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17. 문화관광과장 한혁수

New-Mountain(새뫼) 2022. 9. 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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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화관광과장 한혁수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작년 같았으면 연휴도 즐겁고, 효도휴가비도 즐거운 추석이었을 터인데, 이거 호박 축제 때문에 올해는 추석이 추석이 아닙니다.”

  문화관광과 한혁수 과장의 인사말을 들으며 군청 대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본다. 군청의 과장급 이상은 모두 모인 것 같다. 축제가 열리는 천북면, 천남면의 면장을 비롯한 면 직원들이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장인 듯한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백여 석의 좌석은 이미 다 채워졌고, 뒤쪽으로 간이 의자까지 채웠다. 대회의실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인 경우는 새 군수의 취임식 이후 처음이다.

  마이크를 잡은 한 과장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이 익숙하지 않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인정하고 있다. 흰 조명은 과장의 흰 머리에, 노란 조명은 과장의 노란 민방위 점퍼에 내려앉는다.

  “아시는 대로 우리 서운군에서 처음 하는 지역축제, 그러니까 호박 축제가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축제팀에서 잘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여러분들께 현재까지 진행 상황을 말씀드리고, 앞으로의 일정도 말씀드리고, 또 협조를 구할 부분이 있으면 부탁을 드리려고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과장이 강연대 위에 있는 물을 한 잔 마신다. 서운군청의 과장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으나, 직급은 높지 않다. 원래 군청의 과장급은 5급이 보임하게 되어 있으나, 그건 큰 시나 군이 그렇고, 서운군처럼 작은 군일 경우에는 6급이 맡는 경우가 오히려 많았다. 한 과장은 6급이다. 말년 6급. 정년을 한 해 앞둔.

  “에, 그리고 군수님도 참석하시려 했는데, 도청에 급한 회의가 있으셔서 거기 가셨고, 대신하여 기획실의 기획관님이 오셨습니다.”

  대회의실에서 유일하게 양복을 입은 박민구가 일어서서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군민들을 대하는 군수의 인사법 그대로이다.

  “에, 또. 아직도 모르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지역축제팀의 민수연 팀장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울 유명한 기획사에서 축제 성공을 위해 스카우트한 분입니다. 지금 역량의 150프로를 발휘하고 계십니다. 나와서 인사하세요. 나오시는 김에 현재 호박제 진척 정도를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팀장이 연단으로 나아간다. 민수연입니다. 인사가 박민구처럼 깊지 않다. 팀장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호기심에 고개를 위로 뽑는다. 손상섭이 연단을 치우자, 조명이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송미영이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한다. 송미영의 손짓에 따라 팀장은 인사말도 없이 곧장 현재까지의 진척 정도를 브리핑하기 시작한다. 대회의실 정면에 사진과 숫자와 그래프가 팀장의 목소리에 섞여 쉴 새 없이 흘러간다. 곧 대회의실은 금요일 오후의 나른함에 잠긴다. 몇은 졸고, 몇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어이, 거기 공익, 불 좀 켜봐. 커튼도 걷고”

  브리핑이 끝나고 과장이 다시 마이크를 넘겨받는다. 목소리가 크다. 다분히 의도한 목소리이다. 대회의실이 갑자기 밝아진다.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팀장 이하 축제 팀이 정말 고생 많이 하고 계십니다. 급한 용무 때문에 휴대전화를 보시는 분도 있는데, 잠깐 주머니에 집어넣으시고 그간 고생하신 지역축제팀에 큰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옆에서 주무시는 분들도 번쩍 일어나도록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과장의 너스레에 크지 않은 박수 소리가 회의실의 나른함을 대신 채운다.

  “에,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 문화관광과에서 축제의 성공을 위해 여러분들께 몇 가지 협조와 당부를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의 자리를 만든 목적은 이 때문이었다. 서운군의 이름을 걸고 하는 축제이지만, 호박 축제는 점점 군청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별로 눈길을 끌 것 같지도 않은 아이템, 해 봐야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것 같은 행사, 버리지 못해 남겨둔 전임 군수의 유산, 등등. 이유야 다양했지만, 호박 축제는 지역축제팀만의 사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문화관광과 사람들까지 그랬다. 배부른 현경숙이 키보드와 프린터 사이를 힘겹게 오가는 걸 보면서도, 늙은 천승남이 전화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것을 들으면서도 저쪽의 일은 저쪽의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손상섭이 서류를 집어 던진다거나, 송미영이 카랑하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불만은 우리 팀만의 것이었다.

  팀장은 촉탁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직 장악력은 떨어져 갔고, 다른 부서와의 협조는 점점 힘들어져 갔다. 그렇게 축제팀은 불만이 쌓여 갔다. 불만이 임계점에 다다를 무렵,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엉뚱한 곳에서, 예상 밖의 사람에게서.

  지난주 금요일, 4시를 넘길 무렵, 문화관광과의 컴퓨터들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가방을 챙기고, 몇몇은 큰 소리로 불금의 술 약속을 정하고 있었다. 그때 비명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무실을 울렸다. 건너 지역축제팀 사무실까지. 놀래 다들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문화관광과장의 책상 위에 꽂혀 있던 가장 굵은 법전이 책상에 덮여 있던 유리를 깨버리는 소리였다.

  정말, 너무들 한다. 그래 몇십 대 일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엘리트들이 다르긴 달라. 야, 조 팀장. 너희는 저기 축제팀 일하는 거 안 보이냐? 노안인 나한테도 보이는데. 쟤들은 오늘 야간작업하고, 내일도 휴일 근무한대. 근데 너희는 술이 술술 넘어가?

상황을 살피러 온 관광개발팀의 조 팀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과장님, 우리가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도 우리 일이 있고, 저쪽 일은 잘 알지 못하니까.

  언제부터 우리고, 저쪽이냐? 다 같은 문화관광과 아냐? 내가 과장이야. 지역축제팀, 관광개발팀, 생활스포츠팀, 예술지원팀, 문화시설계, 모두 문화관광과야.

  그 상황을 지켜보던 민수연 팀장이, 탕,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나가버렸다. 축제팀은 앉은 채로, 퇴근을 준비하던 문화관광과 사람들은 선 채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내가 옷 벗을 날도 며칠 안 남았지만, 나도 다른 과장들처럼 꼬장 한 번 부려 볼란다. 조 팀장, 니가 우리 문화과 차석이지? 다음 주에 호박 축제 준비 상황 보고회 할 테니까 기획안 만들어 올려. 나 정확하게 월요일 아침 아홉 시에 결재할 거다. 그리고 그거 들고 아홉 시 삼십 분에 군수실 올라갈 거야.

  그건 축제팀에서 하는 것이, 조 팀장이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더듬거렸다.

  쟤들 지금 전부 다 시간외근무 올렸어. 근데 쟤들한테 일 더 시키라고? 같은 과 직원끼리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어. 시험으로만 공무원을 뽑으니까 이래.

  끙, 하며, 조 팀장이 몸을 던지듯이 자기 자리로 들어가 앉는 소리가 요란했다. 과장과 축제팀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몇몇에게서 에이씨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다가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고, 컴퓨터가 하나둘 금요일 오후에 켜지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팀 사무실을 향해 과장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야, 송미영. 축제 관련하여 결재 올릴 때 너희 팀장한테만 올리지 말고 문화관광과 팀장들 전부한테 병렬결재로 올려. 오늘 올린 이거, 축제장 인력 협조 방안, 이거 결재 취소할 테니 이것부터 그렇게 해.

  네 알겠습니다. 송미영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카랑하게 울렸다. 누군가가 깨진 책상 유리를 치우러 오는 듯 빗자루를 들고 다가섰다. 이건 내가 할 일이야, 하며 빗자루를 빼앗았던 과장의 친위쿠데타가 꼭 일주일 전이었다.

  “에, 협조와 당부입니다. 드릴 말씀은 많은데,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금요일인데 시간을 너무 뺏으면 곤란하겠지요. 유인물로 만들었으니 들고 가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말씀 더 올리면, 이 축제가 제가 하는 마지막 사업입니다. 35년 공무원 생활 부끄럽지 않게 끝낼 수 있도록 통 크게 도와주십시오.”

  과장이 강연대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박민구만큼 인사가 깊다. 아까보다는 조금 큰 박수 소리가 멈추자 고개를 든다. 한가한 면의 면장으로 나가서 시간을 죽이다가 꽃다발 안고 은퇴하는 게 꿈이었다는데, 승진도 안 되고, 문화관광과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밥집의 사랑채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며 되뇌곤 했다. 젠장, 기어이 담배를 못 끊고 퇴직하네. 이 말이 단골이었는데, 어제는 그랬다. 젠장, 막판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네.

  “아 그리고, 하나 빠뜨린 게 있어요. 유인물에는 없는 건데, 잠깐만 앉아 보세요. 조 팀장이 말씀드려.”

  조 팀장이 과장을 대신해 연단으로 올라간다. 두 가지입니다. 우선 축제 명칭입니다. 오늘부터 펌킨 클라우드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은 폐기합니다. 서운호박제가 공식 명칭입니다. 이것으로 통일해 주시고요. 사람들의 시선이 송미영에게 몰린다. 군수실 사건 역시 군청에 널리 소문이 난 상태다.

  두 번째로 호박축제장 옆에 신기정이라는 정자를 세울 계획입니다. 그 앞에 신기정가라는 가사비도 세울 겁니다. 축제팀에서 이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과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문화관광과의 축제 준비에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과장이 어깨를 툭 친다.

  “우리 김 주사, 따로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지?”

  멀리서 볼 때 보이지 않던 이마의 주름이 깊다.

  “시골 공무원 생활이라는 게 그래. 할 때는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더라고. 구제역일 때는 축산과, 산불일 때는 산림과,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문화과에 있네. 골고루 거쳤어. 다행히 큰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고마워해야지. 그래도 김 주사는 새마을과에서는 근무 안 했잖아? 그때 지붕 개량한다고 초가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잖아. 팔에 깁스해서 갓 태어난 아들 녀석도 안아주지 못했네 그려. 허허 참.”

  과장이 내 팔을 지긋이 잡는다.

  “이 호박 축제 사업도 지붕 개량 사업이 될지도 몰라. 별거 아니면서, 나중에 추억거리도 안 되는 기억으로만 남게 되겠지. 아무리 봐도 특별한 게 없어. 군민들도 공무원들도 관심이 없고 스폰하겠다는 기업도 안 나오는데, 그렇다고 어영부영 끝낼 수도 없고. 군수님이야 선거…….”

  하려다가, 박 기획관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말을 돌린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보자고. 김 주사가 하는 일이 축제를 빛낼지 누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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