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 228

28. 학회장 차기석

28. 학회장 차기석 책상 위에 올려둔 탁상 달력의 12일에 붉은 큰 동그라미가 둘러 있다. 이제 이틀 앞이다. 드디어 컴퓨터 속에 들어 있던 가사가 출력되어 책상 위에 올라왔다. 세상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현대어 가사이다. 그 옆에 ‘신기성가 산중처자’라는 이름의 시조도 출력하여 가사 옆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아니 다 끝나지 않았다. 남은 일이 있다. 이틀 후 남태전통건축에 갈 때, 이 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삿짐을 다 싸서 트럭에 실어 놓았는데, 갑자기 한 무더기 짐이 갑자기 더 나온 모양새다. 가능한 선택지를 생각해 본다. 시조를 아예 버리는 것. 또는 원래 순서대로 가사는 가사대로 시조는 시조대로 나란히 싣는 것.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시조를 어느 정도 문맥에 맞게끔 가사..

27. 축제팀 천승남

27. 축제팀 천승남 신기정은 없었는데, 신기정을 세워야 한다. 신기정가가 가사비인지 시조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에 신기정가를 띄워 놓았지만, 딱히 한 것이 없다. 볼펜 끝만 물고 화면을 응시하면 날짜와 시간이 찍히는 화면보호기가 켜진다. 마우스를 흔들어 다시 신기정가를 띄우면 잠시 후에 화면보호기가 켜진다. 지금 나는 신기정가를 내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정가의 작자, 산중처사로 빙의되어 가고 있다. 다시 신기정가 안으로 들어간다. 산중처사, 아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가사의 작가는 신기정가를 지으며, 아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사를 지으며, 성수산 아니 불타산에서 행복했을까. 杜鵑이ᄂᆞᆫ 우러녜니 巖花ᄂᆞᆫ 반만 픠..

26. 축제팀 현경숙

26. 축제팀 현경숙 “이것들이 지금까지 정리된 프로그램이에요.” 호흡이 버겁다. 십 분도 안되는 짧은 브리핑을 의자에 앉은 채로 하였음에도 현경숙은 힘들어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지역축제팀을 포함한 문화관광과 전 직원 모두가 모인 소회의실. 회의실 벽에 붙여둔 D-20이라는 A4 종이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인다. 테이블 위의 펼쳐진 계획서들보다 펄럭이는 종이가 더 눈에 들어온다. 곧 떨어질 것 같아 위태하다. “호박을 재료로 하는 요리 체험 부스는 전부 일곱 개이네요. 더 늘리거나 빼거나 할 거 없죠. 그러면 이대로 확정하여 팸플릿 인쇄 넣을게요.” 처음 팀원들이 상견례를 할 때, 현경숙은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곧 출산해야 하는데, 이리 보냈다고 투덜거렸다. 축제일이 확정되자 축..

25. 산중처자

25. 산중처자 글자들이 모여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 행이 되며, 행이 모여 글이 되어간다. 신기정가는 내 컴퓨터 속에서 점점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다. 이에 맞추어 호박벌도 터를 잡고, 터 위에 부스가 서고, 부스 안에 기물이 설치되고 있다. 팀장과 천승남, 손상섭은 사무실보다는 현장에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송미영은 매일 전화를 붙들고 있다. 부탁하고, 다투고, 읍소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해당 사무실로 서류를 들고 뛰어간다. 원래 저 일이 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부탁하고 다투고 읍소하는 대상은 신기정가이다. 살살 달래 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풀어나간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신기정가는 제 꼴을 갖추어 간다. 그래도 남은 문제는 있다. 가사연구원에서 보낸 파일 중 마지막..

24. 오정민

24. 오정민 “요즘 많이 바쁘다면서?” 퇴근길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누르면 적막함이 어둠에 잠겨 나를 거역할 뿐이다. 근처 식당에서 요기라도 하고 들어올까 하다가, 김밥집을 들러 오피스텔로 그냥 왔다. 식당에서 혼자 먹는 밥에 대한 서먹함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다만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이 불편하고 성가실 뿐이다. 보통 식당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그 시간. 일없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기도 민망하다. 그래서 달랑달랑 김밥 한 줄을 검은 봉지에 담아 왔다. 혼자 생활하는 오랜 습관이다. 식탁은 이미 책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온기 없는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오피스텔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구로 결혼할 때 산 더블 침대이다. 혼자인 지금, 나..

23. 김영태

23. 김영태 일요일 아침, 신기정가의 번역을 위해 도서관을 작정한다.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탁자 위에 책들과 논문을 인쇄한 흰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다. 책들은 축제 예산으로 주문한 것들이다. 송미영이 축제에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면서,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문하라 했다. 책도 되느냐고 했더니, 안될 것이 없단다. 협의회 명목으로 회식비로 잡아 둔 예산이 있단다. 어차피 지역축제팀은 회식이 없는 팀이다. 일이 끝나자마자 사무실을 떠나기 바빴다. 그걸 돌려쓰죠 뭐. 다 세금인데, 뱃속보다는 머리를 채우는 게 더 아름답겠죠. 송미영이 협의회비의 항과 목을 자료수집비로 바꾸어 주었다. 그렇다고 서점에 들른 것도 아니다. 서운읍에는 큰 서점이 없고 J시의 서점까지 찾아가기에는 번거롭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

22. 가사연구원 연구사 주신호

22. 가사연구원 연구사 주신호 “김영태 선생님이십니까? 가사연구원의 주신호라고 합니다.” 짐작보다는 젊은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나온다. 고수용 씨의 사위인 심우식 교사가 가사를 보냈다는 한국가사연구원에서 온 전화이다.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이메일을 보낸 것이 일주일 전이고, 전화로 연락한 것이 사흘 전이다. 담당자를 알아보겠다고 하여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오늘 연락이 온 것이다. “보내신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신기정가를 문의하셨죠? 찾아보니 미해제 작품이더군요.” 잠시 해제라는 낱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인가? “아, 그 의미는 아니고요. 신기정가를 아직 현대어로 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해제(解題). 해석, 각주 달기. 다른 ..

21. 전임 군수 이석우

21. 전임 군수 이석우 다행히 정 교수로부터 신기정가 전체를 입력한 컴퓨터 파일을 얻을 수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한쪽에 신기정가의 원문이 입력된 파일을 띄어 놓고, 다른 쪽에서 현대어로 바꾸기 시작한다. 愚昧ᄒᆞᆫ 이 人生이 졔 身命 져 몰나셔 妄靈된 어린 마ᄋᆞᆷ 富貴을 求ᄒᆞ려니 어와 虛事로다 世上事 虛事로다 첫 부분부터 따라가며 읽는다. ‘우매한 이 인생이 제 신명’, ‘신명’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대강 목숨이라는 뜻이다. ‘우매’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는 것이니, 첫 줄은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인생이 제가 언제 죽을 줄 몰라서’ 이런 뜻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옮겨 놓으니 원문보다 훨씬 길어진다. 또 노래가 아니라 그냥 줄글이다. 그래서 가사처럼 네 덩이로 다시 써 본다. 어리석고 사리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