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획관 박민구
공간이 낯설다. 같은 군청 건물 안이기에 여기가 내가 근무하는 2층과 다를 것도 없다. 하지만 다르다. 군청의 모든 사무실의 호수는 위치한 층의 숫자로 시작한다. 문화관광과는 2층에 있으니까, 211호이다. 하지만 여기는 예외다. 5층인데도 101호이다. 이 5층 101호 앞에 서서, 스스로 작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잠시 심호흡.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위축을 강요받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햇빛을 다 쓸어 담을 듯이 복도 쪽을 뚫어버린 통 창문. 군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동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5층의 외딴 공간. 그리고 내 앞에는 어느 쪽이 열리고 어느 쪽은 닫혀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원목으로 된 육중한 쌍여닫이문. 공무원이 밟기에는 왠지 송구스러운 발아래 깔린 붉은 양탄자까지.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유가 될 것 같지 않다. 이런 풍경들은 예전에도 그러했을 것이니 낯선 것이 아니다.
이유는 쌍여닫이문 위의 사무실 팻말에 있었다. 작은 팻말로 101호, 그 아래 군수실 팻말, 다시 아래 기획실 팻말. 지난 4월까지만 해도 군수실 팻말 아래에 비서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지만, 선거 뒤에 군수실의 주인이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실이 기획실로 바뀌었다.
지금 나는 기획실의 호출을 받아 여기 101호 사무실 앞에 서 있다. 만일 비서실로부터 호출되었다면 지금처럼 작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짧게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왼쪽 문을 밀어본다. 열린다. 몸을 들이밀고 안쪽의 공간을 둘러본다. 한쪽으로 창문이 있음에도 모든 조명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인구 겨우 5만이 조금 넘는 시골 군의 군수실치고는, 아니 군수실 옆의 부속실치고는 소박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101호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5년 전쯤 되었으니, 사무실의 분위기가 얼마나 화려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공간을 둘러본다. 이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정장 차림이다. 어색하다. 문득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한여름인데도 저들과 같은 복장들이 가능함을 내 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반소매 아래의 겨드랑이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 온다. 다른 사무실과는 다른 냉랭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한다. 다른 세계인 여기도 서운군청인가.
15년 만의 더위라고 날씨가 TV 뉴스의 첫 자리를 차지한 지 며칠 되었다. 이에 맞추어 모든 공무원은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복장을 갖추어야 했다. 정부는 혹 닥칠지 모르는 전력 부족 사태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공무원들의 복장으로 보여 주려 했다. 하지만 서운군민들이 올라와 볼 일이 별로 없는 여기 5층은 정부의 시책에서 열외 되어 있다.
문득 내 복장을 살펴본다. 반소매 남방에 면바지에 운동화. 우리 사무실의 누구처럼 용감하게 반바지에 샌들까지 신지는 못했다. 그런 복장을 소화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 가능한 복장과 가능한 나이 사이에서의 자기 검열은 아침마다 출근 시간을 지체시키는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로 불안하다. 서늘한 낯선 분위기 때문에 불안하다.
“어, 김 형.”
사무실 중앙에서 나를 향한 손짓을 발견한다. 책상에는 기획관 박민구라는 명패가 올려져 있다. 축산지원과에서 함께 근무하던 박민구이다. 하지만 축산지원과에서 보던 모습이 아니어서 잠시 당황한다. 옷차림도 달라졌고, 머리 스타일도 달라졌고, 심지어는 짓는 표정도 달라졌다. 말투도 과장되어 있다.
“휴가는 잘 다녀왔어요? 어디 다녀왔어요?”
휴가라. 딱히 간 데가 없다. 갈 데도 없다. 같이 갈 사람도 없다. 무엇보다 더위가 싫다.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열기가 싫다. 비록 정부 시책에 따라 실내 온도를 높였지만, 관공서만큼 시원한 공간은 따로 없다. 그래서 휴가를 뒤로 미뤘다. 수당과 휴가를 아예 바꿀 생각이다.
“어이구, 여기는 워낙 바빠서, 휴가는 생각도 못 해요.”
여기 101호. 새 군수가 당선되고 박민구는 축산지원과에서 이곳 기획실로 자리를 옮겨 기획관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그렇다고 승진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7급 지방공무원이다.
새 군수는 군청 여러 부서의 직제 표를 바꾸었다. ‘과’ 아래에 있었던 ‘계’는 대부분 없애고 대신 ‘팀’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과장이 계장의 직속상관이었지만, 지금은 과장과 팀장의 상하 위계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아예 과장이 없는 독립된 팀장도 있었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직제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아직 군의회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새 군수의 혁신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새 군수는 자신의 권한으로 새 팀을 여럿 만들었고, 파견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였다. 이를테면 이곳 기획실에는 지금 모두 다섯 명이 앉아 있지만, 원래 직제 표에는 세 명이 전부이다. 박민구도 기획관이라는 명패를 앞에 두고 앉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축산지원과의 주무관일 뿐이다.
“그래도 일이 편하지요?”
박민구가 말하는 일이라는 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인지, 내가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나 역시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곳은 문화관광과의 지역축제팀이지만, 공식적인 직제 표에는 축산지원과 방역계에 소속되어 있다. 나 역시 파견을 명받았다. 그러니 축산지원과에는 졸지에 두 명이나 결원이 생긴 것이다. 나는 돼지가 있던 곳에서 없는 곳으로 옮겨갔고, 박민구는 101호로 올라갔다. 3층이나 건너뛰어 5층으로 올라간 것에 대해 박민구가 새 군수와 고교 선후배 사이라거나, 혹은 새 군수의 처가 쪽 사람이라거나, 혹은 둘 다이라거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쨌든 근무지가 달라졌지만, 둘 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축산지원과의 동료이다.
“문화관광과 근무는 어떤지 모르겠네.”
박민구의 말에서 말끝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발견한다. 굳이 따지자면 나이는 내가 두 살인가가 많고, 대학 학번도 그렇다. 하지만 내게 있는 군대 경력이 박민구에게는 없다. 그래서 내가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박민구는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내가 다니던 대학의 행정학과에 편입하여 4학년이었다. 더하여 공무원으로서의 출발은 나보다 3년인가 빠르다.
언젠가 축산지원과 회식 자리에서 박민구는 이렇게 꼬인 우리들의 족보를 설명해 주었다. 둘 사이에 관계가 있으려면 있겠지만, 없다면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 그래도 축산지원과에서는 박민구에게 나이대접을 받았었다.
“우리 영감님께서 김 형을 왜 불렀는지 모르죠?”
기획실 한쪽의 소파에 자리에 청하며 말을 건넨다. 영감님이라. 군수를 지칭하는 호칭이 낯설다. 군수라면 관찰사는 아니고 현감쯤일 텐데 현감이면 품계로 얼마쯤 되나. 조선 시대에는 품계가 얼마나 높아야 영감 소리를 들었을까. 박민구에게 집중하지 않기 위해 엉뚱한 상상을 한다.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박민구는 꼬박꼬박 영감님을 부르며 말을 이어간다. 저렇게 윗사람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랐기에 박민구는 이곳 5층까지 오게 된 것일까.
“들어가 봅시다. 영감님께서 김 형에게 무슨 일을 맡기시려나 보던데.”
무슨 일? 이 기획실에다 또 다른 자리를 하나 마련하려는 것일까. 괜한 기대를 잠깐 하려다가 얼른 그만둔다. 나는 군수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발상을 아예 하지 못한다. 새 군수도 자기에게 90도로 인사할 용의가 있는 공무원들은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장삼이사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공무원처럼 나도, 4년 후 바뀔지도 모르는 군수에게 충성하지는 않는다. 정년 때까지 보장되는 안정된 공무원직에 충성한다. 박민구처럼 기회를 쫓아 사람을 따라가는 모험은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민구가 말하는 무슨 일이라는 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성가시고 번거로울 가능성이 더 크다.
이때 큰 목소리가 군수실에서 건너 들린다. 선거 유세 때 많이 듣던 군수 영감의 목소리를 가까운 거리에서 듣는다. 간간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만, 군수의 목소리에는 어림이 없다. 과장된 웃음소리. 기획실과 군수실 사이의 문이 꽤나 두껍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들리는 것은 목소리 크기로 지위는 과시하려는 것이다.
안에 누가 있는데 들어가도 되려나?
“아, 괜찮아요. 영감님께서 올라오는 대로 들여보내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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