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오정민
“요즘 많이 바쁘다면서?”
퇴근길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누르면 적막함이 어둠에 잠겨 나를 거역할 뿐이다. 근처 식당에서 요기라도 하고 들어올까 하다가, 김밥집을 들러 오피스텔로 그냥 왔다. 식당에서 혼자 먹는 밥에 대한 서먹함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다만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이 불편하고 성가실 뿐이다. 보통 식당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그 시간. 일없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기도 민망하다. 그래서 달랑달랑 김밥 한 줄을 검은 봉지에 담아 왔다. 혼자 생활하는 오랜 습관이다.
식탁은 이미 책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온기 없는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오피스텔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구로 결혼할 때 산 더블 침대이다. 혼자인 지금, 나는 그 넓이를 감당할 수 없다. 매트리스 곳곳에 남아 있던 정민의 체취는 사라진 지 한참 되었다. 버리지 못해 저 자리에 둔 것이고, 저 자리에 습관처럼 놓여 있다.
그 침대의 귀퉁이에 앉아 김밥을 욱여넣는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열어본다. 이런저런 문자들이 오피스텔에 쌓여 가는 먼지처럼 쌓여 있다.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지워간다. 공적인 것, 사적인 것. 공적인지 사적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 카드 사용 내역이 제일 많고, 오피스텔 관리비 재촉도 몇 건 있었고, 세탁물을 찾아가라고 한다. 그러다가.
낯익지만 낯선 이름이 하나 올라와 있다. 오정민. 예전에는 휴대전화에 이름을 뭐라고 등록했던가. 처음 사귈 때는 민,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는 그네, 막 결혼한 후에는 여보야, 아이 낳고 습관처럼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와이프, 그리고 이혼한 다음에는 민서 엄마. 지금은 공적인 이름 오정민 석 자로 저장되어 있다.
오정민에게 온 문자는 간단하다. 통화 좀 할까. 이 다섯 자의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김밥 한 줄을 천천히 씹어 먹는다. 오랫동안 김밥을 다 먹고, 오랫동안 양치질을 한다. 양치질하다가, 키스할 것도 아닌데, 하며 혼자 픽 웃는다. 그리고 신호를 보낸다.
“지난 주말에 수연이 만났어. 수연이가 민서 아빠 얘기를 하더라. 묻지도 않았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지난 주말이면 민서와 함께 있던 때다. 영화를 보고, 돈가스를 먹고, 무선 이어폰을 사 주었다. 그때 정민은 민 팀장과 있었다.
“수연이와 둘만 있었던 건 아니고, 다른 친구들 몇몇이 있었는데, 모임 끝나고 둘이 남아 커피 한잔 나누다가 그냥 민서 아빠가 얘기가 나왔어.”
의도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민 팀장이 옛 아내의 친구라는 것을 밝힌 다음에도, 민 팀장과 나는 우리 둘에게 사적인 공통분모인 오정민을 화제에 올린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민 팀장과 오정민은 자신들의 최소공배수로 나를 올린 것이다.
“웃기더라고.”
무엇 때문에 웃었을까. 내가 화제가 되어 둘이 웃게 되었을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듣고서, 아니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듣고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옴을 느낀다.
“외부에서 보내는 화환도 군청에서 준비하나 봐. 수연이가 화환 몇 개 주문해 주더라. 군청 카드로.”
얼마 전에 들은 것이 있다. 서운호박제를 개막할 때, 입구에 세워둘 축하 화환이 적으면 민망하다고. 그러니 군청 예산으로라도 몇 개 더 준비하자던 박민구의 제안. 물론 화환에 붙는 리본에는 군청과는 관계없는 다른 단체나 기업의 이름이 적힐 것이다. 신기정가를 짓는데 협찬했다는 군수실에 있던 실업가들의 이름도 적힐 것이다. 그때 팀장은 말도 안 될 일이라고 픽 웃고 말았지만, 결국 일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나 보다.
오정민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던지지만 내가 묻는 것은 거의 없다. 축제 이야기가 많다. 축제라면 나보다는 팀장에게 더 많이 들었을 터이다. 축제에 대한 화제가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에 대한, 정민에 대한,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일은 힘들지 않느냐, 밥은 잘 먹냐, 민서 할머니, 외할머니 건강은 어떠시냐. 이런 얘기도 없다.
잠시 침묵. 그러다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들이 통화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던져진다.
“하늘이 높더라. 벌써 가을인가 봐. 요즘 꽃들은 화려하기는 한데 금방 시들어. 어제는 블로그 한다는 사람이 와서 이것저것 사진 찍더라고. 꽃값을 깎아달라는 눈치였는데…….”
이런 얘기들은 언제 나누었는지를 떠올려본다. 연애할 때였나, 신혼 때였나. 정민도 지금 그때를 떠올리는 것일까.
나는, 나는 최근에 이런 말들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나눈 기억이 없다. 오피스텔 안에서도 문화관광과 사무실 안에서도. 어쩌다 찾아가는 어머니에게도. 심지어 지난 주말 만난 민서에게도.
하지만 이런 말들이 끝까지 이어지기는 불가능하다. 언어라는 게 기본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의사를 전달한다는 목적. 결국 정민은 나와 관련된 화제를 친교를 가장하여 끄집어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재미있어? 수연이 말을 듣고 자기가 국문학과 나왔다는 거 기억했네.”
이 말은 언어의 다른 기능인 친교를 위한 것일까. 가장 편한 화법으로 말을 하였지만, 듣던 나는 내가 나에게서 갑자기 멀어짐을 느낀다. 대답할 말이 궁색해지고, 그런 내 처지가 궁색해진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지금 살고 있는 내 삶도 그러하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기록으로는 남아 있되 실체가 없는 삶. 마치 신기루처럼. 그래 신기정처럼.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이번에는 길게. 친교를 위한 말하기이든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말하기이든 이어가기 힘듦을 서로 깨닫는다. 법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멀어진 우리들에게는. 그렇다면, 통화 좀 할까, 이렇게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서가 다쳤어. 지난 주말에 지하철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었대.”
나를 만난 날이다. 집까지 데려다주려 했는데, 어디 들를 데가 있다고 하여 지하철역에 내려 주었다. 정민의 집 근처에서 정민이나 옛 장모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거북함에 두 번 권하지 않고 그대로 지하철역에 내려 주었다.
“많이 다친 것은 아니고. 한 보름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어야 한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예전 같았으면 그냥 문자로 던졌을 말. 그런데도 목소리로 전하려 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 정민도 지금 나와 같은가.
“그리고 민서 다니기가 불편하니까 당분간은 안 와도 될 것 같아. 당신도 바쁘잖아.”
당신이라는 호칭.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어서 참 낯설다.
“우리 민서한테 신경 좀 쓰자.”
써라가 아니라 쓰자, 청유형이다. 그냥 나온 말일까, 선택하여 쓴 말일까.
“지금까지는 애가 착해서 별말 없는데,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어. 요즘 애들 사춘기 빨리 오는 거 알지? 늘 조마조마해.”
김광석을 들으며
‘서른 즈음에’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다.
그렇게 훌쩍 지나가는
시간의 간극에서
겪고 있는, 또 겪어야 할 아픔을
함께 듣는다.
‘나는 너를 떠날 수는
없을 것만 같아’의 다짐과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의 안타까움을
함께 듣는다.
그렇게 훌쩍 지나가며
모순된 감정들이 만들어냈던
삶의 상처들을
함께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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