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15. 문화원장 최현

New-Mountain(새뫼) 2022. 9. 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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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화원장 최현

 

  딸깍. 박민구가 군수실로 잠시 올라오라는 메시지를 담은 창을 보냈다. 나만? 짧게 답신했더니, 팀장은 와 있어요, 한다. 보니 옆의 팀장 자리가 비어 있다. 군수인지 박민구인지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101호로 불러올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때로는 중간에 있는 과장을 생략하고 팀장이나 팀원들을 직원 불러올려 업무를 챙김으로써, 조직에 익숙한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메시지로 부른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송미영의 펌킨 클라우드 페스티벌 사건도 그랬다. 나도 뭔가 군수에게 한 마디 던질 말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선다. 하지만 던질 말이 있어도 못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을 때가 더 많았다.

  노크 없이 101호 기획실에 들어선다. 박민구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 들어갑시다, 과장님이랑, 팀장도 와 있어요. 군수실에는 문화관광과 과장과 지역축제팀장뿐 아니라 중년 여성도 한 사람 앉아 있다. 요즈음 많이 바쁘신 것 같아 잠시 숨이라도 돌리시라고 차 한 잔 대접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군수가 손짓하며 빈자리를 가리킨다. 손짓을 따라 앉으려 하니까 군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성이 일어서며 내게 명함을 한 장 내민다.

 

     瑞雲郡 文化院長 忍竹 崔絃.

     대한 서예협회 상임이사. 대한 서예협회 J도 지부 부지부장. 대한 서예협회 서운군 지회장.

 

  좁은 명함에 직위가 가득하다.

  “문화원장입니다. 고생 많으시죠.”

  문화원장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3년 전 서운군 문화원장 선거에서 재선하여 7년째 문화원장 자리에 앉아 있는 서예가 인죽. 전임 군수 때, 문화 사업에 군청의 예산 지원이 인색하다고 지역 신문에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실어 지역사회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어 치러진 군수 선거에서 지역적 기반이 깊지 않았던 현 군수를 노골적으로 지원하여 당선시켰던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천승남이 늘 쪼그만 당찬 여자로 불렀던 그 문화원장이 지금 군수실에서 내 앞에 있다.

  내 자리 앞에는 이미 앙증맞은 찻잔이 올려져 있다. 군수가 찻주전자를 들어 내 잔에 찻물을 채우려 한다. 박민구와 문화관광과장이 황급히 군수의 찻주전자를 받으려 일어난다. 하지만 찻주전자는 문화원장의 이미 손에 들려 있다.

  드세요. 매일 커피만 드시죠? 나도 그랬는데, 요즈음은 이 차 맛에 빠졌어요. 무엇보다 차 내릴 때 여유가 있어요. 또 차를 마시면서 향기도 따라 마시게 되죠. 군수가 자기 앞에 있는 찻잔을 홀짝인다.

  “우리 군수님은 참 정서가 따뜻하다. 표현도 문학적이시네요. 우리 문화원에서 명예이사로 추천할까 봐요.”

  과장되게 웃는 문화원장을 따라 군수가 웃는다. 제가 예술을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정치가 예술이시잖아요.”

  군수와 박민구가 흐뭇하게 웃고는 있지만, 과장이나 팀장이나 나는 그들의 웃음에 동조하는 타이밍을 잃었다. 차 한잔을 다 비우고는 군수가 일어선다. 기관장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지? 네, 세 시부터니까 지금 출발하시면 됩니다. 박민구가 시계를 들여다본다. 다들 따라 일어서는데 군수가 앉으라고 손짓한다. 다 앉는데, 문화원장은 여전히 서 있다.

  최 원장님도 기관장이시니까 가셔야 하는데, 경찰서장, 교육장, 소방서장, 이런 답답한 사람들이 만나 국가 시책을 논의하는 자리네요. 예술하시는 원장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군수가 양복 앞 단추를 여민다.

  “저야 신경 써 주시는 게 늘 고맙죠. 다녀오세요.”

  문화원장이 공손하게 두 손으로 공수한다. 자, 말씀들 많이 나누세요. 우리 군의 문화발전을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쓰시는데, 과장님이나 팀장님이나 우리 문화원장님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군수가 박민구를 뒤에 세우고 군수실을 나선다. 군수실에는 문화원장과 과장과 팀장 나, 이렇게 넷만 남았다.

  순간 이 자리가 군수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군수는 의도적으로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런데 여기가 군수실이니까 문화원장이 우리에게 하는 말들은 협조가 아니라 일종의 군수 지시가 된다. 물론 군수는 이 자리에 없으니까 공식적으로는 군수와는 관계가 없다. 과장이나 팀장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다. 불편해하는 과장의 표정이나 불쾌해하는 팀장의 표정을 읽는다. 하지만 문화원장은 지금 찻잔에 얼굴을 묻고 있어, 이들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있다.

  “어떤 찻주전자나 찻잔에 찻물을 담느냐에 따라 차 맛이 결정된다고 하더라고요. 차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 그릇에나 차를 마시는데, 그건 차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종이컵에 마시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건 스스로 차를 모르는 무지함을 드러내는 거랍니다.”

  웃으며 문화원장이 과장과 팀장의 찻잔에 차를 따른다. 내 찻잔은 처음 그대로이다.

  “제가 하는 일이 예술이라서,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요. 평소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듣고 보셨겠지만, 우리 군수님도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이에요.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익숙하지 않으실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도 문화에 관련된 일을 하시니까 다른 분들보다는 마음이 따뜻하겠네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과장이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꽤 오랫동안. 이제 본론을 말하고 우리를 내려보내 달라는 공무원식 의사 표현이다. 하지만 문화원장은 그걸 모르는지, 아니면 아는데도 모른 척하는지, 두 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들어 차향만 맡을 뿐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술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거랍니다. 자기 정서를 직접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창작한 예술작품을 제공하면서 예술적인 정서를 일깨우는 기회를 드리는 거죠.”

  손목시계가 없는 팀장은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군도 마찬가지예요. 군수님 말씀처럼 아무리 우리 문화원 식구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서운군의 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해도 그게 눈에 보이게 표현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제 팀장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것 같다. 팀장은 공무원이 아니다. 과장이나 나처럼 군수실의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는다.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주무관님, 우리 미팅이 몇 시에 잡혀 있죠?

  “아, 바쁘신 분들에게 말이 길었네요.”

  예상치 못한 팀장의 발언에 문화원장이 당황한다. 여유롭던 찻잔을 급히 내려놓으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 봉투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낸다. 서예 작품들이다. 한글도 있고, 한자도 있다. 맨 끝에는 인죽 최현이라고 적혀 있고, 붉은 도장이 예쁘게 찍혀 있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신기정인가요? 이번 호박 축제에서 정자를 세우신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주무관님이 담당하신다고 들었어요.”

  문화원장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거북하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지만, 이미 다 식었다.

  “얼마 전에 영풍군에 다녀왔는데, 영풍역에 시조비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깨달은 게 있어요. 요즘은 지자체가 아니더라도 여러 단체에서 노래비나 시비들을 많이 세워요. 지역민들이 예술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이지요. 아쉽게도 우리 서운군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노력이 없었던 거예요.”

  혹시 신기정을 세우면서 가사비를 같이 세우자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신기정가도 J대학교의 정일영 교수가 우리 문화지에 쓴 논문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어요. 문화지 편집 책임자로서 제가 논문 게재를 승인했었습니다. 그 논문을 군수님께 소개한 사람도 저에요.”

  지역축제팀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발단이 바로 앞에 있는 문화원장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영풍군에도 시조비가 있는데, 서운군에 그런 비석이 하나 없다는 게 문화원장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요. 내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많아요.”

  다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팀장과 과장이 서로 시선을 마주친다. 과장이 다시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서운문화에 정 교수님의 논문을 싣기는 했어도, 신기정가를 모르는 군민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것도 제 책임이 제일 크죠. 우리 군에 그런 훌륭한 문화유산이 있었는데, 그걸 군민들에게 알릴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

  내 찻잔이 빈 것을 확인한 문화원장이 차를 따르려고 한다. 내가 손을 들어 사양한다. 곧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문화원장이 끄덕한다. 얼굴이 굳어 있다. 앞에 옆에 앉은 공무원들이 자기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가 예상을 넘어감을 몸소 깨닫고 있다. 하지만 이곳이 군수실임을 상기시킨다.

  “군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서운군의 문화발전을 위해 저는 글씨를 썼거든요. 이번 축제에서도 뭔가 봉사하고 싶네요. 제가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 군에서도 멋진 가사비가 남을 것 같아요.”

  문화원장이 말하려는 의도는 이미 다 읽힌 상태이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팀장이 즉각 반응한다. 처음으로 과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린다.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가사비는 따로 예산에 없는데, 어디에서 마련한다? 다이어리에 뭔가 적는 척하다가 마지막으로 내가 일어선다. 그리고 나 역시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다. 신기정을 세울 곳도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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