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가사연구원 연구사 주신호
“김영태 선생님이십니까? 가사연구원의 주신호라고 합니다.”
짐작보다는 젊은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나온다. 고수용 씨의 사위인 심우식 교사가 가사를 보냈다는 한국가사연구원에서 온 전화이다.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이메일을 보낸 것이 일주일 전이고, 전화로 연락한 것이 사흘 전이다. 담당자를 알아보겠다고 하여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오늘 연락이 온 것이다.
“보내신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신기정가를 문의하셨죠? 찾아보니 미해제 작품이더군요.”
잠시 해제라는 낱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인가?
“아, 그 의미는 아니고요. 신기정가를 아직 현대어로 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해제(解題). 해석, 각주 달기. 다른 작품들은 해제하였지만, 신기정가는 해제하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신기정가만 해제가 안 된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아직 미해제된 것은 아니고요. 저희 연구원에 작품을 연구할 인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연구사가 세 명인데, 연구원에 의뢰된 모든 가사를 연구하기에는 좀 벅찹니다.”
그래도 2년이나 되지 않았던가?
“말씀드린 것처럼 연구 인력에 비해 연구해야 할 가사가 많습니다. 가사라고 하면 오래된 글로만 생각하시는데, 최근 작품들도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뿐 아니라, 70년대 80년대까지 내려온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가사가 대중화되고 현대화된 문학 갈래였나? 무늬뿐인 국문학과 졸업생인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흔히 가사라고 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송강의 관동별곡만 생각하시는데,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 때 의병들이 쓴 가사도 있고,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포교 목적으로 쓴 가사도 있습니다. 일부 문중에서는 족보를 가사로 만들기도 하고요. 개화기 때 많이 불렸던 창가와 구분되지 않는 가사도 많습니다. 그런 많은 가사가 저희 연구원으로 오다 보니…….”
가사를 보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집에서 우연히 발견하거나 고서적을 판매하는 데서 구입해 가사를 소장하게 되었는데, 어떤 내용인지 모르니까 궁금하시겠죠. 대부분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쓰여졌고, 표기도 고어나 한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사람들은 아예 글자 자체를 읽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분들은 금전적인 가치가 얼마나 되나 확인하고 싶으셔서 원본을 보내거나 복사본을 보내기도 합니다.”
신기정이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치가 높지 않다는 것인가? 내가 말한 가치란 말을 연구사는 문학적인 가치와 금전적인 가치 중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까 궁금해진다.
“그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희의 역량 문제입니다. 다만, 여기 오는 가사들 중에서 연구 가치가 높은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게 더 많습니다. 이미 알려진 가사를 필사한 이본들도 있고,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옮겨온 가사도 있습니다. 제가 아직 공부를 마친 것은 아니지만, 잠시 훑어보면 그런 것들이 보이는 편입니다.”
신기정가도 그러한 작품인가?
“그 작품에 대해서는 J대학교 정 선생님께서 이미 소개하셨더라고요. 아마 따로 해제하지 않았던 게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제가 본격적으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를 말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연구원에서 잠시라도 훑어보지는 않았는가?
“그 작품이 우리 연구원에 온 뒤에 처음 살펴보았던 연구사는 지금 대학으로 옮겨 갔습니다. 저는 김 선생님이 보내신 메일을 받고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잠시 훑어본 정도이지만은요.”
그래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복사본은 아닙니다. 살펴보니까, 꽤 오래된 작품입니다.”
얼마나?
“표기라든지, 종이 지질 등을 보면 1800년대 이전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모르니까 정확한 연대는 모르겠습니다. 내용은 정 선생님께서 쓴 논문에서 더 부연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정 교수의 연구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 읽힌다. 그러면 가사 속의 신기정은 어디에 있는지 혹 알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도움을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서운군과 진하군 일대이고, 남태군의 지명도 일부 보이는데, 제가 그쪽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요.”
문득 이 연구사는 신기정가를 간단하게 훑어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독특한 작품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비유적인 표현도 많은 것 같고, 제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자세히 살펴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제 역량이 부족합니다. 죄송합니다.”
또 하나 알고 싶은 것이 있다. 신기정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알기 어려워도, 신기정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정보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있는 정자들은 대부분 최근에 세운 것들입니다. 무너지고 불타고 한 것들을 복원한 것이지요. 그래서 모양들이 대부분 비슷합니다.”
신기정을 물었는데, 다른 정자들로 대답한다. 그러면 신기정도 모양이 비슷한 대부분의 정자 중의 하나인가?
“저는 가사가 쓰인 배경이나 상황, 내용이나 표현, 작가 등을 살펴보는 연구원의 연구사입니다. 실제 정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제가 관심을 두는 분야가 아닙니다. 문화재를 연구하는 분이나 건축하시는 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그러면 서운호박제와 신기정가와 신기정이 어울릴 만한가?
“그거야 축제를 준비하시는 분들이나, 축제에 오시는 분들이 어울린다고 느끼면 그런 것이겠지요.”
연구사에게도 끝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다.
“저도 한번 축제에 가 보고 싶습니다. 성수산이 보고 싶고, 지금 세우신다는 신기정도 보고 싶습니다.”
네, 환영하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다. 그런데 끊고 나서 통화내용을 복기해 보니까, 주 연구사는 성수산이라고 말했다. 가사 어디에도 성수산이란 지명은 없었다. 지도를 보고 추정한 것인가.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전화가 울린다. 아까 그 전화번호이다.
“연구원 주신호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기가 복잡해서 메일로 보냈습니다. 연구하시는 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끊고 메일을 연다.
‘김영태 선생님께. J대학교 정 선생님께서 쓰신 논문을 찾아 읽어 보고,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신기정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 메일을 드립니다.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신기정가의 맨 뒤에 시조가 한 편 붙어 있습니다. 첨부한 파일 중 네 번째 그림 파일입니다. 그런데 정 선생님의 연구에서는 그 시조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사만을 연구하시려고 시조를 빼신 것인지, 아니면 시조의 존재를 모르셨던 것인지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선생님께서 신기정가를 연구하시는데 더 번거롭게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선생님의 연구와 서운군의 축제가 큰 성과를 거두고 끝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주신호 드림.’
메일에 사진 넉 장이 첨부되어 있다. 처음 석 장은 내가 갖고 있는 신기정가의 복사본과 같다. 첫 번째 장은, ‘新記亭歌 山中處士 신긔졍가 산듕쳐ᄉᆞ, 愚昧ᄒᆞᆫ 이 人生이 졔 身命 져 몰나셔’로 시작하여, ‘紫陌峰ᄋᆞᆫ 뎌긔 잇고 林秀峰ᄂᆞᆫ 알픠 뵌다’로 끝나고 있고, 두 번째 장은, ‘뒤흐로 煙火峰서 淸風이 건ᄃᆞᆺ 불어’로 시작하여, ‘明心ᄒᆞ여 達觀ᄒᆞ니 曠劫이 須臾로다’가 끝이다. 세 번째 장은, ‘佛陀山 回龍江이 쳘쳘이 졀로 나니’로 시작하였고, 맨 뒤에다가 ‘後 신긔셩가, 산듕쳐ᄌᆞ’를 부기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보는 네 번째 사진에는
草露ᄂᆞᆫ 맷친 곳의 梅花ᄂᆞᆫ 픠여 잇고
暮雲의 어릔 곳의 白鶴이 츔추노라
별별은 나무 우희 빗ᄂᆞ니 어ᄂᆡ 거시 ᄂᆡ 쳐ᄌᆞ고
이렇게 적혀 있다. 짧다. 그저 읽다 보니 형식이 낯이 익다. 글자 수를 헤아려 보니 전형적인 시조이다. 신기정가의 끄트머리에 이 시조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정 교수는 논문을 쓰면서 왜 이 시조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뺀 것일까, 못 본 것일까.
그러다가 사진에서 눈에 뜨이는 무엇인가를 이제야 발견한다.
첫 번째 장에서는 제목과 작가 이름을 한자로 쓰고 그 옆에 한글로 덧붙여 썼는데, 세 번째 장에는 그저 한글로만 적었다. 왜 다를까. 의미 있는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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