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14. 축제팀 손상섭

New-Mountain(새뫼) 2022. 8. 3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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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축제팀 손상섭

 

  “형님 덕분에 오랜만에 산을 다 타네요.”

  점심 먹고 나섰다. 성수산을 오를 셈이다. 실천을 가운데로 서쪽의 미호리와 운박리, 동쪽의 내룡리를 모두 살펴보았지만, 신기정의 흔적은 없었다. 신기정, 아니 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도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수산에 올라 보기로 했다. 사실 다이어리에 적어둔 첫 번째 순서이기도 했다. 성수산 어디쯤에 신기정이 남긴 자취가 있을지도 모른다.

  토박이 손상섭에게 성수산에 함께 오르자고 청했더니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물이 많은 산이 아니라고, 정자를 세울 만한 땅이 있는 산도 아니라고, 높이가 937미터인데 제대로 오르자면 왕복 여섯 시간은 걸릴 거라고. 손상섭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고 하여 몇 번 졸랐더니, 팀장이 허락하면은요, 하고 조건을 붙였다. 팀장에게 양해를 받아 오니, 마지못한 듯이 따라나섰다.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만 올라간다는 조건을 또 붙였다.

  하지만 막상 산을 오르니 나와는 달리 산을 타는 발걸음이 신이 난다.

  “이 길이 맞아요. 이 길이 아니면 정상까지 올라갈 만한 길이 없어요.”

  손상섭은 거친 돌이 쌓인 길로 나를 이끌고 간다. 골짜기로 난 바위투성이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9월인데도 발걸음을 옮김에 따라 땀이 흐른다. 입었던 점퍼를 벗어 허리에 감는다. 길 아닌 길옆으로는 나무들이 제법 빽빽하여 어둑하다. 군데군데 나뭇잎이 깔려 길이 미끄럽다. 신기정가에 나오는 것처럼 주변 경치를 완상할 수 있는 풍경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보통 성수산 정도의 고도라면 등산로가 있을 법도 한데, 아직 개발을 안 했어요. 딱히 볼 것이 없다는 거지. 그래서 길이 거칠어요.”

  볼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오게 되고, 사람들이 오면 편한 길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편한 길이 되게 하려면 사람들이 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볼 것이 있어야 한다. 신기정이라는 볼 것이 생기면, 편한 길로 서운군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이 부근으로 멧돼지가 많이 다녀요. 조심하는 게 좋아요. 토끼나 고라니도 종종 나오는데 걔들이야 귀엽지.”

  멧돼지가 볼 것이 될 리는 없다. 재작년인가 멧돼지의 출몰이 하도 심해 각 부서에서 차출도 하고 자원도 받아 유해조수 퇴치팀을 꾸렸는데, 손상섭은 차출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덩치 때문이었을 거라고. 손상섭은 길을 찾아 오르며 그때의 무용담을 한참 늘어놓는다. 지루하지 않게 산을 오를 셈이다. 하지만 두서없는 손상섭의 무용담은 가뜩이나 힘든 내 걸음을 더 지루하게 한다.

  줄었던 멧돼지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말을 정리하고 손상섭은 한 곳을 가리킨다.

  “저기로 올라가면 그나마 성수산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곳이 나오기는 하는데…….”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반 만에 능선에 들어선다. 능선에 오르자 갑자기 환해진다. 산 아래와 산 위의 풍경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손상섭은 바로 앞의 두 평 남짓한 널찍한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앉으라 한다. 주변으로 낮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바람이 시원하다.

  “성수산에서 풍경을 보기에는 여기가 최고예요. 저기가 호박벌이고, 저쪽이 읍내네요.”

  손상섭의 말이 아니더라도 보이는 대로 그냥 보아도 지금까지의 경치 중에서 가장 괜찮은 곳이다. 풍경을 즐기려 정자를 세운다면 여기쯤 세워야 맞을 것 같다. 바람을 맞으면서 세월을 잊고 시간을 즐기면서, 혼탁한 먼지 같은 세상을 저 아래로 멀리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잊으면서, 나를 잊으면서.

  다만 주변으로 흐르는 계곡이 없다. 마른 계곡은 이미 한참 전에 시야에서 흘러 가버렸다. 이런 내 마음을 손상섭이 읽는다.

  “여기가 신기정 터는 아니겠죠. 이런 바위 위에다 정자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해요. 기초를 만들 수가 없거든요. 또 이 바위 자체가 정자인데, 굳이 여기에다 건물을 세워 뭐 하겠어요.”

  손상섭은 공학과 문학의 극단을 오고 가는 말을 하고 있다. 멧돼지 잡는 얘기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올라와서 시간을 죽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트인 시야와 맞이하는 바람만으로도 흘린 땀을 식힐 수 있다면, 오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약간의 운치를 위해 산타기의 고통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여기서 보면 우리 서운군에는 정말 들이라는 게 없어요. 그렇다고 산이 높은 것도 아니고.”

  손상섭은 천북면, 천남면을 잇달아 가리킨다. 대부분의 집들이 산기슭에 붙어 있다. 그나마 가장 넓은 들이 호박벌이다. 멀리 호박벌의 축제행사장에는 트럭들이 바삐 드나들고 있다. 문득 우리 호박 축제 포스터에 그려진 호박벌의 전체 지형이 기다란 애호박과 잘 닮았다고 생각해 본다. 포스터를 만든 송미영도 여기에 올라와 보았을까?

  “아이고, 형님도. 구글 지도에 다 나와요.”

  손상섭의 그 한 마디가 내 감성을 제압한다.

  “참, 형님. 축제하는 호박벌 일대가 전임 군수 땅인 거 아세요?”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내가 흥미를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까 손상섭은 신이 난다. 지역개발과에서 듣고 겪은 얘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임 군수 문중 땅, 그러니까 서운 이씨 땅이에요. 처음에는 군수가 저기에다 농공단지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래서 진입 도로도 닦았고, 터를 정리했겠죠. 그렇게 인프라를 만들었는데, 이 시골에 들어올 공장이 있어야죠. 투자자도 없고. 제일 큰 문제는 개인 땅이 아니다 보니 마지막에 문중의 몇몇 사람이 반대한 거예요. 그래서 서로 투덕투덕하다가 일단 뒤로 미루었죠.”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손상섭의 추정인지 알 수 없다. 손상섭은 점점 자기 말에 취해 가고 있다.

  “농경지를 형질 변경해서 공업용지로 만들고, 도로까지 닦았는데, 그냥 놀리게 된 거죠. 그래서 군수가, 전 군수가 마침 축제 얘기가 나오니까 거기에서 하자고 제안한 거예요. 한시적으로 군청에 임대하는 형식으로.”

  그러면 내년에는 호박 축제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군청도 모르고, 정작 서운 이씨 자기들도 모를걸요. 우선 땅값이 올랐어요. 군수도 바뀌었고. 저 땅을 나누어야 하는 서운 이씨들이 한둘도 아니에요. 땅을 더 갖겠다고 소송까지 붙었다고 하네요. 아이고 집안싸움이 난리에요. 그런 난리가 없어요.”

  손상섭이 마시던 물을 건넨다. 물병을 기울이며 산 아래쪽이 아니라 산 위쪽을 올려다본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더 올라가실래요? 위로 가면 성수산 정상인데, 계속 비슷한 풍경만 보일 거예요. 저쪽으로 가면 임수봉 쪽인데 거기는 아예 계곡조차 없어요. 성수산 너머에는 계곡이 있기는 한데, 거긴 남태군이네요. 우리 군이 아니니까 가 볼 필요는 없겠죠.”

시계는 세 시를 가리킨다. 오른 지 두 시간이 지났다.

  “다른 길이 있는데, 그리로 가 보실래요? 내룡리 쪽인데 조금 험하기는 해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상섭이 앞장을 선다. 다시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형님 저거 보세요. 저게 그 유명한 돌부처에요.”

  손상섭이 가리키는 쪽에 큰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부처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연석일 뿐이다. 이 산이 불타산이게 하였던 바로 그 돌, 그 부처이다.

  “저 돌은 춘분이나 추분 무렵에만 부처가 돼요. 그때쯤 저녁 햇빛에 그림자가 생기면 영락없는 부처 모습이 되거든요.”

  바위를 돌아본다. 굴곡은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저 굴곡이 부처의 그림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왜 부처님 뵙고 가려고요? 사실, 부처님을 뵌 사람이 몇 안 돼요. 부처님을 뵙고 나면 날이 곧 어두워지는데, 산에서 내려갈 방법이 없거든요. 곧 추분이니까 부처님이 한창 오고 계시긴 하겠네요.”

  손으로 돌을 쓰다듬어 보는데, 손상섭이 돌을 보고 합장 비슷한 것을 한다.

  “전국 보디빌딩 대회 때 우승 한 번 빌어보려고 텐트까지 짊어지고 올라왔어요. 작년 추분 때인데, 제길, 가는 날이 장날이었네요. 비가 오는 바람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부처님은 뵙지도 못하고 그냥 내려갔네요. 형님, 다다음 주 추분 때 저랑 같이 올라와 보실래요. 작년에는 부처님을 뵙지 못해 우승을 못 했는데, 그때는 뵐 수 있겠죠? 형님은 신기정을 찾게 해 달라고 빌어보세요.”

  다다음 주라. 그러면 앞으로 보름 동안이나 신기정을 더 찾아야 하는가.

  “헤, 농담입니다. 아무리 영험한 부처님이라도 없는 신기정을 떡 만들 재주는 없겠죠.”

  히히 하며 손상섭이 앞장서서 산을 내려간다. 손상섭은 신기정은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렸을까. 오르는 길보다는 더 험하지만, 시간은 덜 걸린다. 조금 더 걷자 산이 끝나고, 낯익은 사과나무들이 나타난다. 내룡리 이장네 과수원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사과가 더 붉어졌다. 아직 다섯 시가 되지 않았다.

  “오늘 출장을 구두로라도 복명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팀장에게 출장을 복명한 적이 없다. 그저 출장을 전자 결재로 올리면 팀장은 그냥 결재하곤 했다. 출장 사유는, 축제준비차, 다섯 자가 전부였다. 잘 다녀오셨어요, 하고 물은 적도 드물었다.

  “이렇게 복명하면 되겠네요. 손 아무개와 성수산 일대를 탐방하였지만, 신기정 터로 추정되는 정자 터를 발견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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