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6. 기획관 박민구

New-Mountain(새뫼) 2022. 8. 14.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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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획관 박민구

 

  “갑자기 도청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왔네요. 도지사님 뵙느라고.”

  도지사를 보러 간 사람은 군수였을까, 박민구였을까. 박민구는 군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있다. 앞뒤 좌석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군수와 같은 차를 타고, 다른 테이블에 앉을지언정 같은 밥을 먹고, 벽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언정 같은 101호 사무실에 앉아 있다. 군수가 만나는 대단한 사람들을 함께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군수가 하는 일이 자신이 하는 일이 되고, 자신이 하는 말이 군수가 하는 말이 된다.

  “엊저녁에 영감님 모시고 갔다가 청에 돌아와서 인터폰 넣으니까 안 받더라고요. 많이 기다렸죠?”

  기다리게 한 것을 미안해하는 것인가. 기다리지 않고 퇴근한 것을 힐책하는 것인가. 어제 오후 내내 5층 101호로부터의 호출을 기다렸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서운신문에 보낼 축제 관련 기사, ‘펌킨 클라우드 페스티벌 준비 차질없이 이루어지고 있어’, 하는 제목만 계속 떠 있었다. 제목 아래의 본문은 잘 써지지 않았다. 군수를 인터뷰하고 지역축제 현장을 취재한 기사의 포맷이어야 하는데, 군수는 없고, 축제 현장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기자의 시점으로 치환시키기는 더 어려웠다. 더군다나 박민구가 오후에 보자고 하지 않았던가. 언제 불리어 갈지 모르기에 쉽게 새 일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도내 군수님들, 시장님들 모두 모이셨는데 굉장했어요. 엊저녁 뉴스에 방송되었는데, 봤어요?”

  기획관이라는 직함을 달았지만, 아직까지는 일찍 퇴근해버린 나를 야단치기가 쉽지 않다. 박민구는 화제를 돌린다. 하지만 박민구와의 공통된 화제는 형성되지 않는다. 저녁 뉴스를 보지 않았다. 저녁 뉴스가 방송될 시간에 오피스텔에서 기자가 되어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기사를 썼으니까. 저녁 뉴스 끄트머리에 잠깐 나오는 지역 뉴스까지 꼼꼼히 챙겨볼 만큼 지역 동향에 세심하지는 않다.

  “우리 영감님 안목이 대단해요. 도지사님께서도 그러셨거든요. 우리 도의 곳곳에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널리 알려야 한다고. 그게 미래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산이라고. 근데 우리 영감님은 이미 발굴하셨거든.”

  저녁 뉴스이든, 문화유산이든 박민구가 말하고 싶어 하는 말의 범위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침묵으로 대답한다. 박민구는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런 소통 능력을 갖추기 위한 정보도 교감도 내게는 없다. 침묵이 이어진다.

  “어제 영감님께서 김 형이 큰일을 할 거라고 말씀하셨죠?”

  박민구는 소통을 포기한다. 대신 주섬주섬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철을 들고 온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탁자 위에 서류철을 소리 나게 놓는다. 소통보다는 업무지시가 더 간단하고 즐겁다.

  “이것 좀 볼래요?”

  서류철을 넘겨 본다. 서운군 문화원에서 발간한 서운문화 한 권. 한자와 고어가 그득한 옛 문서 복사본 석 장. 그리고 2년 전의 서운신문 한 장.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新記亭歌 山中處士, 신긔졍가 산듕쳐ᄉᆞ’. 복사물은 석 장인데, 첫 장 맨 오른쪽에 세로로 그렇게 쓰여 있다. 맨 앞엣것은 제목이고, 뒤엣것은 작자인 듯하다. 이번에는 서운문화를 넘겨 본다. 책 중간에 포스트잇을 붙여 두었다. ‘새로 발견된 신기정가에 대하여, 정일영(J대학교)’. 논문이다. 낡은 서운신문에서는, ‘세상에 나온 서운군의 신기정가’라는 큰 활자가 제목으로 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국문과 나왔으니까, 이게 뭔지는 알 거예요.”

  글쎄, 국문학과를 나왔지만, 이것들이 뭔지는 모르겠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선배 가사 알죠? 노래 가사 말고, 시조 가사 할 때 하는 가사. 관동별곡 사미인곡이 가사잖아요. 하긴 알겠지. 행정학과 나온 나도 기억하는데.”

  박민구는 오랜만에 선배라는 호칭을 호출하며, 내가 이것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그래, 가사가 무언지는 안다. 그래도 국문학과를 나온지라 공무원 수험서가 빼곡한 어딘가에 문학개론, 국문학사 한 권 정도는 꽂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사라는 갈래의 정체는 안다. 하지만 가사의 정체성을 설명할 지적 능력은 없다. 내게 대학에서의 전공 공부란 학문이 아니라 졸업을 위한 통과의례였다.

  “이게 천남면에서 발견된 거래요. 5년 전인가? 그리고 이건 J대학교 정일영 교수가 이 가사에 대해 쓴 글이고, 이게 그걸 보도한 신문기사에요.”

  박민구가 펼쳐진 책자와 신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여 가며 설명을 한다. 천북면 어느 노인네가 집안 족보를 다시 꾸미려 했단다. 구석의 궤짝에 있는 족보들을 꺼냈는데, 무심히 족보 뒤에서 이것들이 따라 나왔다더라. 그래서 초등학교 교사인 사위에게 이게 무언지 알아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위가 J대학의 교수에게 보여 주었더니 미발표된 가사라고 확인해 주었다고 한다. 서운문화에 실린 것은 그 교수가 가사를 소개한 논문이다. 그리고 이상의 과정을 정리한 것이 이 신문 기사이다.

문득 어느 공무원이 이 기사를 대신 썼을까 생각한다.

  “아마, 노인네가 진품명품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 봤겠죠. 그래서 돈이라도 될지 몰라서 교수한테 갔을 거라.”

이 말은 신문에도 책자에도 없는 내용이다. 제 말에 취한 박민구가 지어내는 말이다. 뭔가 내 반응을 바라고 한 말일 텐데, 나는 여전히 잠자코 듣고만 있다. 답답해하는 박민구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근데 이게 마침 천남면이잖아요.”

  천남면? 천남면과 이 가사가 무슨 관계라고.

  “아, 김 형. 아직도 이해 안 돼요? 우리가 호박 축제하려는 데가 천북면, 천북면 일대 호박벌이잖아요. 근데 호박 축제 하나만 달랑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니, 거기에 이것도 끼워 넣자는 얘기지. 천북면 호박 찍고 천남면 정자로 가자는 거죠.”

가사를, 축제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앞뒤를 맞춰 가기가 어렵다. 박민구의 말이 더 그렇게 만들고 있다.

  “가사를 보면, 이 가사가 신기정이래요. 신기정이라는 정자에서 지은 거라고. 그래서 신기정을 이번 호박 축제에 짠 하고 등장시키자는 거지.”

  이제 대강 알 것도 같다.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호박 축제를 할 때 신기정이라는 정자를 끼우자는 것이다. 그런데 축제를 준비하면서 천남면과 천북면 근처를 몇 번 다녀봤지만, 정자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 군이 다 좋은데 호박도 많이 나고, 그런데 그 흔한 유명한 정자, 아니 문화유산 하나가 없어. 그게 아쉬웠는데, 이 정자가 나타난 거예요. 아니 우리 영감님이 찾아낸 거라.”

  아니다. 우리 군은 호박 말고는 따로 유명한 것이 없다. 그리고 박민구의 말을 그대로 따르면 정자가 나타난 게 아니라 가사가 나타난 것이다. 또 군수가 아니라 천남면의 노인네와 정 교수가 가사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감님이 서운천에 정자를, 아니 이 신기정을 딱 하나 세울 아이디어를 내신 거죠. 우리 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이번 축제에서 보여 주자는 거지.”

  처음에 문화유산 운운했던 것이 결국 가사에 나오는 정자를 세우자는 것이다. 그러면 시설건설과에 맡겨 정자를 세우면 된다. 박민구는 왜 이런 말을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일까.

  “근데 정자가 없어요. 아니 정자는 새로 만들면 되는데, 어디다 세워야 할지를 몰라.”

  박민구의 말에서 앞뒤가 없어진 지는 오래되었다. 곧 중언이 부언이 될 것 같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정자가 어디 있었는지를 김 형이 찾아야 하는 거예요. 이것들을 보고.”

  드디어 나를 부른 이유가 드러난다. 호박 축제를 하는데 너무 밋밋하니까, 몇 해 전에 새로 발견된 가사 신기정가에 등장하는 신기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정자의 위치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으니까 나더러 찾아보라는 것이다. 결국 그런 얘기다. 그런데 왜 하필 나인가?

  “아, 신기정 프로젝트는 호박 축제의 한 부분이에요. 영감님이 그렇게 말씀하였어요. 그러니까 지역축제팀에서 맡아야 하는 거지. 그래서 민 팀장이랑 상의했는데, 김 형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고 내가 추천했어요.”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이 결정되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하지만 분노는 이미 없다. 처음 축산지원과에 발령낼 때부터, 축산지원과에서 지역축제팀으로 파견 보냈던 것까지. 내 의사를 먼저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다. 돼지가 호박으로 바뀌었고, 다시 정자가 될 양이다.

  “근데 김 형이 기억할 게 몇 가지가 있어요. 정자는 호박벌 옆에 있어야 하고, 축제 전에 상량식도 해야 하니까 그 전에 위치를 정해야 해요.”

  그러니까 정자가 있던 곳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정자를 세울 만한 적당한 곳을 물색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의 앞뒤가 바뀌어 간다.

  “어제 인사드린 분들. 그분들이 정자 건립 비용을 댈 거예요. 내일 업무 협약식을 열고 서명을 하기로 했어요.”

  어제 군수실로 나를 부른 일이 명확하게 설명된다. 돈을 받아내려니, 증거가 필요하고, 그래서 그 증거를 만들기 위해 나를 담당자로 만들어 부른 것이다.

  “김 형이 하는 일이 우리 군을 문화 고장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는 거니까, 열심히, 열씸히 한번 해 보세요.”

  어느덧 박민구는 군수의 말을 하며 군수의 몸짓을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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