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축제팀 현경숙
결국, 결정했다.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10년 넘는 공무원 생활에서 내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목은 ‘신기정가’이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 ‘기’자가 ‘터 기(基)’자인지, ‘기록할 기(記)’자인지 따질 필요도 없다. 그냥 한자는 빼고 한글로만 ‘신기정가’라고 쓰면 된다.
작자는 ‘산중처사’. 어떤 이유에서 맨 뒤의 ‘산중처자’를 맨 앞에 ‘산중처사’라고 옮겨 적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옮겨 적었던 사람이 잘못 이해했던 것이겠지만, 그냥 ‘산중처사’로 한다. ‘지은이 미상’ 하는 것보다는 그게 좀 더 그럴듯하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진에 들어 있던 시조 한 편, 결국 버리지 못한다. 선택지 중 세 번째를 선택한다. 가사 중간에 적당하게 끼워 넣기로 한다. 시조는 여기저기에 붙었다가 가장 그럴듯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아무 걱정 근심 없어 별 아래에 누웠으니
고금의 속세 생각 듣도 보도 못하리라.
아침 이슬 맺힌 곳에 매화는 피어 있고
저녁 노을 어린 곳에 백학이 춤 추노라,
나무 위에 별이 빛나니 어느 것이 내 처자인가.
청산 속 푸른 물에 넌짓넌짓 혼자 들어
돌창문에 비추이는 명월을 등불 삼아
어리석음 자아내서 신기정가 짓노라니
불타산 맑은 맛이 여기에 다 있구나.
그 렇게 신기정가를 한 부 출력하여 의자를 뒤로 젖힌 후에 혼자 낭랑하게 읽어 본다. 낭송해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가 노래였다는데,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 배운 바가 없다. 그래도 리듬을 실어 읽어 보려고 한다. 그럴듯하다.
가사를 낭송하는 소리가 주말 오후를 느긋하게 한다. 서운호박제가 일주일 앞이라, 팀원들은 물론이고 문화관광과의 직원들은 주말을 반납하고 지금 모두 호박벌에 나가 있는데, 나만 한가하다. 민망하고 미안하다.
남태전통건축에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명함을 찾아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한다. 원 대표가 받는다. 원래 약속은 어제 가사비에 들어갈 가사를 들고 가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갈까요? 늦었으니까 일요일 지나 월요일 아침 일찍 들고 오란다.
“나오셨네요.”
현경숙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배가 정말 많이 불러 있다. 힘겹게 자리에 앉는다. 책상에는 입력할 것인지, 출력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서류 뭉치가 쌓여 있다. 현경숙의 컴퓨터로 들어갈 서류이거나 현경숙의 컴퓨터에서 나온 서류이다. 이렇게 서운호박제의 거의 모든 문서는 현경숙의 키보드에서 이루어졌다. 이런저런 사람의 다양한 생각과 문체와 글자들이 현경숙의 눈을 통해 머리에서 새로운 언어로 조합된 뒤에 다시 손가락으로 표현되어 서운호박제의 공식 문서가 되는 것이다.
“집에서 타 온 커피가 있는데 한잔하실래요?”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가져온다. 앉아서 받기가 미안하여 일어선다. 임신 중인데 커피가 괜찮은가? 정민은 민서를 가졌을 때 커피를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초기에만 조심하면 돼요. 이제 이 녀석도 먹을 거 못 먹을 거 가려 먹겠죠. 참, 점심은 어떻게 하셨어요?”
느지막이 일어나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 하나로 아침 겸 점심을 대신하였다.
“애기 아빠가 도시락을 사 가지고 올 건데, 하나 더 사 오라고 할까요?”
애기 아빠가 온다는 건 아이들도 함께 온다는 말이다. 장난감이나 책 몇 권을 들고. 아마 큰 애는 구석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을 거고, 작은 애는 아빠와 함께 회의실에서 장난감 놀이를 할 것이다. 주말 오후의 평온한 가족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면 이 사무실을 저들 가족만의 공간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 같다. 그저 호박벌에나 가 봐야겠다. 괜찮아요. 애들과 같이 드세요.
“하긴 애들 입맛에 맞는 도시락이라. 편하실 대로 하세요.”
그러면서 주섬주섬 책상 위의 서류들을 챙긴다. 그러다가 서류를 한 장 뽑아 든다.
“참, 주무관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실천에서 가장 가까운 쪽이 신기정1이고, 가장 먼 쪽이 신기정3인가요. 아니면 반대인가요?”
그게, 그러고 보니 정자 이름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따로 작명할 계획도 없다. 세 채 짓기로 한 신기정은 그냥 신기정1, 신기정2, 신기정3이다. 각각의 정자는 분리된 채로 호박벌에 도착하여 조립된 뒤에, 설치하는 사람들이 임의대로 현판을 붙일 것이다. 아무런 차별성도 없이 첫째, 둘째, 셋째의 순서가 매겨지는 것이다.
“생각해 봤는데요. 헷갈려서요. 정자 이름을 다른 걸로 붙이면 어때요?”
각기 달리 붙인다고. 하긴, 현경숙이 매일 만드는 문서 안에서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되다가 엉켜버렸을 것이다. 혹시 좋은 생각이 있나?
“신기정1은 예슬이, 신기정2는 예린이, 신기정3은 콩콩이.”
네?
“우리 애기들 이름인데……. 농담이에요. 그건 주무관님이 정하셔야죠.”
현경숙이 프린터 쪽으로 향한다. 현경숙의 손끝에서 컴퓨터로 들어갔던 글들이 세상에 바쁘게 나오는 중이다. 꽤 오래도록. 일어선 김에 프린터 앞으로 간다. 내가 가져올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인쇄된 뭉치를 대강 살펴본다. 꽤나 많다. 쭉 훑어보며 현경숙의 책상 위에 놓는다.
“다 쓸데없는 것들에요. 출력물은 많은 데 다 똑같아요, 업무 목적, 방침, 세부사항, 소요경비, 담당 부서, 기대효과. 이건 하나 더 있네, 군수 지시사항. 같은 내용만 조금씩 바꿔가며 복사하고 붙이고 인쇄하고, 며칠째 그 짓이네요.”
다시, 키보드를 탁 친다.
위잉위윙 파일 하나의 인쇄가 끝나면 띠. 그다음 파일의 인쇄. 위잉위잉 뒤에 띠. 위잉위잉 띠. 위잉위잉 띠. 둘만 있는 사무실에 프린터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위잉위잉하고 띠하거나 띠하고 위잉위잉하거나.
이때 사무실 문이 빠끔히 열린다. 작은딸을 안고 큰딸을 앞세우고 손에 가방을 든 다둥이 아빠가 나타난다. 큰딸은 엄마, 하고 달려가고, 애기 아빠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서먹하게 인사한다.
“인사해, 우리 팀 김영태 주무관님.”
애기 아빠의 표정에서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것처럼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내의 직장에 나타난 것을 들켜서 내게 민망한 것인가, 주말에도 배부른 아내를 출근시킨 일이 부끄러워서 스스로에게 민망한 것인가, 아이 둘을 보듬지 못하고 데려온 것 때문에 아내에게 민망한 것인가. 하지만 현경숙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하다.
“예슬아, 얌전히 있어야 해. 삼촌한테 인사하고.”
큰 애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배꼽 인사를 한다. 양쪽으로 묶은 머리 갈래가 짝짝이인 것을 보니 아빠 솜씨이다.
“참, 잘됐다. 김 주무관님. 우리 큰 딸 이름 한자로 크게 써 주실래요? 유치원에서 적어오라는데, 나나 애기 아빠나 잘 쓸 줄 몰라요. 예슬이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건데,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꽃잎 예(蘂)’자에, ‘구슬 슬(璱)’자에요. 성은 ‘변(邊)’이고요.”
나도 처음 듣는 한자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큰 한자 자전을 한참 뒤져서 두 글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컴퓨터로 뽑아 주려다가 A4 지에 한 자씩 크게 써 준다. 성이 변씨니, 변예슬(邊蘂璱)하고. 쓰고 나서 이름을 들여다 보며 예슬이가 나중에 자기 이름으로 한자로 써야 할 자리가 생기면 얼마나 피곤할까를 잠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내 이름 김영태(金英泰)를 한자로 적는 일이 1년에 몇 번이나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저 괜한 걱정일 터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호박벌에 나가보겠습니다.
“참 주무관님, 성수산 봉우리들 이름이 뭐였죠? 연화봉과 임수봉은 기억이 나는데.”
연화봉, 자맥봉, 임수봉.
순간 정자들에게 맞는 그럴듯한 이름들이 떠오른다. 정자에 봉우리 이름을 붙여 두자. 신기정1은 연화정으로, 신기정2는 자맥정으로, 신기정3은 임수정으로.
그렇게 정자들의 이름이 작명되었다. 그러면서 신기정이라는 정자는 가사에만 남고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사라졌다.
내 의지로 내린 두 번째 결정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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