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시; 23년 이후 15

갈아타는 곳을 찾아

갈아타는 곳을 찾아 이러구러 별 뜻 없이 유쾌하게 키득거리다가 일상처럼 소주잔을 홀짝홀짝 기울이다가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조심조심 제기면서 지하철 역사로 들어선다. 그리고 머뭇거린다. 지상의 모든 것 복잡함과 번거로움을 몇 개의 선과 몇 개의 점으로 단순화한 지하철 노선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린다. 어디쯤에서 선을 바꾸고서 어느 점을 향해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는 것이 빠른지, 편한지를 따져보며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머뭇거린다. 지금까지 지나온 선은 무슨 색이었고 어디쯤에서 선을 바꾸었으며 지금 취해 머무는 점은 어디인지 잠시 머뭇거린다. 과거의 선과 점들이 앞으로의 선과 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낯선 역사의 풍경 속에 우두커니 서서 시답잖게 머뭇거린다. 이리 가나 ..

밀물이 밀려드는 바닷가에서

밀물이 밀려드는 바닷가에서 밀물이 밀려드는 바닷가에서때를 아는 듯한 뿌연 바닷물이 저 멀리서 차근차근 밀려오기에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저 앉았다. 그래야 할 것 같다. 버겁게 흘러오는 물에 대한 예의이기에. 짭짤한 갯내음 사이로앞에서 뒷물을 끌어오는 물결이나바로 뒤에서 앞물을 밀고 가는 물살이나저 멀리 있을 법한 기조력이나끊어질 듯 이어지는 근원이나그저 그저 바라봐야만 할 것 같다.성근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바람을 잠시나마 달래면서. 여기까지 찾아오기 참으로 힘겨웠겠지만잠시 발 아래서 찰랑이다가 때를 아는 바닷물은 곧 밀려갈 터이다.하지만 여전히 앉아 있을 것이다.그래야 할 것 같다.힘겹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의례이기에. (2024.5.25)

옛글을 읽다가

옛글을 읽다가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인데 그때를 지금으로 힘겹게 불러내어 지금의 말과 마음으로 그때를 살피다가, 여기는 여기이고 거기는 거기인데 여기에서 거기로 낯설게 다가가서 거기의 발자취 찾아 여기처럼 더듬는데, 문득 떠오르다 홀연히 나타나는 옛사람들. 몸짓이 거세된 사람들. 지금의 여기로부터 달아나려는 사람들.

영종도 예단포 바닷가 들국화

영종도 예단포 바닷가 들국화 영종도 예단포 인적 뜸한 바닷가에 하루를 달려온 저물녘의 햇빛 아래 한 해를 더듬어가는 늦가을의 서늘함에 이파리는 자취처럼 시들어 부서졌는데 빛깔은 농염하게 시간을 덮어가고 향기는 쩌렁쩌렁하게 빛깔을 감쌌구나. 어허, 이리 외딴 곳에 느지막이 피어나서 어허, 이리 풍경을 향기로 물들이며 그렇게 길가는 시선을 모아서 거두는가. 국화 옆에 나란하게 바닷바람 맞으면서 국화 옆에 손을 잡고 지는 해를 바라보느니 아내여, 저 국화같이 아름다운 인연이오. (2023.11.06)

저녁에

저녁에 구순에 가까운 장인이 말하기를,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바닥에 있었는지 따가워 깨어났구나, 꿈인듯 생생하더라. 육순에 가까워진 아내가 답하기를, 푹신한 구름 위에 지금 누워 계신다오. 그러니 평안히 깨었다 다시 꿈을 꾸었지요. 이파리는 넓게 펴져 구름을 이고 있고 구름은 흘러가며 이파리를 안고 있고 맞잡은 부녀의 손에는 시간이 멈춰 있고. (2023. 0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