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36

24. 오정민

24. 오정민 “요즘 많이 바쁘다면서?” 퇴근길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누르면 적막함이 어둠에 잠겨 나를 거역할 뿐이다. 근처 식당에서 요기라도 하고 들어올까 하다가, 김밥집을 들러 오피스텔로 그냥 왔다. 식당에서 혼자 먹는 밥에 대한 서먹함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다만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이 불편하고 성가실 뿐이다. 보통 식당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그 시간. 일없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기도 민망하다. 그래서 달랑달랑 김밥 한 줄을 검은 봉지에 담아 왔다. 혼자 생활하는 오랜 습관이다. 식탁은 이미 책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온기 없는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오피스텔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구로 결혼할 때 산 더블 침대이다. 혼자인 지금, 나..

23. 김영태

23. 김영태 일요일 아침, 신기정가의 번역을 위해 도서관을 작정한다.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탁자 위에 책들과 논문을 인쇄한 흰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다. 책들은 축제 예산으로 주문한 것들이다. 송미영이 축제에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면서,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문하라 했다. 책도 되느냐고 했더니, 안될 것이 없단다. 협의회 명목으로 회식비로 잡아 둔 예산이 있단다. 어차피 지역축제팀은 회식이 없는 팀이다. 일이 끝나자마자 사무실을 떠나기 바빴다. 그걸 돌려쓰죠 뭐. 다 세금인데, 뱃속보다는 머리를 채우는 게 더 아름답겠죠. 송미영이 협의회비의 항과 목을 자료수집비로 바꾸어 주었다. 그렇다고 서점에 들른 것도 아니다. 서운읍에는 큰 서점이 없고 J시의 서점까지 찾아가기에는 번거롭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

22. 가사연구원 연구사 주신호

22. 가사연구원 연구사 주신호 “김영태 선생님이십니까? 가사연구원의 주신호라고 합니다.” 짐작보다는 젊은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나온다. 고수용 씨의 사위인 심우식 교사가 가사를 보냈다는 한국가사연구원에서 온 전화이다.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이메일을 보낸 것이 일주일 전이고, 전화로 연락한 것이 사흘 전이다. 담당자를 알아보겠다고 하여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오늘 연락이 온 것이다. “보내신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신기정가를 문의하셨죠? 찾아보니 미해제 작품이더군요.” 잠시 해제라는 낱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인가? “아, 그 의미는 아니고요. 신기정가를 아직 현대어로 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해제(解題). 해석, 각주 달기. 다른 ..

21. 전임 군수 이석우

21. 전임 군수 이석우 다행히 정 교수로부터 신기정가 전체를 입력한 컴퓨터 파일을 얻을 수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한쪽에 신기정가의 원문이 입력된 파일을 띄어 놓고, 다른 쪽에서 현대어로 바꾸기 시작한다. 愚昧ᄒᆞᆫ 이 人生이 졔 身命 져 몰나셔 妄靈된 어린 마ᄋᆞᆷ 富貴을 求ᄒᆞ려니 어와 虛事로다 世上事 虛事로다 첫 부분부터 따라가며 읽는다. ‘우매한 이 인생이 제 신명’, ‘신명’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대강 목숨이라는 뜻이다. ‘우매’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는 것이니, 첫 줄은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인생이 제가 언제 죽을 줄 몰라서’ 이런 뜻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옮겨 놓으니 원문보다 훨씬 길어진다. 또 노래가 아니라 그냥 줄글이다. 그래서 가사처럼 네 덩이로 다시 써 본다. 어리석고 사리에 ..

20. J대 교수 정일영

20. J대 교수 정일영 “저녁 시간에 보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오늘 저녁에 서울 집에 올라가야 해서요.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겠더라고요.” 서울에 처자식을 두고 내려왔을까, 아니면 혼자 남고 처자식을 올려보냈을까. 그게 그거인가. 주말 부부인지 기러기 아빠인지 알 수 없는 정 교수의 얼굴은 많이 늙었다. 학문 연구의 힘겨움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외로움 때문일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해 본다. 어쩌면 정 교수도 자신보다 더 지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외로움을 내 얼굴에서 발견하고 있을지 모른다. 문득 J시로 들어오며 차창 밖으로 바라보았던 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비록 지방 도시라 하여도 서운군과는 풍경이 달랐다. 아파트들도 제법 높고, 번화한 상가도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섰다. 서운군의 하루 차량 통행량을 ..

19. 축제팀 천승남

19. 축제팀 천승남 지금쯤 신기정들은 지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완결된 몸이 아니라 머리와 몸과 다리가 각각 나뉜 채로 남태전통건축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로 합체될 날을 기다리며 공장의 패널 벽을 자궁으로 삼아 세상에 던져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가 형이 될지 아우가 될지도 모르는 세쌍둥이들의 출산예정일은 이제 4주 남았다. 현경숙의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에 울린다. 정자들은 현경숙의 막내보다 사흘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다. 온종일 오다 말다를 계속할 거라고 했다. 축제 현장에 나갔던 팀원들이 모두 사무실로 철수해 있다. 다들 자기 책상 위에서 머리를 들지 않는다. 호박 축제는 호박벌에 있고, 신기정은 남태군에 있는데, 그것들의 존재를..

18. 남태전통건축 대표 원만호

18. 남태전통건축 대표 원만호 신기정가에 나오는 신기정이 있었던 위치는 결국 특정되지 않았다. 신기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신기정가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신기정은 세워져야 했다. 덧붙여 신기정가의 가사비까지. 신기정가라는 가사에서 출발하여, 신기정이라는 정자를 거쳐, 신기정가를 새겨 넣어야 하는 가사비에까지 이르렀다. 오롯이 내 몫으로 남은 일들이다. 몇 번의 회의 끝에 결국 신기정은 축제가 열리는 호박벌에 세우기로 하였다.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자까지 볼 수 있게 하자던 군수의 애초 희망이 실현된 결과이다. 정자가 세워질 위치를 정하고, 터를 닦는 일은 손상섭이 맡기로 했다. 딱히 할 일 없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공익 요원에게 정자를 세울 만한 업체 검색을 맡긴 것이 그제였고, 몇 ..

17. 문화관광과장 한혁수

17. 문화관광과장 한혁수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작년 같았으면 연휴도 즐겁고, 효도휴가비도 즐거운 추석이었을 터인데, 이거 호박 축제 때문에 올해는 추석이 추석이 아닙니다.” 문화관광과 한혁수 과장의 인사말을 들으며 군청 대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본다. 군청의 과장급 이상은 모두 모인 것 같다. 축제가 열리는 천북면, 천남면의 면장을 비롯한 면 직원들이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장인 듯한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백여 석의 좌석은 이미 다 채워졌고, 뒤쪽으로 간이 의자까지 채웠다. 대회의실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인 경우는 새 군수의 취임식 이후 처음이다. 마이크를 잡은 한 과장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이 익숙하지 않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인정하..

16. 교사 심우식

16. 교사 심우식 “예, 제 장인어른입니다.” J시의 신개발지구 안에 들어앉은 한 초등학교 옆 카페에서 심 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정 교수에게 신기정가를 들고 왔던, 가사 원소유자의 사위이다. 심 교사를 만나기까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제 서운문화에 실린 정일영 교수의 논문인 ‘새로 발견된 신기정가에 대하여’를 다시 차근차근 읽었었다. 그때 새로운 지명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논문 첫 페이지 아래의 각주에 신기정가의 소장자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2)서운군 천남면 다락리 고수용(78)씨 소장’. 천남면 다락리라. 내게 가사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사를 썼던 정자, 또는 정자가 세워졌던 장소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간 정 교수의 논문을 꼼꼼하게 읽지 않았던 이유였다. 논..

15. 문화원장 최현

15. 문화원장 최현 딸깍. 박민구가 군수실로 잠시 올라오라는 메시지를 담은 창을 보냈다. 나만? 짧게 답신했더니, 팀장은 와 있어요, 한다. 보니 옆의 팀장 자리가 비어 있다. 군수인지 박민구인지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101호로 불러올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때로는 중간에 있는 과장을 생략하고 팀장이나 팀원들을 직원 불러올려 업무를 챙김으로써, 조직에 익숙한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메시지로 부른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송미영의 펌킨 클라우드 페스티벌 사건도 그랬다. 나도 뭔가 군수에게 한 마디 던질 말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선다. 하지만 던질 말이 있어도 못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을 때가 더 많았다. 노크 없이 101호 기획실에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