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시; 14년 이후 72

뒷모습에 대하여 - 겨울산을 내려오며

지금도 내려 걷고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뒤를 보지는 않습니다. 발밑으로 채이는 낙엽이라든지, 벌써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이제 내려가는 일만 생각합니다. 꽤나 많이 내려온 것임이 분명했지만, 얼마나 더 내려가야만하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잠시 쉬기로 하였습니다.  그루터기에 돌무지에 아무렇게나 곤한 몸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데자뷰인양 낯익은 얼굴도 내 옆에서 쉬고 있습니다. 산을 올라가는 길에 더 오르기 위해 잠시 호흡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올라가야 할 길은 보지 않고 올라온 길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습니다.  올라오며 남겨둔 적지 않은 흔적을 헤아려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저 멀리 있을 시작점에 대한 아쉬움을 곰곰이 새기고 있는 것일까요. 혹 거기에 남..

박물관에서 추사의 편지를 보다

이미 늦은 가을처럼 쓸쓸하다 끝없이 누렇게 시든 들판이 바탕이 되어 이백년 전 사내의 삶은 굴곡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리고 다시 끊어지는그렇게 조마조마하게 살았을까아니 다시 굵은 획이 되어 세상을 자랑했을까 그러다가 험한 바다 구겨진 종이를 건너 먼 탐라로 건너갔을까....  저 여백처럼머릿속 하얗게 아내의 죽음을 듣고 편지의 한 귀퉁이를 가슴을 담아 쥐어뜯어내렸을까떨어져 망실된 나머지 부분들을 끌어 안고시간 속으로 사라졌을까 사내의 삶은 유리 속에 박제되었다그 흔적들은 거울이 되어 사라지고 일상이 급한 다른 사내의 얼굴을 비껴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