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36

34. 에필로그

34. 에필로그 신기정가 지은이 산중처사 어리석은 이 인생이 제 팔자 제 몰라서 망령된 어린 마음 부귀를 구하려니 어화 허사로다, 세상사 허사로다. 공명은 아니 오고 흰 머리 뿐이러니 지천명 되온 후에 내 팔자 내 알리라. 좁쌀밥이 다 익을 제 긴 잠에서 깨어나니 꺼림 없는 녹수청산 한가한 서운 골에 안개 노을 의지하고 사슴이 벗이 되어 우연히 정한 터가 이곳이 별천지라. 이름 좋고 경치 좋은데 한 칸 초가 짓고지고. 불타산 맑은 곳에 흰 구름을 높이 쓸어 절벽 위에 하늘 아래 네 면이 석벽이라. 하늘이 만들었으니 인력이 아니로다. 무릎이 옮겨지니 넓고 큰 집 바라겠나. 절묘한 산정에서 눈앞을 바라보니 자맥봉은 저기 있고 임수봉은 앞에 뵌다, 뒤에서는 연화봉서 맑은 바람 건듯 불어 봉봉마다 장한 기상 산..

33. 기획관 송미영

33. 기획관 기획관 송미영 “문화관광과에 오래 있었어도 문화원은 처음 와 보네요.” 문화원 현관 바로 옆의 소파에 앉으며 송미영이 밝게 웃는다. “여기서는 성수산이 안 보이네요. 저 산은 이름이 뭐에요?” 처음 문화원에 왔을 때보다 산빛은 더 야위어졌다. 햇빛도 짧아지면서 누런빛이 비슷하게 내리쬐면서 앙상함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곳으로 옮겨 온 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주변 지명은 아는 게 없다. 문화원 직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냥, 앞산이래. 눈이 오면 군데군데 있는 파란 산죽이랑 어울려서 볼 만한 그림이 된다고 하던데. “가사 한 편 쓰더니 주무관님 시인이 다 되셨네요. 저 나무도 느티나무인가요? 멀쩡하네. 군청 앞의 느티나무는 못살 거 같다고 하던데요.” 느티나무가 아니라 팽나무이다...

32. 여섯 살 변예슬

32. 여섯 살 변예슬 성수산에서 내려온 물이 호박벌의 북쪽을 뚫고 흘러가고 있다. 성수산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모르지만, 서운군의 공식 강수량은 이틀간 합하여 55밀리였다. 다행히도 예상한 강수량을 밑돌았다. 또 태풍은 예상보다 빠르게 남쪽으로 지나갔다. 서운군이 태풍 때문에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겨울 작목을 위한 새 비닐하우스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고, 벼 수확도 거의 끝난 상태였다. 다만 군청 앞에 있는 500년 된 느티나무의 큰 가지 셋 중 두 개가 부러졌는데, 살지 죽을지는 내년 봄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축제 개막일을 하루 앞둔 호박벌은 작업이 한창이다. 부스들이 만들어지고, 트럭들이 바삐 들락거린다. 질퍽한 바닥에는 고운 자갈들이 깔리고 있다..

31. 지역축제팀

31. 지역축제팀 어제 일요일 밤, 현대어로 옮긴 신기정가를 J대학교 정일영 교수와 가사연구원 주신호 연구사에게 메일로 보냈다. 한 번 읽어 보시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오늘 아침 컴퓨터를 켜 보고 메일함을 열어보니, 답이 없다. 주 연구사는 조금 전에 메일을 받았고, 정 교수는 아직 메일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약속한 월요일 아침, 현대어로 번역된 신기정가를 usb에 담고 원 대표에게 전화한다. 곧 출발합니다. 아, 저는 지금 협력업체에 와 있습니다. 이리로 직접 오시죠. 내비게이션에 찍으라며 주소를 하나를 보내 준다. J시 인근의 공단이다. 차를 몰고 간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에서 이르는 곳에 원 대표가 우산을 받으면서 기다리고..

30. 축제팀 현경숙

30. 축제팀 현경숙 결국, 결정했다.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10년 넘는 공무원 생활에서 내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목은 ‘신기정가’이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 ‘기’자가 ‘터 기(基)’자인지, ‘기록할 기(記)’자인지 따질 필요도 없다. 그냥 한자는 빼고 한글로만 ‘신기정가’라고 쓰면 된다. 작자는 ‘산중처사’. 어떤 이유에서 맨 뒤의 ‘산중처자’를 맨 앞에 ‘산중처사’라고 옮겨 적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옮겨 적었던 사람이 잘못 이해했던 것이겠지만, 그냥 ‘산중처사’로 한다. ‘지은이 미상’ 하는 것보다는 그게 좀 더 그럴듯하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진에 들어 있던 시조 한 편, 결국 버리지 못한다. 선택지 중 세 번째를..

29. 큰누이 김영숙

29. 큰누이 김영숙 “술도 못 이기면서 뭔 술을 그리 먹었냐?” 천장이 낯설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다가 점차 낯이 익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아쥐고 어젯밤 일을 반추해 본다. 모르는 사람의 상갓집에 갔던 일, 학회장인가에게 야단을 맞았던 일, 정 교수가 가사비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했던 일. 그리고 그다음에. 대리기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근처에 맥줏집으로 혼자 들어갔다. 전작이 있어서인지,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인지, 맥줏집에 많이 마셔서인지 그다음부터는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택시를 불러 탔는데, 택시는 J시 시내로 달려 큰누이가 살고 있는 집 앞에 나를 내려놓았다. 어렴풋하나마 거기까지가 기억되는 부분이다. ..

28. 학회장 차기석

28. 학회장 차기석 책상 위에 올려둔 탁상 달력의 12일에 붉은 큰 동그라미가 둘러 있다. 이제 이틀 앞이다. 드디어 컴퓨터 속에 들어 있던 가사가 출력되어 책상 위에 올라왔다. 세상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현대어 가사이다. 그 옆에 ‘신기성가 산중처자’라는 이름의 시조도 출력하여 가사 옆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아니 다 끝나지 않았다. 남은 일이 있다. 이틀 후 남태전통건축에 갈 때, 이 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삿짐을 다 싸서 트럭에 실어 놓았는데, 갑자기 한 무더기 짐이 갑자기 더 나온 모양새다. 가능한 선택지를 생각해 본다. 시조를 아예 버리는 것. 또는 원래 순서대로 가사는 가사대로 시조는 시조대로 나란히 싣는 것.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시조를 어느 정도 문맥에 맞게끔 가사..

27. 축제팀 천승남

27. 축제팀 천승남 신기정은 없었는데, 신기정을 세워야 한다. 신기정가가 가사비인지 시조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에 신기정가를 띄워 놓았지만, 딱히 한 것이 없다. 볼펜 끝만 물고 화면을 응시하면 날짜와 시간이 찍히는 화면보호기가 켜진다. 마우스를 흔들어 다시 신기정가를 띄우면 잠시 후에 화면보호기가 켜진다. 지금 나는 신기정가를 내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정가의 작자, 산중처사로 빙의되어 가고 있다. 다시 신기정가 안으로 들어간다. 산중처사, 아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가사의 작가는 신기정가를 지으며, 아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사를 지으며, 성수산 아니 불타산에서 행복했을까. 杜鵑이ᄂᆞᆫ 우러녜니 巖花ᄂᆞᆫ 반만 픠..

26. 축제팀 현경숙

26. 축제팀 현경숙 “이것들이 지금까지 정리된 프로그램이에요.” 호흡이 버겁다. 십 분도 안되는 짧은 브리핑을 의자에 앉은 채로 하였음에도 현경숙은 힘들어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지역축제팀을 포함한 문화관광과 전 직원 모두가 모인 소회의실. 회의실 벽에 붙여둔 D-20이라는 A4 종이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인다. 테이블 위의 펼쳐진 계획서들보다 펄럭이는 종이가 더 눈에 들어온다. 곧 떨어질 것 같아 위태하다. “호박을 재료로 하는 요리 체험 부스는 전부 일곱 개이네요. 더 늘리거나 빼거나 할 거 없죠. 그러면 이대로 확정하여 팸플릿 인쇄 넣을게요.” 처음 팀원들이 상견례를 할 때, 현경숙은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곧 출산해야 하는데, 이리 보냈다고 투덜거렸다. 축제일이 확정되자 축..

25. 산중처자

25. 산중처자 글자들이 모여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 행이 되며, 행이 모여 글이 되어간다. 신기정가는 내 컴퓨터 속에서 점점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다. 이에 맞추어 호박벌도 터를 잡고, 터 위에 부스가 서고, 부스 안에 기물이 설치되고 있다. 팀장과 천승남, 손상섭은 사무실보다는 현장에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송미영은 매일 전화를 붙들고 있다. 부탁하고, 다투고, 읍소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해당 사무실로 서류를 들고 뛰어간다. 원래 저 일이 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부탁하고 다투고 읍소하는 대상은 신기정가이다. 살살 달래 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풀어나간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신기정가는 제 꼴을 갖추어 간다. 그래도 남은 문제는 있다. 가사연구원에서 보낸 파일 중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