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11. 산중처사

New-Mountain(새뫼) 2022. 8. 2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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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산중처사

 

  본격적인 신기정 찾기가 시작되었다. 신기정에 대해 내가 지금 가진 정보는 컴퓨터 모니터 위에 떠 있는 서운군과 성수산 일대를 나타낸 지도와, 정일영 교수가 서운문화에 쓴 논문 한 편, 그리고 토박이 손상섭의 기억이 전부이다. 이것들을 조각조각 꿰맞추어 신기정을 찾아야 한다. 아니 신기정은 지금 존재하지 않기에, 신기정이 세워졌던 위치를 추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기정을 세워야 한다.

  신기정가를 다시 읽어본다. 지명과 관련된 부분부터 찾아가며 신기정가의 위치가 나타날 만한 구절을 찾아본다.

 

     일흠 됴코 景 됴흔 ᄃᆡ 一間茅屋 짓고 졔고

     佛陀山 靜散地의 白雲을 놉피 쓸어

 

     이름이 좋고 경치가 좋은 곳에 한 칸짜리 띳집을 지으련다.

     불타산 정산지에 있는 흰 구름을 높이 쓸고서.

 

  정산지라는 낱말부터 고민스럽다. ‘정(靜)’자의 한자 뜻대로 깨끗하고 맑은 곳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불타산에 있는 지명인가. 지도 어디에도 정산지란 지명이 보이지 않으니 그냥 깨끗한 곳이라고 읽어 두자. 그곳에서 흰 구름을 높이 쓸었다고 하니, 신기정은 꽤나 높은 곳에 지어졌던 모양이다. 그다음에,

 

     殊妙ᄒᆞᆫ 山頂의셔 眼前ᄅᆞᆯ 바라보니

     紫陌峰ᄋᆞᆫ 뎌긔 잇고 林秀峰ᄂᆞᆫ 알픠 뵌다

     뒤흐로 煙火峰서 淸風이 건ᄃᆞᆺ 불어

 

하였다. 아주 묘한 산정에서 눈앞을 바라보니 자맥봉은 저기 있고, 임수봉이 앞에 보인다는 것이며, 뒤에 연화봉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가능한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본다. 산정에서 조금 내려와서 아직 임수봉에 다다르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수산 산정에서 서남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온 곳이다. 바로 앞에는 임수봉이 있고, 계곡 건너에는 자맥봉이 있다. 성수산 너머에는 연화봉이 있다.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찾아볼 곳을 적는다. 임수봉을 지나 성수산의 정상을 향하는 능선 위를 먼저. 그다음으로,

 

      草屋下 말ᄀᆞᆫ 물이 구뷔구뷔 흘러시니

     긴 깁을 펼치ᄂᆞᆫ ᄃᆞᆺ 滄溪가 白波이라

 

 정자 아래로 맑은 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니, 긴 비단을 펼친 듯하여 푸른 계곡물이 흰 물결 같다고 하였다. 정자 근처로 맑은 물이 흐를 것이다. 흰 물결을 일으키며 흐른다니 수량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성수산 지도 위에서 물이 흐를 만한 계곡을 찾아본다. 하지만 지도상에서는 물줄기를 표시한 푸른 선이 보이지 않는다. 푸른 선은 산 아래로 한참 내려와서 호박벌의 아래쪽에서 시작한다. 실천이다. 신기정가에는 하천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천북면 내룡리이다.

  두 번째로 찾아볼 곳. 내룡리의 실천 근처. 그러다가 한 구절에서 눈이 멈춘다.

 

     낙대 메고 ᄂᆞ려가나 괴기 數를 어이 알리

 

  실천을 흘러 흘러 회룡강에 다다른다. 아니 회룡강이 실천에 다다른다.

 

     두 귀 ᄭᅳᆺ을 ᄯᆡᄅᆞᆯ 싯고 回龍江애 ᄯᅴ운 盞이

     山下의 夏川으로 밤ᄂᆞᆺ즈로 ᄂᆞ려가나

 

  여전히 실천 또는 하천과 회룡강의 관계가 난해하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강이 천으로 흘러간다니, 예전에는 천과 강의 의미가 지금과 달랐을까.

  어쨌든 산중처사는 회룡강으로 낚싯대를 메고 가나, 고기 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고기가 많다는 것인지, 고기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적어도 고기를 낚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폭과 깊이를 갖춘 물줄기가 신기정 옆에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찾아볼 곳. 낚시를 할 만큼 수량이 많은 개울을 끼고 있는 곳.

  그런데 낚시를 할 만한 곳이 지도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낚시를 하려면 적어도 서운천을 따라 진하군까지는 가야 할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신기정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신기정은 서운군에 있어야 한다. 다른 군에다가 정자를 세우고 서운군에서 축제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 임의로 결론을 내린다. 회룡강은 고기가 없는 강이다. 그리 넓지도 깊지도 않은 곳이어야 한다. 다시 물줄기를 거슬러 서운군으로 돌아와 다이어리에 적었던 세 번째 메모를 지운다.

  다시 신기정가를 읽어 내려간다. 하지만 지명과 관련된 구절은 더는 없다. 처음에는 신기정가의 긴 길이에 당혹했지만, 지금은 신기정의 위치를 분명하게 밝혀주지 않은 짧은 길이가 아쉬울 뿐이다. 21세기에 만든 컴퓨터 위의 지도에서,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신기정은 쉽게 탐색되지 않는다.

  머리가 무겁다. 그 머리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먼저 들어갈게요. 송미영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들었다. 그때가 언제였나. 시계는 저녁 여덟 시를 넘어서고 있다. 사무실이 어둑하다. 긴 기지개를 마치고 군청 건물 밖으로 나선다. 군청 창문에 몇 개의 불이 밝혀 있다. 그중의 하나가 문화관광과 사무실이다.

  군청 뜰을 서성이다가 정문 앞 편의점에서 맥주캔 두 개를 사 들고 온다. 아무도 없는 군청 뜰 등나무 아래에 앉아 맥주캔을 연다. 등나무 나뭇잎 사이로 들고 나는 달빛 아래에서 맥주를 마신다. 한가하고 시원하다. 산중처사도 이런 여유를 즐기기 위해 불타산으로 들어가 신기정을 지었을까.

  두 번째 맥주캔을 비울 무렵, 달빛과는 다른 날카로운 불빛이 두 눈을 찌른다. 거기 누구쇼? 플래시 불빛이 눈을 찌르며 한동안 내 얼굴에 멈추어 있다. 아 축산과 김 주사님. 알을 체를 한다. 플래시 불빛이 내 얼굴을 피했어도 당장은 잔영이 남아, 상대방의 얼굴을 잘 확인할 수 없다.

  이때 하늘의 달이 온전하게 등나무 지붕에서 나온다. 덕분에 상대방이 확인된다. 밥집에서 몇 번 보았던 당직전담 경비원이다. 문득 이 사람의 이름이 신기철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신기정을 피해 쉬려고 나왔지만, 여전히 신기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속으로 픽 웃고 만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네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려고요. 신기철의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내 옆에 있는 빈 맥주캔에 멈춘다. 신기철은 빈 맥주캔을 얼른 챙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직 군수님이 퇴근 안 하셨어요. 나를 걱정한다. 예, 곧 일어나겠습니다.

  얼른 일 마무리하시고 들어가세요. 그래도 집이 최곱니다. 신기철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오피스텔로 돌아가야 하는 내 처지를 알지 못한다. 자, 저는 가 보겠습니다. 마저 순찰을 돌아야지요. 신기철이 모자챙에 손을 대고는 빈 맥주캔을 챙겨 군청의 다른 쪽으로 물러간다.

  신기철은 나처럼 빈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저 달빛 아래에서 달빛보다 더 밝은 플래시를 들고 밤새 소요하겠지. 다시 나만 남는다. 등나무 그늘 벤치 위에 누워본다. 언제 내렸는지 차가운 이슬이 등에 스며든다. 달이 더 올라서 달빛이 머리를 그대로 비춘다.

  그대로 누워있다가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지금 여기가 비록 등나무이지만 나무가 있고, 고인 이슬이지만 물이 있고, 불이 켜진 군청 창문이 몇 있지만, 달빛도 있다. 산중처사가 느꼈던  ‘ᄆᆞᆯ근 마시 여기에 다 이셰라’ 를 알 것도 같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맑은 맛을 알게 된다. 나는 산중처사가 되었다.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는 것인가.

 

     古今의 塵世 一念 듯도 보도 못ᄒᆞ로다

     靑山裡 碧溪水에 넌즛넌즛 혼자 드러

 

  아니다. 내 처지에서 내 나이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찌질한 것이거나 과분한 것이다. 산중처사는 먼지 잔뜩 낀 속세에서 벗어나 성수산에 올랐지만, 나는 속세의 한복판에서 누워 있다. ‘明月을 燈 삼아셔’ 누워는 있지만, 아직 불 켜진 문화관광과에 두고 온 일을 온전하게 잊을 수는 없다. 아직 끝내지 못한 신기정가가 나를 호출한다. 신기정가를 얼마를 더 읽어야 신기정을 찾을 수 있을까.

  산중처사가 속세를 벗어나서 지었던 별세계 신기정이 내게는 먼지가 잔뜩 낀 속세가 된 셈이다. 산중처사는 자신의 글이 나중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겨 줄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만일 내가 힘겹게 신기정을 다시 세운다면, 거기에 후세 사람들이 올라 여유작작하며 주변 경치를 즐길 것인가. 그 사람들을 위해 ‘신기정을 세우기까지’, 이런 글을 초석에다 새겨 정자 앞에 세워 둘까. 그러면 그 글이 그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숙제가 될까.

  이때 군청에서 가장 큰 관용차가 내 앞을 지나간다. 경비실 앞에서 누군가가 거수경례를 하며 차를 떠나보낸다. 신기철이다. 군수가 떠나갔으니, 신기철은 앞으로 남은 밤을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이제 경비실은 별세계이다. 먼지를 피해온 곳이 아니라, 먼지가 떠나간 곳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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