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3. 김영태

New-Mountain(새뫼) 2023. 6. 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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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김영태

 

  일요일 아침, 신기정가의 번역을 위해 도서관을 작정한다.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탁자 위에 책들과 논문을 인쇄한 흰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다. 책들은 축제 예산으로 주문한 것들이다. 송미영이 축제에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면서,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문하라 했다. 책도 되느냐고 했더니, 안될 것이 없단다. 협의회 명목으로 회식비로 잡아 둔 예산이 있단다. 어차피 지역축제팀은 회식이 없는 팀이다. 일이 끝나자마자 사무실을 떠나기 바빴다. 그걸 돌려쓰죠 뭐. 다 세금인데, 뱃속보다는 머리를 채우는 게 더 아름답겠죠. 송미영이 협의회비의 항과 목을 자료수집비로 바꾸어 주었다.

  그렇다고 서점에 들른 것도 아니다. 서운읍에는 큰 서점이 없고 J시의 서점까지 찾아가기에는 번거롭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여 책을 찾아보았다. 가사와 관련된 것, 주 연구사가 신기정가가 1800년 이전 가사라 했으니까, 18세기 가사, 17세기 가사, 정자에서 쓴 가사니까 누정 문학, 강호 문학. 작자가 산중처사라 했으니까 은일 가사, 등등. 제목이 그럴듯하면 그냥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렇게 담은 것이 대략 20권 정도. 금액도 거의 50만 원에 가까웠다. 배달된 책들이 책상 위에 쌓이자, 송미영이 지나가며 한마디 하였다. 거하게 드셨네요.

  거기에다 공익 요원에게 주문한 책 제목과 비슷한 논문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검색하여 프린트해 온 것만 역시 20여 편에 400페이지가 넘는다. 죽 훑어보니 신기정가에 관련된 논문은 빠져 있다. 없는 것이다. 그 논문들 역시 책상 위에 쌓이자, 이번에는 천승남이 한마디 하였다. 그 교수를 지도교수로 해서 이제 박사 논문만 쓰면 되겠네. 거기에 어제 정 교수가 막 출간된 책을 한 권 더 보내왔다. ‘일반인을 위한 고전문학의 이해’

  배달되는 대로, 인쇄되는 대로 가져다가 오피스텔 식탁 위에 쌓았는데, 이제는 세 줄로 쌓아도 넘어질 만큼 그 높이가 상당하다. 하지만 읽은 책이나 논문은 없다.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책을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없다. 내 오피스텔에 오는 사람도 없으니까 소유의 과시도 안 된다. 책과 논문에 담긴 글자들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만으로도 그냥 부담일 뿐이다. 차라리 저 책들 대신에 피자나 통닭을 쌓았다면 적어도 사무실의 공익 요원은 흐뭇하게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며칠을 방치하다가, 송미영이나 공익 요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 한 권을 펼쳐 읽어 보았다. 그런데 그들과는 관계없는 정 교수의 책이다. 책은 들었지만, 첫 챕터를 읽다가 그냥 던져 버렸다. 일반인을 위한 책이라고 했는데, 이해가 어렵다. 나는 정 교수가 설정한 일반인의 부류에는 속하지 않았다.

  식탁 위에 책들이 가득하기에, 식탁 위에서 작업하기 힘들다. 도서관을 생각하게 된 이유이다. 그러면 이것들 중에 나와 함께 갈 녀석은 어떤 것일까. 제대로 읽어 본 것이 없으니, 선택할 수 없다. 신기정가를 이해하기 위한 책이나 논문이 어떤 것인지, 제목만 보고 알 만큼 내 지식이 깊거나 넓지 않다. 세상의 지식은 저렇게 넘쳐나는데, 정작 나를 위한 지식은 없다.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데, 나는 그들과 다른 영역에서 살고 있다. 지식을 쉽게 검색하는 방법은 날로 늘어가는데, 쉽게 검색되는 지식을 이용할 줄 모른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고민하던 라면 상자 두 개. 열까 말까 고민하다가 열어보기로 한다. 거기에도 책들이 가득할 것이다. 새 지식이 아니라 낡은 지식이 담긴 책들이다. 오피스텔로 배달된 지 1년이 넘어서 처음 열리는 것이다. 상자 하나에는 전공책이라 쓰여 있고, 다른 상자에는 공무원책이라 쓰여 있다. 작은누이의 글씨다.

  혼자 지내던 어머니에게 치매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번갈아 어머니를 둘러보던 누이들이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했다. 이혼한 처지라 주장할 수 있는 염치가 없어 누이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어머니가 살던 집을 세 놓고, 거기서 나오는 월세로 요양원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작은누이가 짐을 치웠다. 그리고 집의 한구석에 남아 있는 내 옛 책들을 라면 상자에 담아 택배로 보냈다. 그냥 버리지 왜 보냈어? 버리더라도 영태 니가 버려. 퉁명한 소리를 들었다.

  두 상자 중 전공책이라고 쓰인 상자를 열어본다. 훅하고 책 먼지 냄새가 올라온다. 일렬로 세워 한 눈에도 책 제목을 알 수 있게 했다. 꼼꼼한 작은누이의 솜씨다. 보이는 대로 책 제목들을 스캔해 간다. 문학개론, 국문학사, 국어문법론, 고전시가 연구, 의미론, 현대소설론 등등. 이 책들을 통해 내가 대학에서 전공한 학과에 대한 정체성이 확인된다. 하지만 정체성을 확실하게 떠올리게 해 줄 책 속에 담긴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거나 한 권을 꺼내 펴 본다. 짐작한 대로 깨끗하다. 그래도 이런 전공 도서들을 산 것이 신기하고, 버리지 않은 게 기특하다. 그 책을 던져두고 다른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의미 없이 후루룩 넘겨 본다. 툭 하고 사진 한 장이 떨어진다. 한 오십 명쯤이 찍힌 사진이다. 아래에 조악한 글씨로 사진의 촬영이유를 밝혀 두었다. J대학교 국어국문학과 S지역 방언 답사 기념. 199x년 xx월 xx일. 대학교 1학년 때다.

  맨 앞줄 사람들이 앉고, 그다음 줄 사람들은 엉거주춤 굽히고 서 있으며, 맨 뒷줄은 서 있다. 사진 속에서 나를 찾아본다. 여러 사람과 찍은 사진에서 나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맨 뒷줄 맨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안으로 한 칸 들어온 자리. 거기가 내 자리이다. 앞이나 가운데서 나를 드러내기 싫고, 맨 끝자리는 튀니까 한 칸 들어온 자리. 어머니 칠순 잔치 때도 그 자리에서 서려다가 누이들에게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앞줄 가운데서 찍은 사진도 있기는 하다. 결혼식 사진과 민서 돌잔치 때.

  하지만 이 사진은 내가 앞줄에 앉아 있는 드문 물건이다. 새내기 때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줄에서도 맨 왼쪽의 한 칸 안쪽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분명 스물 몇 해 전의 내 모습이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로 찾아갔을 것이다.

  워낙 멀리서 많은 사람을 다 담았기에 자세한 내 얼굴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의 내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때 마지못해 선택했던 학과. 그 불만이 고스란히 표정에 담겨 있을 것이다. 지금도 마지못해 하고 있는 일들. 그때도 나였고, 지금도 나이다. 그때의 김영태로 지금도 살고 있다. 열어볼 필요도 없는 공무원책 상자 속에 갇힌 채로.

  사진을 다시 책에 끼워 넣고 책을 상자에 끼워 넣으려다가 상자 귀퉁이에서 사전 한 권을 발견한다. 고어 사전. 이 책을 소장하게 된 기억이 날 듯하다. 2학년 때 고전문법 담당 교수가 사전을 편찬했다고 강의실 앞에 쌓아 놓고 한 권씩 가져가라 했다. 다들 아무 생각 없이 가져갔는데, 다음날 4학년 학과 대표를 통해 책값을 내라고 했다. 보통 전공 책의 두 배가 넘는 책값에 다들 혀를 내둘렀으나, 결국은 낼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내지 않고 버티다가, 기어이 4학년 학과 대표에게 한 소리 듣고 마지막으로 책값을 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나였다.

  픽 웃으며, 넘겨 본다. 책 먼지 냄새의 근원이 여기였다. 어둑한 방인데도 먼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사전을 열어 본다. 어둑한 조명 탓인가, 글자가 너무 작은 탓인가. 글자들이 가물가물하다. 혹 노안인가. 사전을 등 아래로 들고 온다. 고어와 고어의 용례가 한 줄로 서 있다. 사진 속의 사람들처럼. 여기에서 나는 어디쯤 있을까.

  아무 페이지나 펴고 맨 윗줄에서 바로 아래의 낱말을 찾아본다.

  ᄭᆡ다. 깨다. 깨어나다

  아, 신기정가에, ‘黃粱이 다 닉을 졔 긴 잠의셔 ᄭᆡ다라니’ 해서 잠에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며 갸웃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라고 하면 틀린 표현이 아니다. 아니 정확한 표현이 된다. 툭툭 먼지를 털어내고 가방에 넣어 둔다. 오늘 제일 많이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해야 하나. 그런데, 이 사전을 강매했던 교수나 강좌명은 이미 기억에 없다. 당연히 강의 내용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났을까, 여전히 잠들어 있는 상태인가.

  옛일이라고 모두 기억되는 것은 아니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도 뒷날까지 기억되지도 않아도 되는 것처럼, 지금 기억하려고 하는 것들이 뒷날까지도 가치가 유지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감에 대하여

 

     잠시 쉬다 가려하고

     잠시 머물렀다가

     하루 또 하루

     더 머물렀다가 가는 길에

 

     어디로 가려 했는지를

     잊어버렸거나

     머물고 있는 곳이

     애초 가려는 곳이었거나

 

     잠시 머물다 가려하고

     잠시 쉬었다가

     어제 또 오늘

     더 쉬었다가 머무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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