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12. 내룡리 이장

New-Mountain(새뫼) 2022. 8. 2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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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룡리 이장

 

  신기정 찾기에서 가장 큰 숙제는 여전히 회룡강이다. 신기정은 회룡강을 끼고 지어졌다. 회룡강을 찾으면 신기정의 위치를 알 수 있겠지만, 신기정가에 있는 회룡강은 지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회룡강은 흔적도 없이 흘러가 버렸다.

  사라진 회룡강을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린 곳이 내룡리이다. 하북면에 내룡리가 있다. 군지를 뒤져보니 성수산 앞뒤로 하여 ‘용(龍)’자 또는 ‘룡(龍)’자가 들어간 지명은 내룡리가 유일했다. 회룡강과 내룡리,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아이고, 김 주사님, 오랜만이네요.”

  오전에 하북면 면사무소에 연락하여 내룡리 이장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젊은 이장이 웃으며 손을 내민다. 젊다고 해 봐야 40보다는 50에 가까운 중년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서운군 이장들보다 젊다. 귀농한 지 십여 년쯤 되었으니까 서운군에서의 삶은 나와 비슷하다.

  이장은 서운군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재작년에 서운군에서는 처음으로 사과 수확에 성공하여 올해의 영농인상에 선발되었다. 군수와 함께 사과 광주리를 안고 찍은 사진이 군청 현관에 걸리기도 하였다. 군수가 바뀐 후에 어느 사이엔가 내려지기는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이장을 처음 본 것은 작년 구제역 때 돼지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내룡리를 방문하였을 때였다. 떠든 친구를 이르라는 담임선생님의 지시를 받은 초등학교 반장과도 같은 얼굴로, 앞서서 나를 돼지 농가로 이끌었다. 양성반응이 나온 돼지가 묻힐 때는 검은 봉지에 담아 온 소주를 돼지 주인과 함께 마시고 남은 소주를 돼지 구덩이에 뿌렸다. 장례라도 치루는 양, 제사라도 지내는 양. 저만치였던가, 돼지를 묻었던 곳이. 그 엄숙한 분위기가 지금도 기억 한편에 남아 있다.

  “문화관광과로 옮기셨다고요. 축제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면사무소에서 들었을 것이다. 처음 내가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일순 긴장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묻으려고 오는 것일까. 작년에 나는 저승사자였다. 하지만 오늘은 생명을 앗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걸 알기에 나를 맞는 표정이 예전처럼 굳어 있지는 않다.

  “돼지 키우던 데에다가 사과를 더 심었어요. 과실나무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애써 키운 생명을 죽이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겠죠?”

  작년 일을 은근히 힐난한다. 축산 농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직도 거북하다. 읍내에서 돼지 주인들을 우연히 만났을 때, 나를 보는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비록 공무원으로서 할 일을 했다지만, 작년 일은 여전히 서로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돼지가 죽어서 거름이 되었으니, 사과가 잘 자라긴 할 겁니다. 몇 년 후에 내룡리에서 사과 축제를 하게 될지 누가 압니까?”

  서로에게 아픔으로 남은 돼지가 자꾸 화제가 되고 있다. 얼른 가방에서 복사해온 군지를 꺼낸다. 그리고 이장에게 보여 준다.

  성수산 남쪽과 서운천 북쪽 사이의 넓은 들판을 예전에는 용골이라 불렀다는 것. 왜 용골이라 불렀는지는 군지에도 나와 있지 않다. 하여튼 지금은 서쪽의 서운군과 동쪽의 진하군으로 나뉘어 있지만, 예전에는 두 군이 하나였다는 것. 일제 때 용골 한가운데로 철도가 생기면서, 서운군을 둘로 나눌 때 산 쪽은 그대로 서운군으로 남고, 들 쪽이 진하군이 되었다는 것. 이때 용골도 둘로 나뉘어 산 쪽의 용골은 서운군 천북면 내룡리가 되고, 들 쪽의 용골은 진하군 신리면 외룡리가 되었다는 것.

  여기까지가 군지에서 읽은 내용이다. 이 내룡리의 서쪽 경계가 실천이고 실천 건너편이 미호리와 운박리이다. 이 실천은 그대로 벌교리의 서운천과 연결된다. 그런데 미호리 운박리 벌교리를 여러 번 다녀 보았지만, 신기정의 자취는 없었다. 이곳 내룡리는 어떨까?

  “정자라고요? 글쎄. 우리 동네에 그런 게 있었나. 외지 생활을 조금 하기는 했어도, 어렸을 때부터 내내 여기서 살았는데.”

  이장이 빼앗듯이 내 손에서 군지를 받아 간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모르고 우리 어머니는 아시려나.”

  체면 불고하고 이장을 따라가 식혜 한잔을 받는다. 이장의 어머니는 이미 허리가 굽었다.

  “어머니, 정자. 그러니까 산이나 개울 옆에다 짓는 조그만 집, 그거 본 적 없냐고요?”

  귀 어두운 어머니를 위해 이장의 말이 점점 높아진다.

  “아니 원두막 말고. 높으신 양반들이 경치 구경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하는데.”

  아, 정자가 민초들에게는 저렇게 정의되는구나. 그렇다면 이 마을에 높으신 양반들이 산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물으면 되려나.

  “웬걸요.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높은 양반들이 들어와 살아요. 지금이야 돼지라도 키우고…….”

  이장의 말에 순간 아차 한다. 내 질문이 실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계속 살았던 당신들은 높으신 양반네들의 자손이 아니라고 확인시키는 것만 같다.

  “약초라도 키우고, 이제는 겨우 사과라고 키우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화전 비슷한 밭뙈기가 전부라. 아래 진하 쪽은 모르겠네요.”

  그런 곳이었는데, 이만큼 살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이장의 얼굴에서 읽힌다. 주위를 돌아보니 고급스러워 보이는 노래방기기가 커다란 그림 아래에 놓여 있다. 이것저것 약초로 담근 술병들과 함께. 이장의 정의대로 하면 여기가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는 정자이리라.

  이번에는 회룡강이 흐르는 성수산을 묻는다.

  “우리 마을이 성수산 자락이기는 해도, 산 바로 아래라 정상은 안 보여요. 미호나 운박 쪽이 산을 보기에는 더 좋지.”

  역시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전에 손상섭에게 했던 질문들을 다시 한다.

  “성수산에 자맥봉, 임수봉, 연화봉이 있다고요? 허, 높지도 않은 산이 새끼들은 여럿 거느렸네. 근데 성수산만 알지. 나머지는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네요.”

  혹 불타산은 아는가? 글쎄, 하던 이장이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가 고개를 젓는다. 그럼 부처산은? 이장이 어머니에 묻고, 어머니가 조물조물하는 대답을 내게 전달한다.

  “저 앞산이 부처산이래요. 아, 맞네. 저 산에 가면 부처를 새긴 돌벽이 있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해요. 나는 못 보았지만.”

  부처산, 아니 불타산을 찾아냈다. 하지만 크게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부처 앞에 암자를 세울지언정, 정자를 세웠을 리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산 이름에 부처가 들어갔다고 강제로 개명되지 않았던가. 내룡리 방문이 헛걸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더 물어본다.

  “회룡강? 여기 강이 없는데. 여름내를 말하는 거라면 지금은 가물어서 다 말라버렸는데요.”

  이장 역시 회룡강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더는 확인할 게 없다.

  “어머니,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함께 한참 걸어 실천에 다다른다. 자갈만 수북하여 여기가 개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실천 건너편 호박벌은 축제 준비를 위한 터 닦기가 한창이다. 저곳에 손상섭도 있을 것이다.

  “저 성수산에서 물줄기가 내려와 이리로 흘러 서운천으로 들어가지요. 우리 마을에서 흐르는 것은 채 300미터도 안 되겠네.”

  다시 성수산을 바라본다. 자맥봉은 조금 보이지만, 임수봉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정자를 세우려면 여기 내룡리보다는 저기 호박벌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뒤로 산을 등지고 옆으로 실천을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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