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 98

연암의 '영초고(嬰處稿) 서문'

정민의 '연암독본1' - 비슷한 것은 가짜다. '그때의 지금인 오늘' 자패子佩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의 시를 지음은, 옛사람을 배웠다면서 그 비슷한 구석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않으니, 어찌 소리인들 방불하겠는가?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時俗의 잔단 것을 즐거워하니 지금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내가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볼만하겠다. 옛날로 말미암아 지금 것을 보면 지금 것이 진실로 낮다. 그렇지만 옛사람이 스스로를 보면서 반드시 스스로 예스럽다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보던 자도 또한 하나의 지금으로 여겼을 뿐이리라. 그런 까닭에 세월은 도도히 흘러가고 노래는 자주 변하니, 아침에 술 마시던 자가 저녁엔 그 장막을 떠나간..

도산 안창호의 '청년에게 부치는 글'

青年에게 부치는 글 島山 安昌浩 人格完成 團結訓練 대한 청년 제군에게 대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또 하여야만 될 말이 많으나 경우로 인하여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다만 그 중의 몇 가지만을 말하려 한다. 지금 우리는 참담 비통한 苦海에서 헤매며 암흑한 雲霧 중에 방황 주저하고 있다. 이 비상한 경우에 처한 대한 청년 제군이 이 고해를 開除하고 운무를 開除하고 나아갈 길을 어떻게 정하였는가. 오늘 일반 민중에게 큰 기대를 많이 가진 제군, 또 스스로 큰 짐을 지고 있는 제군의 하여야 할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하고 힘쓸 것은 인격훈련과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라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현하 우리 생활에 직접 관계가 없는 듯이 생각하여 냉대시하는 이도 있고, 또는 이 ..

김법순과 김푼수의 손 그림 증서

풀이 신 영 산 右 標(우표) 事段(사단)은 本人(본인)이 與(여) 右宅傭女(우택용녀) 金紛守(김푼수)로 有厥情約(유궐정약)이온 바, 該女(해녀)가 幼有重病(유유중병)ᄒᆞ야 以終身復(이종신복) 役次(역차)로 宅之買萬(택지매만) 醫治(의치)가 三經三次而萬價至參百兩云(삼경삼차이만가지삼백냥운)ᄒᆞ이 今當率去該女之境(금당솔거해녀지경)에 右 萬價(우만가)를 不得不代爲辨納(부득부대위변납) 故(고)로 錢參百兩準數辨納(전삼백냥준수변납)ᄒᆞ고 該女(해녀)은 卽爲率去(즉위솔거)ᄒᆞ거온 日後(일후)에 若舊炳(약구병)이 復發(복발)이거나 或有其他(혹유기타) 事段(사단)이라도 更無退悔之意(갱무퇴회지의)로 成出此文(성출차문)ᄒᆞ고 與該女(여해녀)로 共納手形(공납수형)ᄒᆞ야 以爲憑據(이위빙거)ᄒᆞᆷ. 隆熙 四年(융희사년) 陰曆(음..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

자산어보 서(玆山魚譜 序)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명현 옮김 茲山者, 黑山也. 余謫黑山, 黑山之名, 幽晦可怖. 家人書櫃, 輒稱兹山, 茲亦黑也. 자산자 흑산야 여적흑산 흑산지명 유회가포 가인서궤 첩칭자산 자역흑야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두운 느낌을 주어서 무서웠다. 집안사람의 편지에서는 번번이 흑산을 자산이라 표현했다. ‘자(玆)’자 역시 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茲山海中魚族極繁, 而知名者鮮. 博物者所宜察也. 余乃博訪於島人, 意欲成語, 而人各異言, 莫可適從, 자산해중어족극번 이지명자선 박물자소의찰야 여내박방어도인 의욕성어 이인각이언 막가적종 자산 바다의 어족은 지극히 번성하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아는 어족은 거의 없..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 ​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 시집「수평선 너머」..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는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라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

다시 꺼내 읽는 김훈의 '자전거여행'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 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