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8. 축제팀 손상섭

New-Mountain(새뫼) 2022. 8. 1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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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축제팀 손상섭

 

  “이게 그거예요?”

  우락부락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안이 나를 덮칠 듯이 다가온다. 보디빌더 손상섭. 손상섭이 모르는 군청 사람은 많아도, 손상섭을 모르는 군청 사람은 적었다. 사람에 관심이 없는 나도 손상섭을 알고 있었다. J도 보디빌딩 대회 2년 연속 금메달. 작년 전국 보디빌딩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걸었다. 메달을 걸고 온 날 읍내가 떠들썩했고, 군청에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전임 군수와 손상섭이 나란히 찍은 사진은 서운신문의 1면에도 실렸다.

  “이것도 한국 글자에요? 하나도 못 읽겠네.”

  원문을 복사한 신기정가를 못 읽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보통 두 음보가 한 구가 되고, 두 구와 네 음보가 한 행이 되는 것이 가사의 기본 형식이라고 배운 기억이 어렴풋한데, 이 글은 이어짐과 끊임의 구분을 알 수 없다. 그러니 이런 글이 가사가 되어 노래로 불리었다는 것을 동의하기가 어렵다.

  또 두 글자 건너 등장하는 한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똑바로 크게 써도 읽기 힘든 게 한자인데, 초서인지 행서인지 마구 흘겨 쓴 덕분에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하나도 없다. 한자가 아닌 것은 한글일 터이지만, 이 역시 한자 읽기와 다르지 않다. 한국 사람이 한국 글자를 읽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사람도 대단하지만,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더 대단할 거라고 생각해 본다.

  “뭐라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예쁘게 썼네요.”

  이 글씨가 예쁘다고? 손상섭을 돌아본다. 의미를 찾지 않고, 글자의 모양만 본다. 정말 글자들은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지다 이어지고 있다. 글자와 글자가 이어져 한 글자인지 두 글자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두 글자가 네 글자가 되고 여덟 글자가 되었다가 다시 하나의 큰 글자가 된다. 흰 종이와 검은 글씨가 어울려 흘러가는 것이 날갯짓하는 학을 닮았다. 춤을 추듯 흘러가다가 잠시 호흡을 고르는 듯 멈춰 있다가 다시 흘러간다.

  “마이너스 60보다는 우람하고, 마이너스 70보다는 날씬하고.”

  무슨 뜻?

  “아, 보디빌딩 체급을 말하는 거예요. 글자들의 볼륨이 꼭 그러네요. 그리고 규정 포즈와 자유 포즈가 섞인 폼 같아요. 허, 잘 썼다.”

  그것은 또 무슨 뜻?

  “보디빌딩 시합에서는 규정 포즈를 먼저 하고 다음에 자유 포즈를 해요. 얘들은 그 둘이 섞인 것 같아요. 아니 규정 포즈대로 쓸려고 했는데, 저절로 자유 포즈로 흘러가 버린 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손상섭에게 듣는다. 대단한 관찰이고 관찰보다 더 대단한 표현이다. 손상섭은 평면의 글씨에서 보디빌더의 입체적인 근육을 상상하고 있다. 아니 손상섭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쓴 신기정가의 산중처사가 더 대단할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얘기 했네요.”

  규정과 자유라. 전국대회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고, 군청에서 성대한 축하를 받았지만, 바로 그다음 주에 손상섭은 도청 감사반에 적발이 되었다. 업무 시간에 헬스센터에서 몸을 만들고 싶어 했던 자유를 공무원의 규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원인이 되었던지, 업무도 낯선 문화관광과로 떠밀려 왔다.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상섭의 얼굴 표정은 문화관광과에 잘 어울렸다. 늘 명랑하고 온화했다. 비록 문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덩치이지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관광과는 잘 어울리는 편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문화와 어울리는 말까지 한다. 비록 금방 바뀌어 버렸지만.

  “아이고 시골 노인네들이 왜 그리 약아 빠졌는지. 어차피 자기네 땅도 아니면서, 뭘 더 내놓으라고.”

  손상섭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지금까지 하던 말과는 내용과 형식이 모두 바뀐다. 다들 무슨 소리냐고 손상섭을 바라본다.

  “축제를 하면 마을에 쓰레기가 많이 생기니까, 치울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네요. 그리고 군청에서 주차비를 받을 거니까, 그중에 얼마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요즘은 촌사람들이 더 하다니까. 팀장님, 우리 주차비 안 받죠? 내 월급이라도 털어 줘야 하나.”

  손상섭은 털썩 자기 자리로 가 주저앉는다. 오전에 호박 축제가 열리는 미호리와 운박리 일대의 호박벌에 다녀왔었다. 호박벌을 메우고 깎아내고 경계를 세우는 일이 손상섭의 주된 업무이다. 그래서 손상섭은 사무실보다는 현장에 더 많이 나가 있다. 덕분에 손상섭의 몸은 더욱더 든든해져 갔다. 이런 몸을 보며 현장에 가기 전에 헬스센터에 들르고, 현장에서 일을 마치면 다시 헬스센터에 갈 거라고, 밥집 사랑채에 모인 사람들이 낄낄거리곤 했다.

  “그나저나 현장 바로 옆에 돼지 키우는 가구가 꽤 있던데. 바람 불면 호박벌로 냄새가 몰려갈 거 같아요. 보통 심하지 않을 텐데. 그런 것도 체크하지 않고 호박벌에다가 축제 터를 만들었나. 참, 형님 축산과에 있었죠? 돼지 옮기는 건 형님이 하면 되겠네요.”

  글쎄, 구제역이 한창일 때도, 돼지 두 마리조차 죽이지 못했는데, 멀쩡한 돼지들을 나더러 어쩌라고.

  아 참, 손상섭이 여기 서운군 토박이였지. 손상섭에게 와 보라고 손짓한다. 이번에는 원문이 아니라 정일영 교수가 서운문화에 쓴, ‘새로 발견된 신기정가에 대하여’를 펴 놓는다. 지명인 듯한 낱말은 형광펜으로 칠해 두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활자로 찍힌 글자는 그래도 읽기 편하다. 손상섭이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낱말 하나를 읽어낸다.

  “연화봉(煙火峰)? 산에다 ‘불 화(火)’자를 쓰나? 산림과에서 난리가 나겠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훑어간다.

  “림수봉(林秀峰)? 아, 임수봉이겠네. 그럼 이것은 자맥봉(紫陌峰)일 거고.”

  한 곳을 가리킨다. 자맥봉이라고? 지금까지 나는 자백봉으로 읽었었다.

  “다 성수산(星樹山) 자락에 있는 봉우리들인데. 아, 아까 그거, 연화봉. 그게 봉수봉(烽燧峰)을 말하는 건가? 봉화대가 있는.”

  모두 성수산 자락의 봉우리들이란다. 10년 넘게 서운군의 공무원으로 서운군에 살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지명들이다.

  “보통은 퉁쳐서 한꺼번에 성수산이라고 불러요.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지역개발과나 산림과 사람들이나 나누어 부를 뿐이죠.”

  손상섭이 신기정가를 다시 훑어본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근데, 정작 성수산이 안 보이네. 이건가? 이거 무슨 글자인가? 불, 불, 다음에 있는 글자 뭐라고 읽어요?”

  손상섭의 굵은 손가락이 한곳에 머문다. 그곳에 불타산(佛陀山)이라 적혀 있다.

  “불타산? 아, 맞다. 성수산의 옛날 이름이 불타산이었지. 불교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유림들이 성수산으로 바꿨어요. 지금도 부처산이라고 하는 노인네들이 있어요.”

  그러면서 컴퓨터에 서운군의 지도를 띄운다. 성수산은 서운군 북쪽의 남태군과 경계가 되고, 봉수봉은 남태군에 속해 있다. 반면 임수봉과 자맥봉은 서운군 안에 있다. 그러면 이 신기정가가 서운군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맞나 보다.

  다음으로는 회룡강(回龍江)을 찾을 차례다. 회룡강이라고 들어봤어?

  “회룡강? 이 동네에 강이라고 부를 만한 물줄기가 있나? 형님도 알잖아요. 우리 군에는 지방하천이 없는 거.”

  강이 없단다. 이 하천(夏川)은? 그런데 하천의 하자가 ‘물 하(河)’자가 아니라 ‘여름 하(夏)’자이다. 잘못 쓴 건가?

  “그 이름이 맞을걸요. 노인들은 아직도 여름내라고 그래요. 여름에만 물이 흐른다고 해서. 그나마도 가뭄이 들면 말라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지렁이 개울이라고도 했는데.”

  지렁이 개울이라는 하천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흘러가는가?

  “우리가 축제를 하려는 데, 호박벌 동쪽에 있는 개울이 바로 지렁이 개울이에요.”

  그 개울 이름은 실천(實川)이었잖아?

  “일제 때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어요. 일본 애들이 여름을 열매와 헷갈린 거죠. 국문과 나온 형님이 더 잘 알겠네요.”

  생각이 난다. 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아니고, 대학교 입시 준비를 하며 외웠던 것이다.

  “여름이 녀름이고, 열매가 여름이었죠? 반대였나?”

  뭔가가 밝혀지는 것 같다. 신기정은 바로 실천 옆에 있었고, 신기정가는 성수산을 바라보고 지은 노래이다. 신기정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정자는 없겠지만, 정자가 서 있던 위치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회룡강이 하천으로 흘러내려 어쩌고 하지 않는가. 대개 강이 천보다는 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큰 회룡강이 지렁이 같은 작은 개울로 흘러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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