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9. 큰누이 김영숙

New-Mountain(새뫼) 2023. 6. 3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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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큰누이 김영숙

 

  “술도 못 이기면서 뭔 술을 그리 먹었냐?”

  천장이 낯설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다가 점차 낯이 익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아쥐고 어젯밤 일을 반추해 본다. 모르는 사람의 상갓집에 갔던 일, 학회장인가에게 야단을 맞았던 일, 정 교수가 가사비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했던 일. 그리고 그다음에.

  대리기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근처에 맥줏집으로 혼자 들어갔다. 전작이 있어서인지,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인지, 맥줏집에 많이 마셔서인지 그다음부터는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택시를 불러 탔는데, 택시는 J시 시내로 달려 큰누이가 살고 있는 집 앞에 나를 내려놓았다. 어렴풋하나마 거기까지가 기억되는 부분이다.

  매형과 조카는?

  “지금이 몇 시인데, 집에 있겠니. 일 나갔지. 그리고 경호 군대 간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훌쩍 넘어 있다. 다시 방 안을 돌아보니 조카 경호 방이다. 누이에게 이끌려 방을 나선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 왔을 때가 3년 전 설날 때였던가. 식탁에 앉는다. 밥 한 공기 콩나물국 한 그릇과 반찬 몇 가지가 올려져 있다.

  “우리 먹던 거라서 차린 게 없다.”

  술 마신 다음 날 콩나물국을 먹는 것만으로도 진수성찬이 아닌가. 해장국도 참 오랜만이다. 감지덕지다.

  “근데 군청에는 안 나가봐도 되니? 전화가 여러 번 울리던데,”

  휴대전화를 열어본다. 팀장에게 두 번, 현경숙에게 한 번,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다. 팀장에게 전화한다. 여기 J시인데 금방 가겠다고. 팀장은 알겠다고만 하고 만다. 콩나물국을 훌쩍거리고 있으려니 누이가 멸치가 담긴 바구니를 앞에 놓고 앉는다.   얼굴 이곳저곳에 주름이 패어 있다. 멸치처럼 말랐다.

  “그럼 늙었지. 나이가 몇인데. 경호 아빠는 나한테 늙었다고 감히 말 못하는데, 동생한데 그런 말을 듣네.”

  국그릇에 국을 더 부어 주고는 계속 멸치를 다듬는다.

  “늙기는 늙었지. 거울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하루가 다르게 흰머리가 늘어가는 게. 경호 아빠는 하루가 다르게 머리가 빠지고 있고.”

  식탁 건너편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이 눈에 뜨인다. 다들 환하게 웃고 있다. 누이의 말과는 달리 매형은 머리가 풍성하고, 누이의 머리카락은 검게 윤이 난다. 조카는 짧은 머리카락에도 한껏 양복을 차려입었다. 조카가 휴가 나왔을 때 찍은 최근의 사진인 듯하다. 아들의 휴가를 위해 가발을 쓰고 염색을 한 걸까.

  누이는 앉아 있는 두 남자 뒤에 서서, 두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 사진사가 요구한 포즈겠지만, 어딘지 어색하다. 의자가 둘이니까, 누이 부부가 앞에 앉고 조카가 뒤에 서는 것은 어땠을까. 아니면 모자가 앞에 앉고 매형이 뒤에 서는 것은. 혼자 픽 웃는다. 가족사진에서도 경우의 수를 따지고 있다.

  “일 때문에 왔다고 그랬니? 새벽에 서운으로 가 보겠다고 일어서려는 걸, 다시 재웠는데. 차를 장례식장에다 두고 왔다며? 그렇게 마셨으니 지금 운전하기 힘들 거다. 경호 아빠한테 점심 때쯤 차 가지고 오라고 키 줘 보냈다. 먹고 좀 더 쉬다가 가.”

  매형이 번거롭게 뭘.

  “별로 일도 없는 세무사야. 온종일 사무실 지키느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덜 지루할 거야.”

  누이에게 어머니의 표정을 읽는다. 있지만 없는 듯 드러나지 않고, 없는 듯하지만 필요함을 느낄 때면 항상 내 앞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이리 달려왔던 것이 아닐까.

  “민서 엄마하고는 아직도 그래?”

  숟가락질을 잠시 멈춘다. 누이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여전히 멸치 바구니에 멈춰 있다.

  “너희들도 참 어지간하다. 누가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빚보증 잘못 선 것도 아니고. 애 보고 살면 그냥저냥 살 텐데. 성격들이 그렇게 힘들어서 어디.”

  누이는 멸치를 보고 나는 국그릇에 남은 콩나물을 본다.

  “그런 꽁한 성격으로 공무원은 어떻게 하나 몰라. 그래 요즘 공무원은 괜찮니?”

  내가 본래 해야 할 일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누이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짧은 말로 그럭저럭하니까.

  “갑자기 일이 바뀌어서 힘들겠다. 경호도 제대하면 공무원 시험 시작한다고 하더라. 지금 다니고 있는 과에서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네.”

  사학과였던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연표를 줄줄이 꿰고 외던 조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하는 대로 사학과에 지망했는데.

  “경호 아빠는 생각 잘했다고 그러는데, 나는 왠지 좀 아쉽기도 해. 지 좋아하는 공부가 따로 있는데.”

  순간 이십여 전의 일이 데자뷔처럼 떠오른다. 작은누이 결혼식을 마친 날 밤에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우연히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세무 공무원인 큰 사위나 은행원인 작은 사위처럼 영태도 안정된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그래도 생각이 있으니까 국문학과 갔을 거라고. 아버지는 입대하기 전에 진지한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했다.

  하지만 부자 사이에 진지한 대화는 없었다.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군대에 갔고, 제대를 했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렸었다.

  “경호 아빠 사는 거 보니까, 좀 안됐기도 해. 평생 다른 사람들 세금만 매기다가, 은퇴하고도 또 다른 사람들 세금만 계산해 주고 있으니.”

  누나는 요즘 뭐해? 누이가 나를 건네다 본다.

  “애를 하나 더 낳을 걸 그랬나 봐. 경호 아빠가 경호 동생 낳자고 할 때, 내가 싫다고 해서 외동으로 키웠는데, 막상 군대 보내니까, 마음이 휑한 게. 그때 경호 아빠가 낳자고 했을 때 낳았으면, 지금 고3 수험생 부모일 텐데.”

누이의 독백이 쓸쓸하다. 말의 톤은 더 쓸쓸하다. 하지만 금세 명랑해진다.

  “다음 달부터는 경호 아빠 세무사 사무실에라도 나가 보려고. 할 줄 아는 건 없어도, 사무실 청소라도 하고, 전화라도 받을까 봐. 최저 시급은 주겠지?”

  누나가 매형 월급 줘야지. 왜 매형한테 시급을 받아?

  “거추장스럽다고 쫓아내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경호 아빠가 집에서야 꼼짝 못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다를걸.”

  멸치 바구니를 싱크대 위로 옮기고 누이가 물 한잔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내 머리를 위에서 내려다 본다.

  “너도 많이 늙었다. 흰머리가 허옇네. 나이 더 먹으면 추해진다. 웬만하면 같이 살어.”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와 같이 살 수 없는 이유를 견주어 본다. 어느 것이 더 큰가.

 

     오십 즈음에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리라.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살아졌을 시간이

     부끄럽기도 하겠지만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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