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 229

11. 산중처사

11. 산중처사 본격적인 신기정 찾기가 시작되었다. 신기정에 대해 내가 지금 가진 정보는 컴퓨터 모니터 위에 떠 있는 서운군과 성수산 일대를 나타낸 지도와, 정일영 교수가 서운문화에 쓴 논문 한 편, 그리고 토박이 손상섭의 기억이 전부이다. 이것들을 조각조각 꿰맞추어 신기정을 찾아야 한다. 아니 신기정은 지금 존재하지 않기에, 신기정이 세워졌던 위치를 추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기정을 세워야 한다. 신기정가를 다시 읽어본다. 지명과 관련된 부분부터 찾아가며 신기정가의 위치가 나타날 만한 구절을 찾아본다. 일흠 됴코 景 됴흔 ᄃᆡ 一間茅屋 짓고 졔고 佛陀山 靜散地의 白雲을 놉피 쓸어 이름이 좋고 경치가 좋은 곳에 한 칸짜리 띳집을 지으련다. 불타산 정산지에 있는 흰 구름을 높이 쓸고서. 정산지라는..

10. 딸 김민서

10. 딸 김민서 “학교 갔다 오고, 학원도 갔다 오고, 지금은 혼자.” 당연히 혼자일 시간이다. 반가움이 앞서지만, 애틋함 사이에 배어 있는 미안함을 이겨내지 못한다. 항상, 그렇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딸 민서와의 유대. 민서가 두 살 때 아내와 별거를 시작했고, 다섯 살 때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그래도 열한 살이 된 딸과의 유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통화와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식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잠깐 오셨어.” 민서에게는 할머니가 두 명 있다. 나의 어머니와 정민의 어머니. 민서가 지금 말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외할머니이다. 나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혼으로 며느리가 떠나가는 것까지는 받아들였지만, 손녀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틈만 나면 내 손녀를 찾으..

9. J대 교수 정일영

9. J대 교수 정일영 “누구시라고요? 아 서운군청.” 정일영 교수와의 통화 연결은 힘들었다. J대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 국어국문학과를 찾고, 거기서 다시 과사무실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가 연결되자 내 신분을 알리고, 간단하게 용건을 전하고, 조교인지에게 정일영 교수를 찾는다고 전했다. 통화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부재중이라는 소리를 들은 다음에 내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리고 이틀 지나 문자가 날아왔다. 몇 시쯤 아래 번호로 연락하면 통화할 수 있을 거라고. “엊그제 신기정가 때문에 전화하셨다고요?” J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정일영. 굳이 따지면 J대학교 국문학과의 선배이다. 하지만 동문회 등에서 만나 친교를 맺는 선후배 관계란 나에게는 없다. 나는 기억의 저만치서 정 교수를 끄집어냈지만, 정 교수..

8. 축제팀 손상섭

8. 축제팀 손상섭 “이게 그거예요?” 우락부락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안이 나를 덮칠 듯이 다가온다. 보디빌더 손상섭. 손상섭이 모르는 군청 사람은 많아도, 손상섭을 모르는 군청 사람은 적었다. 사람에 관심이 없는 나도 손상섭을 알고 있었다. J도 보디빌딩 대회 2년 연속 금메달. 작년 전국 보디빌딩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걸었다. 메달을 걸고 온 날 읍내가 떠들썩했고, 군청에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전임 군수와 손상섭이 나란히 찍은 사진은 서운신문의 1면에도 실렸다. “이것도 한국 글자에요? 하나도 못 읽겠네.” 원문을 복사한 신기정가를 못 읽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보통 두 음보가 한 구가 되고, 두 구와 네 음보가 한 행이 되는 것이 가사의 기본 형식이라고 배운 기억이 어렴풋한데, 이 글은 이어짐과 ..

7. 축제팀장 민수연

7. 축제팀장 민수연 “기획관이 뭐라고 해요?” 털썩 앉으며 책상 위에 서류철과 책을 던져둔다. 책상 위에 종이 뭉치가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기다렸다는 듯이 팀장이 자기 말을 더한다. 순간 사무실 안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려옴을 느낀다. 팀장은 기획관이 뭐라고 해요, 라고 했지만, 기획관에게 뭐라고 했어요, 하는 소리로 들린다. 생각해 보니 기획관에게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다. 달랑 다섯 명인데 거기서 사람 빼가면 남는 사람은 뭐가 돼요? 카랑카랑한 송미영의 목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을 울린다. 내가 오층에 있는 동안, 내가 불리어 간 이유에 대해 팀장과 팀원들이 열띠게 작금의 상황에 대한 말을 주고받았음이라. 그리고 5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는 사이에 했던 잠깐의 고민. 그러니까 내가 정자 세우는 일을 맡..

6. 기획관 박민구

6. 기획관 박민구 “갑자기 도청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왔네요. 도지사님 뵙느라고.” 도지사를 보러 간 사람은 군수였을까, 박민구였을까. 박민구는 군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있다. 앞뒤 좌석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군수와 같은 차를 타고, 다른 테이블에 앉을지언정 같은 밥을 먹고, 벽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언정 같은 101호 사무실에 앉아 있다. 군수가 만나는 대단한 사람들을 함께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군수가 하는 일이 자신이 하는 일이 되고, 자신이 하는 말이 군수가 하는 말이 된다. “엊저녁에 영감님 모시고 갔다가 청에 돌아와서 인터폰 넣으니까 안 받더라고요. 많이 기다렸죠?” 기다리게 한 것을 미안해하는 것인가. 기다리지 않고 퇴근한 것을 힐책하는 것인가. 어제 오후 내내..

5. 밥집 할미

5. 밥집 할미 “혼자여?” 혼자이다. 같이 나왔던 천승남은 잠깐 다른 일이 있다 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아마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고 차 한잔 마시고 오후에나 나타날 것이다. 천승남은 같이 근무했던 옛 비서실 사람들과 밥도 술도 잘 먹는다. 하지만 나는 축산지원과를 떠나온 후 그렇지 못했다. 옛 동료들과 같이 먹은 밥이나 술을 따져 보니, 다섯 손가락이 채워지지 않는다. “아직 밥때는 멀었는디.” 휴대전화를 열어본다. 열한 시가 안 되었다. 밥을 먹으려고 밥집에 온 것이 아니니까 밥이 익은 것과는 상관은 없다. 여기는 따로 상호도 없는 밥집이다. 원래 군청 건물 바로 앞에 있었다는데, 새로 군청을 신축하면서 군청 정문에서 비딱한 위치로 비껴가게 되었다고 한다. 밥값이 저렴하고, 시설은 더 저렴하고,..

4. 축제팀장 민수연

4. 축제팀장 민수연 “기획관도 참 유별나네요. 볼 일 있으면 조용히 선배에게나 메시지를 보내던지 인터폰을 하지, 팀원 모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건, 참.” 털썩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의 팀장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던진다. 목소리의 톤이 낮고 허스키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그리 화려한 옷차림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세련되었다. 지역축제팀의 민수연 팀장. 원래 군청 소속이 아니다. 아니 아예 공무원이 아니다. 서울의 A기획사 소속인데, 호박 축제를 위해 촉탁직으로 부임해 왔다. 내가 민 팀장에 대해 아는 것은 거기까지다. 군청과 어떻게 계약을 맺었는지, 학교는 어디를 어디까지 나왔는지, 기혼인지 미혼인지도 모른다. 2시간 거리의 J시에서 서운군까지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는데, J시의 어디에 거주하는지도 ..

3. 군수 석동열

3. 군수 석동열 “군수님, 문화관광과 김영태 주무관 올라왔습니다.” 101호 안쪽에 군수만을 위한 공간이 열려 있다. 커다란 책상이 위압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번쩍이는 응접세트가 권력을 과시한다. 한쪽 벽 책장 몇 개에는 이런저런 기관의 연감들만 꽂혀 있지만, 아직 빈 곳이 많아 군수의 임기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101호의 대부분 공간은 비어 있다. 단 한 사람이 근무하는 공간으로는 너무 넓다고 생각한다. 평수에 대한 감각이 워낙 떨어져서 이곳의 넓이가 어떤 숫자로 계산될지 얼른 가늠할 수 없다. 얼핏 따져 보면 예전에 근무하던 축산지원과 사무실의 두 배쯤이거나, 지금 근무하고 있는 문화관광과 사무실의 한 배 반쯤의 크기일까. 또는 군청과 버스터미널의 중간쯤에 있는, 서..

2. 기획관 박민구

2. 기획관 박민구 공간이 낯설다. 같은 군청 건물 안이기에 여기가 내가 근무하는 2층과 다를 것도 없다. 하지만 다르다. 군청의 모든 사무실의 호수는 위치한 층의 숫자로 시작한다. 문화관광과는 2층에 있으니까, 211호이다. 하지만 여기는 예외다. 5층인데도 101호이다. 이 5층 101호 앞에 서서, 스스로 작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잠시 심호흡.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위축을 강요받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햇빛을 다 쓸어 담을 듯이 복도 쪽을 뚫어버린 통 창문. 군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동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5층의 외딴 공간. 그리고 내 앞에는 어느 쪽이 열리고 어느 쪽은 닫혀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원목으로 된 육중한 쌍여닫이문. 공무원이 밟기에는 왠지 송구스러운 발아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