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 228

저녁에

저녁에 구순에 가까운 장인이 말하기를,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바닥에 있었는지 따가워 깨어났구나, 꿈인듯 생생하더라. 육순에 가까워진 아내가 답하기를, 푹신한 구름 위에 지금 누워 계신다오. 그러니 평안히 깨었다 다시 꿈을 꾸었지요. 이파리는 넓게 펴져 구름을 이고 있고 구름은 흘러가며 이파리를 안고 있고 맞잡은 부녀의 손에는 시간이 멈춰 있고. (2023. 04. 14)

이제 나는

이제 나는 아내가 더 이상 시를 쓰지 말라 한다. 그 나이에 나올 수 있는 말이란 궁상맞거나 구질구질하거나 그거나 저거나 살고 살다가 남은 찌끄러기뿐. 거기에 특별한 게 남았겠느냐고. 그걸 굳이 글로 남겨 뭣하겠느냐고. 그런 말이 서운한데, 서운하기는 한데 그닥 틀린 말이 아니기에 쉽게 수긍한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쓰기 싫었는데 억지로 써야 한다거나 쓸 게 없었는데 짜내어 써야 한다거나 하였는데, 외려 고마운 말이 아니겠나. 그래 말자, 그래 말자, 그래 말자.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먼 추억들이나 남기고 싶은 감상의 파편들이나 그런 것들을 단어로 치환하고 글로 엮어 또다시 삶의 자취로 남겨둔들 거치적거리고 불편할 뿐이겠다. 그런데 오십하고도 육십에 가까운데 그저 덮어버리기에는 뭔가 아쉬..

20. J대 교수 정일영

20. J대 교수 정일영 “저녁 시간에 보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오늘 저녁에 서울 집에 올라가야 해서요.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겠더라고요.” 서울에 처자식을 두고 내려왔을까, 아니면 혼자 남고 처자식을 올려보냈을까. 그게 그거인가. 주말 부부인지 기러기 아빠인지 알 수 없는 정 교수의 얼굴은 많이 늙었다. 학문 연구의 힘겨움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외로움 때문일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해 본다. 어쩌면 정 교수도 자신보다 더 지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외로움을 내 얼굴에서 발견하고 있을지 모른다. 문득 J시로 들어오며 차창 밖으로 바라보았던 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비록 지방 도시라 하여도 서운군과는 풍경이 달랐다. 아파트들도 제법 높고, 번화한 상가도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섰다. 서운군의 하루 차량 통행량을 ..

19. 축제팀 천승남

19. 축제팀 천승남 지금쯤 신기정들은 지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완결된 몸이 아니라 머리와 몸과 다리가 각각 나뉜 채로 남태전통건축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로 합체될 날을 기다리며 공장의 패널 벽을 자궁으로 삼아 세상에 던져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가 형이 될지 아우가 될지도 모르는 세쌍둥이들의 출산예정일은 이제 4주 남았다. 현경숙의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에 울린다. 정자들은 현경숙의 막내보다 사흘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다. 온종일 오다 말다를 계속할 거라고 했다. 축제 현장에 나갔던 팀원들이 모두 사무실로 철수해 있다. 다들 자기 책상 위에서 머리를 들지 않는다. 호박 축제는 호박벌에 있고, 신기정은 남태군에 있는데, 그것들의 존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