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10. 딸 김민서

New-Mountain(새뫼) 2022. 8. 2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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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딸 김민서

 

  “학교 갔다 오고, 학원도 갔다 오고, 지금은 혼자.”

  당연히 혼자일 시간이다. 반가움이 앞서지만, 애틋함 사이에 배어 있는 미안함을 이겨내지 못한다. 항상, 그렇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딸 민서와의 유대. 민서가 두 살 때 아내와 별거를 시작했고, 다섯 살 때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그래도 열한 살이 된 딸과의 유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통화와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식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잠깐 오셨어.”

  민서에게는 할머니가 두 명 있다. 나의 어머니와 정민의 어머니. 민서가 지금 말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외할머니이다. 나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혼으로 며느리가 떠나가는 것까지는 받아들였지만, 손녀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틈만 나면 내 손녀를 찾으러 가겠다고 나섰지만, 딸들의 면박 속에 주저앉곤 했다. 찾으러 가겠다가, 보러 가겠다로 바뀌었다가, 죽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자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리다가 손녀 대신에 치매를 보게 되면서 손녀에 대한 말을 닫았다.

  “저녁? 엄마 가게 근처에서 엄마랑 깁밥 같이 먹었어. 아빠는?”

  내 끼니를 걱정하는 민서의 말에 울컥한다. 민서와의 옛 기억들이 떠오른다. 두 살 때면 겨우 말문이 트일 때인데, 그때부터  민서는 아빠와 같은 천장 아래에서 살지 않았다. 내게 배운 말도 없고, 받은 사랑도 별로 없다. 엄마와 아빠가 왜 따로 살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이. 하지만 민서는 한 달에 한두 번뿐인 만남인데도 나를 아빠로 받아들였다.

  참 모를 애야. 아빠를 보러 간다고 예쁘게 머리를 묶어 달라는 민서를 장모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두 밤 더 자면 아빠를 본다고 손가락을 꼽는 민서를 보며, 장모는 그래도 제 핏줄이라고 하며 끌끌거렸다고 했다. 내가 선물한 인형을 끌어안고 잠든 민서를 보며, 장모는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런 행위들을 설명하기에는 민서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민서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전하는 내 옆자리에 꼬박꼬박 앉던 아이가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쯤이었다. 아빠가 밉지,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질문이 내포한 의미를 민서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사는 애들도 나랑 똑같아. 그러면서도 민서의 눈은 휴대전화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마다 나와 민서가 나누는 대화의 양과 질은 줄어들었다. 타성에 젖은 연인들처럼 우리 만남은 매너리즘에 빠져들어 갔다. 주말에 점심 혹은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쇼핑몰에 들러 장난감이나 옷을 사 주고, 늦은 밤에 정민의 집 앞에 내려 주었다. 다만 고마운 것은 그런데도 이런 만남을 민서가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민서의 아버지이다.

  “엄마는 아직 가게에 있어.”

  시계를 올려다본다. 여덟 시가 넘어 있다. 정민은 여전히 악착같이 살고 있다. 늦은 시간인데도 화원에 들를지도 모르는 마지막 손님을 위해, 아니면 오늘이 지나면 시들어 버려져야 하는 꽃을 처리하기 위해, 꽃 같은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꽃을 팔고 있다. 그렇게 꽃을 팔기 위해 나를 떠났던 것일까.

  작년이었나. 민서에게 돌려서 힘들게 물었었다. 엄마는 꽃만 파냐, 하고. 잠시 생각하던 민서는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곧 알아들었다. 엄마한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말을 더 이어가지 않자, 민서는 내 침묵의 의미도 곧 이해했다. 내가 싫다고 했어.

  내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 궁금하기도 했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물어볼 사람이 있다 해도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참, 토요일에 학원 보강이 있는데…….”

  이번 주말에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보름에 한 번 만났으나, 어느 순간엔가 한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고, 그나마도 건너뛸 때도 종종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만나기로 했었다. 어느 학원, 하고 묻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맞아, 학원 아냐. 친구들과 놀러 가려고. 엄마한테는 아빠 만나러 간다고 할게. 혹시 엄마가 물어보면……. 아니다. 안 물어볼 거야.”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들의 말이 이런가, 아니면 민서의 말만 이런가. 좀 더 평범한 아빠였다면 민서가 하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열한 살짜리의 삶과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니겠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여전히 딸애의 주변에서 겉돌고 있었을 것이다. 민서가 예전에 했던 말, 아빠랑 같이 사는 애들도 나랑 똑같아.

  그래도 딸애랑 문자를 하네. 민서에게 문자 보내는 것을 넘겨 보던 축산과의 옛 동료가 한 말이 생각난다. 함께 살아도 일주일 내내 말 한마디, 문자 한 통 나눠 본 적이 없어. 등본에서나 부녀지간이지. 동료는 나를 신기해했다. 민서의 말, 동료의 말이 겨우 위안으로 삼을 뿐이다.

  “엄마가 아빠한테 문자 안 하지?”

  헤어진 엄마 아빠가 서로 연락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인가. 여전히 민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있다. 민서의 엄마 오정민과 민서의 아빠 김영태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부부였다는 것을.

  정민과 함께했던 시간을 반추해 본다. 조그만 회사에서 만나 결혼하고, 민서를 임신하고 정민은 사표를 냈고, 나는 회사에 남았다. 상사들의 말을 곧이 따르면 융통성이 없다고, 말을 따르지 않으면 왜 앞서가냐고 윽박지르는 회사의 문화가 힘들었다. 민서가 막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공무원 시험을 다시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정민은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시험을 준비하는 두 해 동안, 정민은 몸이 불편한 장모를 대신하여 꽃집의 한쪽에 민서를 앉혀 놓고 꽃을 팔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저녁 집에서도 크게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첫해 시험에서 실패하고 두 번째 해에 합격하고 임용장을 받았을 때, 정민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분노를 보여 주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서울도 아니고, 세종시도 아니며, 도청이 있는 도시도 아니라 한적한 시골의 군이었다. 첫해의 실패를 겪고, 합격하기 수월한 지역을 골라 응시하여 받았던 임용장이었다. 대학 입시에서 커트라인에 맞추어 국문과에 원서를 넣던 때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응시 지역을 바꾸었는데, 그걸 정민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나는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민은 내게서 듣지 못했다고 했다. 도대체 나는 자기한테 뭐야? 우는 민서를 두고 정민은 그날 밤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정민을 설득하여 서울 근교에 있던 처가 근처의 전세 아파트를 처분하고, 그 돈으로 서운읍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 넓은 집에서 세 식구가 살면, 그저 살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달간을 그럭저럭 지내다가 퇴근을 하여 보니, 정민은 없었다. 민서도 없었고, 정민의 옷가지와 민서의 장난감도 치워졌다. 다만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찍혀 있었다. 여기서 말라가는 것 같아. 정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왜 그런데, 내가 부정한 일이라도 했나, 매일 퇴근을 늦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 시집살이하는 것도 아니고, 내 월급이면 여기서 넉넉하게 살 수 있어.

  내 말이 끝나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은 알았는데, 확인시켜 줘서 고마워.

  그런 별거가 세 해를 이어졌다. 정민의 어머니나 나의 어머니가 우리를 다시 합치게 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결백한 나를 윽박지르는 정민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나를 정민은 용서하지 않았다.

  가끔 전화를 시도하였지만, 멀어진 거리를 좁히기는 어려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전화 통화의 말미에 정민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힘들겠지?

  그 후 반년인가 지나서 한 아이의 부모라는 최소공배수만 남기고 우리는 정식으로 남남이 되기로 하였다. 한 번 매달려봐, 사정해 봐, 그냥 이렇게 끝낼 거야?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정민은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뭔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논리도 부족했고, 감정은 더 식었다.

  서운군의 아파트도 원래 장모에게서 나왔던 것이라, 돈과 바꾸어 그대로 돌려주었다. 민서도 자기가 키우겠다고 했다. 얼마에 한 번 민서를 만난다, 한 달에 얼마씩 양육비를 보낸다, 이런 것도 정하지 않았다.

  그랬지만, 민서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씩 만나고 있으며, 민서의 학원비는 모두 내가 부담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학교 등록금까지. 그게 아빠의 도리를 최소한으로 지키기 위한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아빠, 약속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그리고 무선 이어폰 갖고 싶은데, 사 줄 거지?”

 

 

   섬

 

   처음부터 이 자리였다는 것이

   그리고 여전히 이 자리라는 것이

   기다림과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나를 외롭게 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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