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축제팀 천승남
지금쯤 신기정들은 지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완결된 몸이 아니라 머리와 몸과 다리가 각각 나뉜 채로 남태전통건축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로 합체될 날을 기다리며 공장의 패널 벽을 자궁으로 삼아 세상에 던져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가 형이 될지 아우가 될지도 모르는 세쌍둥이들의 출산예정일은 이제 4주 남았다. 현경숙의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에 울린다. 정자들은 현경숙의 막내보다 사흘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다. 온종일 오다 말다를 계속할 거라고 했다. 축제 현장에 나갔던 팀원들이 모두 사무실로 철수해 있다. 다들 자기 책상 위에서 머리를 들지 않는다. 호박 축제는 호박벌에 있고, 신기정은 남태군에 있는데, 그것들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서류들은 각자의 컴퓨터 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다들 그 서류를 끄집어내기 위해 모니터를 응시하며 부지런히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의 서명을 기다리는 출생증명서처럼, 과장이나 군수의 전자 서명을 기다리는 문서들을 쌓아가고 있다.
문득 처음 민서의 초음파 사진을 볼 때가 생각난다. 아직 부르지 않은 정민의 배 위에서 스캐너가 움직이면서 흑백의 모니터 위에 검은 점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여기가 머리고, 여기는 다리고, 손도 보이네요. 의사가 설명했지만, 그저 내 눈에는 흰 점과 검은 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이다. 민서에게 나는 가끔은 흰 점이 되고 가끔은 검은 점이 되는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아빠일 뿐이다.
남태전통건축에 다녀온 후 팀장에게 물었다. 가사비를 나무로 만들어도 되는가? 신기정가를 현대어로 써도 되는가? 팀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업무담당자가 결정하는 거죠. 선배가 업무담당자 아닌가요? 그 말에 또 이어 물었다. 책임은 누가? 팀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책임은 팀이 같이 나누는 거 아닌가요? 팀장은 분명하게 검은 점을 찍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신기정가를 번역하려 하고 있다. 옮기려 하고 있다. 바꾸려 하고 있다. 풀이하려 하고 있다. 새로 만들려 한다.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정확한 표현인지 알 수 없다. 하여튼 고어와 한자로 쓰인 신기정가를 현대어로 다시 적으려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이 되는 신기정가의 텍스트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내게는 신기정가의 원문을 복사한 페이퍼를 읽어 텍스트로 옮겨 낼 능력이 없다. 정일영 교수는 서운문화에 실린 논문에 신기정가를 옮겨 적었지만, 전체가 아니라 논문을 풀어가기 위해 토막토막으로 인용했을 뿐이다. 아쉽지만 논문 파일만이라도 있다면 신기정가를 현대어로 옮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서운문화를 발간한 서운문화원에는 정 교수가 쓴 논문의 컴퓨터 파일이 없었다. 있었는데 사라진 것인지, 원래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무책임한 대답을 들었다. 서운문화를 찍어낸 인쇄소에 전화해 보니, 원 필자의 동의 없이는 파일을 내어줄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이틀 전에 정일영 교수에게 문자를 넣었었다. 논문 파일을 얻을 수 있는가. 덧붙여서…….
이때 딸각. 휴대전화에 문자가 도착한다. J대학교 국문학과 정입니다. 오늘 오후에 시간 나시면 모교로 한번 놀러 오시죠. 일곱 시까지는 시간이 됩니다. 문맥을 통해 정 교수는 내가 자신의 후배임을 확인했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나는 정 교수의 후배가 된다.
시계를 보니 세 시를 넘어서고 있다. J시까지는 두 시간 조금 덜 걸리니 그때쯤이면 이미 퇴근 시간이 될 것이다. 팀장에게, 잠깐 J대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낸다. 비 오는데 운전 조심하세요. 답장이 빠르다. 주섬주섬 복사물을 싸고 일어선다. 자동차 키를 쩔렁거리니 옆자리의 천승남이 내 행적에 관심을 보인다.
“어디 가려고?”
J대학교에. 가사 때문에. 대학교 교수 보러.
“그러면 같이 갈까? 팀장님 같이 가도 될까요?”
팀장이 끄덕거린다. 출장 올리고 가세요. 내게는 안 했던 소리다.
“네, 네. 알겠습니다.”
천승남이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나도 하릴없이 앉아 컴퓨터를 다시 켜고 출장을 상신한다. 출장지, J시 J대학교. 출장 사유, 가사비 제작 협의. 차에 키를 꽂으려니까 뒤따라온 천승남이 손을 내민다.
“내가 운전할까? 비도 오는데 운짱인 내가 하는 게 더 낫지.”
하늘이 어둑하다. 잠시 그친 비가 다시 쏟아질 것 같다. 천승남이 차를 출발시킨다. 읍내를 벗어나자 4차선이 2차선으로 바뀐다. 늘 다니는 4차선 길이 아니다. 천승남이 지름길을 택한 모양이다. 좁은 길에 굴곡도 많지만, 군수 차를 몰던 사람이라 승차감이 훨씬 부드럽다.
“이 차 몇 년 식인가?”
민서가 태어난 해에 바꾸었으니 민서의 나이와 같다. 11년.
“그렇게 오래된 차는 아니네. 근데 관리를 좀 해야겠다. 많이 낡았어. 차가 힘들어 하네.”
낡았어가 늙었어로 들린다. 천승남이 말하는 관리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차 안을 둘러본다. 다른 사람을 태우기에 민망할 정도로 어지럽기는 하다. 오피스텔에 있어야 할 살림이 꽤나 많이 차 안으로 옮겨와 있다.
“오래되었다고 낡은 것은 아냐. 오래되었어도 관리만 잘하면 생생하다고. 언제 나랑 카센터 한번 가 보자고.”
천승남이 앞을 응시한다. 비가 다시 내리고 있다. 와이퍼가 바쁘게 움직인다.
“그 쪼그만 당찬 여자가 자기 글로 가사비 세우자고 했다면서?”
문화원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랬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하여 돌판에 못 새기고 나무판에 새겨야 할 것 같다고 하였더니, 그건 별로 오래가지 않는데. 또 1000자가 넘을 것 같다고 하였더니, 그렇게나 길었던가요, 그럼 일부만 써야겠네요. 하기에 전체를 다 올릴 생각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그러면 다른 분에게 양보해야겠네요. 아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문화원장은 그 다른 분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까.
“참, 대단한 사람이야. 돌을 너무 좋아해. 서운군 여기저기에 그 여자 글씨가 한둘이 아냐. 호가 뭐라고 했던가?”
인죽, ‘참을 인(忍)’자에 ‘대나무 죽(竹)’자. 참는 대나무. 추위를 참아내는 눈 속의 대나무. 이렇게 말하다가 픽 웃어 버린다. 두 글자의 한자도 가사 식으로 네 음보로 풀어내려 한다.
“그래 인죽. 그렇게 자기 글씨 남기기 좋아해서야. 글씨도 한두 개 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거지. 너무 흔하니까 그냥 쓰레기더라고. 그 여자는 꼭 비석에만 글씨를 새겨요. 나무판이면 저절로 썩을 것이고, 철판이면 다시 녹여 재활용할 수라도 있지. 돌은 깨버리기 전에는 그것도 안 되는 거라. 나중에 후손들에게도 민폐가 되는 거지. 그렇게 잘 쓰는 글씨도 아니지?”
천승남이 나를 보며 동의를 구한다. 나는 문화원장의 글씨를 많이 보지 않았다. 어디에 문화원장의 글씨가 있는가?
“내가 군수 차를 몰았잖아. 군수님 모시고 가면 그 쪼그만 당찬 여자가 있더라고. 그 여자 글씨도 있고. 글씨가 없으면 글씨 새기겠다고 군수님에게 조르는데, 참.”
군수실에서의 만남이 생각난다.
“옛날 어떤 영화에서 그러더라고. 남자 배우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니까, 여자 배우가 받아치는데, 그 말이 참 멋있더라고.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거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거라고.”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 대화와 관련이 있는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서운군이 죽지 죽어.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자기 이름 새기느라고 정신들이 없어. 건물 하나 세울 때마다 돌판에 이름이라. 나무 한 그루 심을 때마다 또 돌판에 이름을 새기고. 건물이 무너지고 나무가 죽어도 그 돌판은 그대로야. 군수가 바뀌어도 옛날 군수 이름은 그냥 남아 있어. 군수 누구. 군의회 의장 누구. 경찰서장 누구. 초등학교 교장 누구까지 말야. 좁은 서운군에 높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길이 다시 4차선이 된다. J시를 가리키는 표지판 아래 붉은 신호에서 잠시 멈춘다.
“하긴 그 사람들 욕할 것도 없어. 나도 똑같지 뭐.”
시선을 천승남에게 옮긴다. 신호가 바뀌었는지, 천승남은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차를 출발시킨다.
“군수가 바뀔 때 명퇴를 신청했다. 어떤 과장이 나를 데려가겠나.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옛날 군수랑 가장 가까운 데 있던 사람인데.”
창문을 연다. 담배를 꺼내 물며 양해를 구한다. 끄덕 허락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10년 동안 운전만 해서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컴퓨터로 출장 상신하는 방법도 몰랐어. 그래서 정년이 한 5년 남았어도 명퇴하겠다고 한 거지. 그동안 축의금으로 뿌려둔 돈이 아까워서 딸애 잔치라도 치르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어디 내 뜻대로 되나. 본인은 전혀 관심이 없는데.”
그냥 듣기만 하면서 나도 따라 담배를 내어 문다.
“근데, 축제 팀이 생긴다고 하잖아. 생각해 보니까 거기가 남은 세월 동안 내가 있을 만한 곳이겠더라. 11월 초까지 운영된다니까, 끝나고 나서 연차 월차 몰아서 쓰고 나서 올 연말에 명퇴하는 거지. 그리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 아니,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내가 처음 나랏밥 먹을 때 한 일이, 수송부에서 자재를 관리하던 일이었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군이나 면에 있는 웬만한 차들은 수송부에서 고쳤거든. 거기에서 내가 부품 관리를 했었지. 벌써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래서 축제팀에 수송부는 없어도 자재를 관리할 사람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문화과 과장이랑 인사팀장에게 부탁했지. 축제팀으로 보내 달라고.”
J시의 외곽에 있는 J대학교가 멀리에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그만두기 전에 서운군을 위해 뭔가 남기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 달라, 그랬더니 보내주더라고. 딱히 보낼 데도 없었겠지만.”
교문이 바로 앞에 있다. 빠른 운전이었지만, 비 때문인지 다섯 시가 가까웠다.
“옆에서 볼 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그래도 요즘 열심히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답답한 건 맞는데, 그래도 요즘처럼 밥값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거 같아. 그렇다고 내 이름이 돌판에 남을 것도 아니지만.”
차가 대학교 구내로 들어선다. 군과는 다른 분위기가 펼쳐져 있다. 가을비에 떨어진 노란 은행나무 잎이 빗물에 흘러가고 있다. 그걸 밟으며 대학생들이 지나간다.
“하, 젊음이 좋다. 나는 언제가 저 때였나?”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우리 축제는 푸른 애호박이 주인공인가 늙은 누런 호박이 주인공인가. 그런 상념을 천승남이 깨운다.
“가사를 나무판에 새기기로 했다며? 그건 잘한 거야. 나무판이야 언젠가는 썩을 거라.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져야지. 굳이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나. 사라져야지 그 자리에 쟤들 같은 젊은 애들이 들어오지.”
차는 인문대학이라고 쓴 건물 앞에 주차된다.
“참, 이 대학 나왔다고 했나? 옛날 생각나겠구먼.”
천승남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불러세운다.
“나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시간이 난 김에 옛날 친구들이나 봐야겠네. 이 차는 내가 끌고 갈게. 끝나면 전화하라고.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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