갖췄네. 훌륭ㅎ다 동방(東方)의 빛이니 더욱 밝아지이다. 세월이 반만년(半萬年)에 인물(人物)인들 적을쏘냐. 고운(孤雲)의 한문(漢文)이요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러라. 그러나 내 것 아니매 내 글만을 원(願)터라. 거룩하신 세종대왕(世宗大王) 온 백성 원(願)을 이뤄 이십팔자(二十八字) 지어내니 천하(天下)에도 제일(第一)이라. 좋은 말 좋은 글이니 민복(民福)인가 하노라. 보검(寶劍)도 갈아야만 날이 서 번득이고 양마(良馬)도 달려야만 기가 나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