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 228

18. 남태전통건축 대표 원만호

18. 남태전통건축 대표 원만호 신기정가에 나오는 신기정이 있었던 위치는 결국 특정되지 않았다. 신기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신기정가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신기정은 세워져야 했다. 덧붙여 신기정가의 가사비까지. 신기정가라는 가사에서 출발하여, 신기정이라는 정자를 거쳐, 신기정가를 새겨 넣어야 하는 가사비에까지 이르렀다. 오롯이 내 몫으로 남은 일들이다. 몇 번의 회의 끝에 결국 신기정은 축제가 열리는 호박벌에 세우기로 하였다.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자까지 볼 수 있게 하자던 군수의 애초 희망이 실현된 결과이다. 정자가 세워질 위치를 정하고, 터를 닦는 일은 손상섭이 맡기로 했다. 딱히 할 일 없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공익 요원에게 정자를 세울 만한 업체 검색을 맡긴 것이 그제였고, 몇 ..

17. 문화관광과장 한혁수

17. 문화관광과장 한혁수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작년 같았으면 연휴도 즐겁고, 효도휴가비도 즐거운 추석이었을 터인데, 이거 호박 축제 때문에 올해는 추석이 추석이 아닙니다.” 문화관광과 한혁수 과장의 인사말을 들으며 군청 대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본다. 군청의 과장급 이상은 모두 모인 것 같다. 축제가 열리는 천북면, 천남면의 면장을 비롯한 면 직원들이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장인 듯한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백여 석의 좌석은 이미 다 채워졌고, 뒤쪽으로 간이 의자까지 채웠다. 대회의실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인 경우는 새 군수의 취임식 이후 처음이다. 마이크를 잡은 한 과장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이 익숙하지 않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인정하..

16. 교사 심우식

16. 교사 심우식 “예, 제 장인어른입니다.” J시의 신개발지구 안에 들어앉은 한 초등학교 옆 카페에서 심 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정 교수에게 신기정가를 들고 왔던, 가사 원소유자의 사위이다. 심 교사를 만나기까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제 서운문화에 실린 정일영 교수의 논문인 ‘새로 발견된 신기정가에 대하여’를 다시 차근차근 읽었었다. 그때 새로운 지명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논문 첫 페이지 아래의 각주에 신기정가의 소장자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2)서운군 천남면 다락리 고수용(78)씨 소장’. 천남면 다락리라. 내게 가사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사를 썼던 정자, 또는 정자가 세워졌던 장소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간 정 교수의 논문을 꼼꼼하게 읽지 않았던 이유였다. 논..

15. 문화원장 최현

15. 문화원장 최현 딸깍. 박민구가 군수실로 잠시 올라오라는 메시지를 담은 창을 보냈다. 나만? 짧게 답신했더니, 팀장은 와 있어요, 한다. 보니 옆의 팀장 자리가 비어 있다. 군수인지 박민구인지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101호로 불러올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때로는 중간에 있는 과장을 생략하고 팀장이나 팀원들을 직원 불러올려 업무를 챙김으로써, 조직에 익숙한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메시지로 부른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송미영의 펌킨 클라우드 페스티벌 사건도 그랬다. 나도 뭔가 군수에게 한 마디 던질 말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선다. 하지만 던질 말이 있어도 못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을 때가 더 많았다. 노크 없이 101호 기획실에 들어선다..

연안부두에서

연안부두에서 멀리서 뱃고동소리는 울리고 있겠지만 물결 부딪는 소리만 요란한 이 순간은 애써 귀를 막아야 했다. 녹이 슨 철제난간에 비스듬히 온 마음을 의지하면 구름에 가려진 일몰이 안타깝다. 집요하게 옷섭을 파고들던 바닷바람도 지금은 가난한 창부처럼 조용히 잠이 들어 검은 물살 위에 하나 둘 잠긴 작은 섬그늘이 한 걸음 내달아오고 하나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험한 물건너 배를 타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무리 그 속에서 우연히 어머니 오늘 물 건너 올 사람은 없다고 한다. 세상이 끝나는 곳으로 지리한 발돋움을 하고 모두들 일몰을 보려고만 한다.

감자밭에서

감자밭에서 버려진 감자밭은 언제나 쓸쓸하다. 흙이 씻기어나간 알감자 위로 퍼렇게 묻은 이 땅의 근심. 대지는 거짓을 모른다던데 잡풀만이 우거진 밭 가운데 홀로 서면 처음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몇 평의 작은 땅은 말없이 보낸다. 마구 자란 골마다 이랑마다 어느새 나를 속이며도 떳떳해하는 거짓의 육신을 파묻어 한 올 한 올 흩어지는 머리칼에 그릇된 시각을 잠재우고 있다. 그러면 아련하게 인광의 환각 편히 가지 못한 누구의 주검이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애타게 떠돌고 있는 모양이다. 잡풀만이 무성한 감자밭에서 알지 못하는 인연의 뿌리 그렇게 한 세월이 얽혀져 있다. (1987)

14. 축제팀 손상섭

14. 축제팀 손상섭 “형님 덕분에 오랜만에 산을 다 타네요.” 점심 먹고 나섰다. 성수산을 오를 셈이다. 실천을 가운데로 서쪽의 미호리와 운박리, 동쪽의 내룡리를 모두 살펴보았지만, 신기정의 흔적은 없었다. 신기정, 아니 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도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수산에 올라 보기로 했다. 사실 다이어리에 적어둔 첫 번째 순서이기도 했다. 성수산 어디쯤에 신기정이 남긴 자취가 있을지도 모른다. 토박이 손상섭에게 성수산에 함께 오르자고 청했더니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물이 많은 산이 아니라고, 정자를 세울 만한 땅이 있는 산도 아니라고, 높이가 937미터인데 제대로 오르자면 왕복 여섯 시간은 걸릴 거라고. 손상섭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고 하여 몇 번 졸..

13. 축제팀 송미영

13. 축제팀 송미영 “팀장님은 자꾸 콘텐츠를 말하는데, 호박 축제에서 콘텐츠라고 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요?” 송미영의 카랑한 목소리가 축제팀 사무실을 울린다. 말이 많다고 하여 투머치토커라는 애칭이 따라다니지만, 틀린 말을 하는 적은 없다. 유명한 군청 뜰 등나무 그늘 사건만 해도 그렇다. 새 군수가 당선되고 전임 군수가 추진해 오던 사업이 무더기로 취소되거나 보류되자, 송미영은 예의 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군수가 바뀔 때마다 사업을 바꾸면, 어떤 공무원이 감당하냐고, 날아가는 예산이 자기가 섬기겠다던 군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이 아니냐고. 마침 군수가 등나무 그늘로 들어온 것을 보고 주변에 있던 이들이 급하게 송미영을 제지하였지만, 민주적인 행정이 군수의 공약이었다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

12. 내룡리 이장

12. 내룡리 이장 신기정 찾기에서 가장 큰 숙제는 여전히 회룡강이다. 신기정은 회룡강을 끼고 지어졌다. 회룡강을 찾으면 신기정의 위치를 알 수 있겠지만, 신기정가에 있는 회룡강은 지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회룡강은 흔적도 없이 흘러가 버렸다. 사라진 회룡강을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린 곳이 내룡리이다. 하북면에 내룡리가 있다. 군지를 뒤져보니 성수산 앞뒤로 하여 ‘용(龍)’자 또는 ‘룡(龍)’자가 들어간 지명은 내룡리가 유일했다. 회룡강과 내룡리,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아이고, 김 주사님, 오랜만이네요.” 오전에 하북면 면사무소에 연락하여 내룡리 이장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젊은 이장이 웃으며 손을 내민다. 젊다고 해 봐야 40보다는 50에 가까운 중년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

11. 산중처사

11. 산중처사 본격적인 신기정 찾기가 시작되었다. 신기정에 대해 내가 지금 가진 정보는 컴퓨터 모니터 위에 떠 있는 서운군과 성수산 일대를 나타낸 지도와, 정일영 교수가 서운문화에 쓴 논문 한 편, 그리고 토박이 손상섭의 기억이 전부이다. 이것들을 조각조각 꿰맞추어 신기정을 찾아야 한다. 아니 신기정은 지금 존재하지 않기에, 신기정이 세워졌던 위치를 추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기정을 세워야 한다. 신기정가를 다시 읽어본다. 지명과 관련된 부분부터 찾아가며 신기정가의 위치가 나타날 만한 구절을 찾아본다. 일흠 됴코 景 됴흔 ᄃᆡ 一間茅屋 짓고 졔고 佛陀山 靜散地의 白雲을 놉피 쓸어 이름이 좋고 경치가 좋은 곳에 한 칸짜리 띳집을 지으련다. 불타산 정산지에 있는 흰 구름을 높이 쓸고서. 정산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