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1. 전임 군수 이석우

New-Mountain(새뫼) 2023. 6. 14. 12:36
728x90

21. 전임 군수 이석우

 

  다행히 정 교수로부터 신기정가 전체를 입력한 컴퓨터 파일을 얻을 수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한쪽에 신기정가의 원문이 입력된 파일을 띄어 놓고, 다른 쪽에서 현대어로 바꾸기 시작한다.

 

     愚昧ᄒᆞᆫ 이 人生이 졔 身命 져 몰나셔

     妄靈된 어린 마ᄋᆞᆷ 富貴을 求ᄒᆞ려니

     어와 虛事로다 世上事 虛事로다

 

  첫 부분부터 따라가며 읽는다. ‘우매한 이 인생이 제 신명’, ‘신명’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대강 목숨이라는 뜻이다. ‘우매’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는 것이니, 첫 줄은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인생이 제가 언제 죽을 줄 몰라서’ 이런 뜻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옮겨 놓으니 원문보다 훨씬 길어진다. 또 노래가 아니라 그냥 줄글이다. 그래서 가사처럼 네 덩이로 다시 써 본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이 인생이

     제가 죽을 날이 언제이기 모르기에

 

  비록 첫 줄이지만 그럭저럭 옮기는데 성공한다. 다행히 내가 쓴 대로 그대로 읽히기는 한다. 하지만 원문의 두 배 길이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신기정가가 얼마나 더 길어질지 모를 일이다. 갑자기 막막해진다. 키보드를 밀쳐두고 의자를 뒤로 젖혀 길게 기댄다.

 

     功名은 아니 오고 白髮兩鬂 ᄲᅮᆫ이러니

     知天命 되온 後애 ᄂᆡ 身命 ᄂᆡ 알리라

 

  ‘공명은 오지 않고 머리와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니, 나이 오십이 된 후에 내 팔자를 내가 알겠다.’는 말이다. 이 말에 숨어 있는 인과는 무엇일까. ‘공명이 오지 않아서 머리가 허옇게 되어 버렸다. 그게 내 운명이다.’ 아니면, ‘머리가 허옇게 된 후라야 공명을 맞을 수 없는 내 운명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공명을 맞을 수 없는 내 운명을 깨닫게 되면서 갑자기 머리가 허옇게 되어 버렸다.’ 이 중에 어떤 것이 산중처사의 마음일까.

  읽을 수 있다고 하여 이해된다고는 할 수 없다. 글자들이 모여 전체 글을 이루고는 있지만, 모두 다 제각각이어서 허공에 떠 있다. 글자가 모여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 문장이 되며, 문장들이 모여 신기정가가 되어야 하겠지만, 내 신기정가는 아직 낱낱의 글자일 뿐이다. 새 말이 나올 때마다 컴퓨터 화면에 이런저런 사전을 띄워두고 뜻을 찾아가고는 있으나, 글자는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한 행, 한 행 따라가며 뜻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근본적인 의문들이 무리를 지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산중처사는 신기정가에서 무엇을 쓰려고 했던 것인가. 산중처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글을 쓰면서도 숨기고 싶었던 것은 없었을까. 숨기려는 척하다가 은근히 드러내려 했던 의미는 없었을까. 그렇게 행의 순서에 따라 산중처사의 의식이 흘러가는 것인가. 혹 행과 행 사이에서 작가인 산중처사 몰래 신기정이 스스로 숨어 버린 것은 없을까.

  제기랄, 돌아버리겠네, 그게 그거지. 마우스를 밀쳐버리며 외쳤는데, 속엣말이 그대로 겉말로 튀어나와 버린다. 혹 들은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돌아본다. 팀원들은 모두 현장에 나가 있다. 현경숙만 자리를 지키며 문서와 씨름하고 뿐이다. 여전히 현경숙의 타자 소리가 경쾌하다. 키보드의 두드림을 들어본다. 타닥타닥, 타다닥타닥.

  현경숙은 따로 기계식 키보드를 구입해서 쓰고 있다. 언젠가 손상섭이 현경숙의 타이핑 소리에 너스레를 떤 적이 있었다. 경숙 씨 타이핑 소리를 들으면 음악을 듣는 것 같아요. 옷을 벗어버리고 무대 위에 올라가고 싶어져요. 모든 시선이 몰리자 순간 손상섭은 크게 당황한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오해 마세요. 보디빌딩을 하고 싶다는 얘기에요. 자유 포즈 할 때 음악이 나오거든요. 요즘 바빠서 한동안 운동을 못 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그만. 절대 이상한 말 아닙니다.

  현경숙이 방긋이 웃었다. 제가 좀 시끄럽죠. 일 많이 한다고 과시하려는 건 아닌데. 다른 엄마들은 뱃속의 아가에게 태교로 음악도 들려주는데, 나는 그걸 못하니까. 그래서 음악처럼 박자에 맞추어 쳐 보려고요. 근데 음악처럼 들렸다면 성공한 거네요. 또 음악이 아니더라도 뱃속에서 아가가, 우리 엄마 일 열심히 하고 있네, 그렇게 생각하겠죠.

  지금도 현경숙은 음악처럼 일하고 있다. 아는 음악이 별로 없으니까 저 소리가 어떤 음악에 비유될지 알기 어렵다. 예전에 정민의 휴대전화 통화음이 젓가락 행진곡이었는데, 그것과 비슷한가. 늘어놓았던 글들을 박자에 맞추어 줄여본다. 줄이고 더 줄인다.

 

     공명은 아니 오고 흰머리 뿐이러니

     지천명 되온 후에 내 팔자 내 알리라.

 

  산중처사가 애초 의도했던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래가 된다. 다만 처음부터 흰머리를 운운하는 노래가 되는 게 안되었다. 문득 허기가 몰려온다.

  경숙 씨 점심은요? 잘 안 들리는 모양이다. 경숙 씨 점심은요? 재차 목소리를 높이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도시락 가방을 들어 올린다. 드시고 오세요.

  그럼 다녀올게요. 혼자 먹어야 할 것 같다. 밥집 할미네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늦은 점심이다.

  밥집 할미네 앞, 사랑터에는 이미 점심을 마친 듯 서너 명이 둥글게 앉거나 서서 식사 후의 담배를 즐기고 있다.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아는 이도 있고, 얼굴은 기억에 있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도 있다. 아예 처음 보는 듯한 얼굴도 있어 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려 하지만, 그나마도 뒤집혀 있다.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 밥집으로 들어선다. 아직도 한 테이블에서는 식사 중이다. 빈 테이블에 앉으려니까 그 테이블에서 손짓한다. 옛 축산과 동료가 한 사람 끼어 있다. 거기에 앉아 김치찌개를 먹는다. 시작이 늦었으니 끝이 늦다. 옛 동료가 일어서며 어깨를 툭 친다. 다 먹고 사랑채로 와.

  사랑채로 나서니 같은 탁자에 있었던 이들이 그대로 옮겨와 있다. 그런데 밥집에는 없었던 사람이 하나 더 늘어 있다. 한 켠에 전임 군수가 서 있다. 군수는 서고, 직원은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다. 불과 반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 할 일이겠지만, 지금의 여기 분위기는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이런 장면이 오늘 처음 연출된 것이 아닌 듯하다.

  “가만, 누구시더라.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나네. 떠나니까 가물가물해지네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가 그대로 잠시 멈추었다가 그대로 집어넣는다. 그런데 그 동작이 꽤나 길다. 꺼내 권하는 척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는 아쉬움까지 보여 주려는 것 같다.

  “담배 한 개비 드리고 싶은데, 그것도 괜한 오해가 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나나 여러분이나 인제 그만 끊을 때도 됐어요.”

  그러면서 자기 신경 쓰지 말고 피우라고 손짓을 한다. 여전히 군수님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전임일 뿐이다. 당연히 재선될 줄 알았던 전임 군수. 공무원으로서의 경험과 지역 국회의원과의 친분과 지역에서의 소속 정당의 영향력, 그리고 학연과 혈연으로 연결된 끈끈한 조직력. 당선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금력의 부족과 서울에서 불기 시작한 새 정당의 바람 때문에, 아슬아슬한 차이로 현 군수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마땅히 담배 피울 데도 없어요. 이번 기회에 끊든지 해야 하는데.”

  전임 군수의 선거 후 사정은 천승남에게 들은 바가 있다. 수요일 선거, 목요일 새벽 낙선 확인. 그리고 다음 월요일부터 군수는 시외버스 정류장에 다시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였다. 실버봉사단이라는 어깨끈을 두르고 정류장의 쓰레기를 치웠다.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는 하였지만, 손은 잡지 않았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운군의 여기저기를 오가며 쓰레기봉투를 채우러 다녔다.

  “뭐, 우리 군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이것밖에 없어요. 운동도 되고 좋아요. 담배를 끊으면 더 좋겠지만.”

  힘드시지 않으냐는 누군가의 말에 군수는 불붙은 담배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하지만 담배를 입에 가져가지는 않는다. 사랑채에 나온 지 5분이 넘었지만, 군수가 담배를 문 것은 채 두 번이 되지 않는다.

  “아, 이제 이름이 생각났네. 김영태 주무관. 축산과 방역계에 계셨죠?”

  생각해 보니 군수는 내가 밥집에서 나올 때부터 내 가슴에 매달린 명찰을 보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군수의 기억력이야 예전부터 소문났다. 숫자 하나 사람 이름 하나 놓치는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명찰을 들여다본 것은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말을 이어가기 위해 거꾸로 기억력의 부족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때 옛 동료가, 김영태 씨 문화관광과 축제팀으로 파견 갔어요, 덧붙인다.

  “맞아. 들은 것도 같네요. 요즈음 문화관광과에서 정자를 세우고 가사비를 만드신다고. 아마 김 주무관님 국문과를 나오셨죠? 모처럼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셨네요.”

  이미 다 알고 있다. 지금 군청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으려 조심한다. 그러면서도 알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려 한다.

  “군청에서 나올 때, 내가 시작했던 사업들이 다 캔슬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새 군수님이 그대로 이어 하시는 게 많아요. 참 고마운 일이네요. 더구나 호박 축제에 정자를 짓고 가사비를 세우는 건 누가 봐도 아니다 싶은 아이템인데.”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 섣부른 말대답은 위험하다. 하긴 대꾸할 생각도 없었지만.

  “관람객들이 얼마나 호응할지는 모르겠어요. 하기야 호응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이런 새로운 시도들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새 군수님의 치적이 되겠죠.”

  말들이 모이고는 있지만 모두 허공에 떠 있다. 군수가 허공에 뿌려둔 말들에서 뭔가 맥락을 찾으려다 보니 나조차 허공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부디 축제가 성공적으로 잘 끝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이 일을 처음 시작했던 나도 보람을 갖게 되는 거고, 우리 서운군도 발전의 계기를 얻게 되겠죠. 할미가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아무리 잘 끓여도 새로운 메뉴가 없으면 뒤처지는 겁니다. 아무리 기본적인 군정을 잘해도 뭔가 눈을 끄는 게 있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호박으로 축제를 만들었던 겁니다.”

  말이 길어질 것 같다. 아무리 식사 후 휴식 시간이지만 전임 군수와의 담소는 시각에 따라 위험해 보일 수 있다. 더군다나 군청이 코앞 아닌가.

  몇몇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기 시작한다.

  “아, 바쁜 분들 시간을 빼앗았네. 그래요. 오후 일 보셔야죠.”

  나도 자리를 떠나려 꾸벅 목례를 한다. 그때 군수가 나를 부른다.

  “김 주무관님. 축제 준비하시다가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우리 군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데, 도울 일이 있으면 최대한 제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죠.”

  그러면서 명함을 한 장 내민다.

 

     이석우. 서운군 실버봉사단 기획총무. 서운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문득 신기정가의 맨 뒷부분이 떠오른다.

 

     허허허 이ᄂᆡ 生涯 丁寧이 이러ᄒᆞ네

 

 

 

728x90

'자작시와 자작소설 > 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 김영태  (3) 2023.06.18
22. 가사연구원 연구사 주신호  (2) 2023.06.16
20. J대 교수 정일영  (0) 2022.09.09
19. 축제팀 천승남  (0) 20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