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5. 산중처자

New-Mountain(새뫼) 2023. 6. 2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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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산중처자

 

  글자들이 모여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 행이 되며, 행이 모여 글이 되어간다. 신기정가는 내 컴퓨터 속에서 점점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다. 이에 맞추어 호박벌도 터를 잡고, 터 위에 부스가 서고, 부스 안에 기물이 설치되고 있다. 팀장과 천승남, 손상섭은 사무실보다는 현장에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송미영은 매일 전화를 붙들고 있다. 부탁하고, 다투고, 읍소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해당 사무실로 서류를 들고 뛰어간다.

  원래 저 일이 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부탁하고 다투고 읍소하는 대상은 신기정가이다. 살살 달래 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풀어나간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신기정가는 제 꼴을 갖추어 간다. 그래도 남은 문제는 있다. 가사연구원에서 보낸 파일 중 마지막 사진을 모니터 위에 띄운다. 거기에 시조 한 편이 적혀 있다.

  이 시조가 이빨 사이에 낀 음식 찌기처럼 성가시다. 그냥 버리려 하니 뭔가 찜찜하다. 그제였나. 옆에서 들었던 천승남의 통화가 떠 오른다. A형 프레임이 일곱 개가 왔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A형을 여섯 개 주문했는데. 뭐라고? 야, 걔들이 어떤 애들인데 하나 더 주냐. A형을 하나 더 보냈으면, B형이나 C형에서 분명히 빠지는 게 있어. 남는 거 포장 뜯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다음날 천승남의 말대로 C형 프레임이 하나 부족하게 배송되어 왔다.

  이 시조도 그런 것일까. 무심코 버렸는데 나중에 필요한 곳이 생기게 되어 아쉬워지지나 않을까.

  일단 한자의 뜻을 살펴 가며 시조를 현대어로 옮겨 보기 시작한다.

 

     이슬이 맺힌 곳에 매화는 피어 있고,

     노을이 어리는 곳에 백학이 춤추노라.

     별별이 나무 위에 빛나니 어느 것이 내 처자인가.

 

  초장과 중장은 문제가 없다. 서로 대구로 짝을 맞추어 쓴 것이다. 초로(草露)는 이슬이고, 모운(暮雲)은 노을이다. 이 두 단어를 같이 인터넷 검색창에 넣으니, 허난설헌의 규원가가 검색된다. 거기서도 짝을 지어 나오는 낱말이다.

  매화와 백학은 어떤가. 이들도 짝을 지어 입력해 본다. 수없이 많은 웹 문서들이 검색창에 떠오른다. 문서를 내리고 내리다가, 눈에 뜨이는 한 곳을 클릭한다. 중국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의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는 세속을 떠나 구산(孤山)이라는 곳에서 살며, 매화를 자식으로 삼고 학을 아내로 삼으며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것인가. 시조는 그 고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 종장의 ‘쳐ᄌᆞ(처자)’는 초장 중장과 연결되어, 그냥 처자식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첫 구의 ‘별별이’는 무엇일까. 정 교수의 책 한 구절이 떠오른다. 고전문학이라 해서 낯선 외국 문학이 아니라는 것. 그것도 결국은 우리 글로 쓰인 우리 문학이라는 것. 그렇기에 고전에 쓰인 낱말들이 뭔가 특별한 뜻을 가졌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읽으라는 것. 그러면 ‘별별이’의 별은, 그냥 별이다. 그러면 별을 두 번 쓴 것이니, 그저 ‘별마다’ 또는 ‘별들이’로 풀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종장을 풀어 읽는다.

 

     별들이 나무 위에서 빛나니, 어느 것이, 어느 별이 내 처자식인가.

 

  이러니 바로 앞의 초장 중장과 이어진다. 임포가 매화와 학을 처자식처럼 여기고 산 것처럼, 산중처사는 나무 위의 별들을 처자식 삼아 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조 석 줄을 풀어냈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가사비를 세우는데 이 시조를 어찌해야 하는가. 이 시조는 남는 A형 프레임인가, 부족한 C형 프레임인가. 시조를 집어넣을 만큼 공간의 여유가 가사비에 있을까. 가사 뒤에다 시조를 넣게 되면 뜬금없지나 않을까. 이 시조는 사족인가, 계륵인가.

  시조가 기록된 사진 파일은 여전히 모니터에 떠 있다. 그런데 ‘쳐ᄌᆞ’ 라는 글자가 눈에 익다. 신기정가의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 신기정가를 복사한 종이 석 장을 펼쳐본다. 첫 번째 장에 없고, 두 번째 장에도 없고, 세 번째 장에도 없다. 어디에선가 보기는 보았는데.

  그러다가 세 번째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눈이 멈춘다. 신기정가의 제목과 작자가 적혀 있던 마지막 그 부분. ‘신긔졍가 산듕쳐ᄉᆞ’. 지금까지는 막연히 ‘쳐ᄉᆞ’라고 보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쳐ᄌᆞ’인 것 같다. 가사연구원에서 보낸 마지막 네 번째 사진을 출력하여 신기정가의 셋째 장과 비교한다. 셋째 장의 ‘산듕쳐ᄉᆞ’와 마지막 장의 ‘ᄂᆡ 쳐ᄌᆞ고’. 두 장에서 발견되는 ‘ᄉᆞ’‘ᄌᆞ’의 글자 모양이 확실히 같다.

  마침 사무실로 들어오는 손상섭을 불러 세운다. 세 번째 장의 ‘산듕쳐ᄉᆞ’의 ‘ᄉᆞ’자를 보여 주고 이것이 시옷으로 보이는지 지읒으로 보이는지 물어본다. 손상섭이 잠시 보더니 간단하게 대답한다. 지읒이네요. 왜 그렇게 보이지? 시옷은 아녜요. 내 이름에 시옷이 세 개나 들어가잖아요. 시옷은 하도 많이 써 봐서 알아요. 또, 맨 앞에 ‘산’ 자에도 시옷이 있잖아요. 거기 있는 시옷과 모양이 전혀 달라요.

  그러면 ‘산듕쳐ᄉᆞ’가 아니라 ‘산듕쳐ᄌᆞ(산중처자)’이다. ‘처자’라고 읽으면 시조의 ‘쳐ᄌᆞ’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쳐ᄉᆞ’가 아니라 ‘쳐ᄌᆞ’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앞부분도 이상하다. ‘신긔졍가’가 아니라 ‘신긔셩가’로 보인다. 다시 손상섭에게 물어본다. 이 글자가 ‘셩’이야, ‘졍’이야? 이번에는 손상섭이 한참 들여다본다. 이건 시옷이네요. 위에 줄이 분명히 없어요.

  이것도 잘못 읽었다. ‘셩(성)’이라고 읽어야 한다. ‘셩’이라면 무슨 뜻일까. 시조를 다시 읽으면서 ‘셩’과 연결될 만한 말을 찾아본다. 그러다가 ‘별별이’를 주목한다. ‘별 성(星)’자를 ‘셩’으로 쓴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가사에도 별이 있었다.

 

     無思 無慮ᄒᆞ야 별 아래의 누어시니

     아무 걱정 근심 없어 별 아래에 누웠으니

 

  그렇다면 세 번째 장의 마지막 부분은 ‘신기정가 산중처사’가 아니라, ‘신기성가 산중처자’라고 쓴 것이다. 처음에 정 교수에게 들었던 말을 복기해 본다. ‘신기정가’ ‘기’자가 ‘터 기(基)’자가 아니라, ‘기록할 기(記)’자라던 말. 그 말과, ‘졍’인지 ‘셩’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별 성(星)’자로 읽는다면, ‘신긔셩가’‘신기성가(新記星歌)’가 되고, ‘새로 쓴 별 노래’라는 뜻이 된다. 뒤에 있는 ‘산중처자’와 연결하면, 작자가 ‘산중처자(산속의 처자식)’라는 새로운 별 노래를 썼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다가, 아, 갑자기 뭔가가 번뜩 떠오른다. ‘신기성가 산중처자’는 앞부분에 있는 가사의 제목과 작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네 번째 사진에 있는 시조의 제목을 쓴 것은 아닌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긔셩가’ 앞에 ‘後’라는 작은 글자가 보인다. 뒷장을 가리킨 것이다. 뒤를 보라. 뒤에 ‘신기성가 산중처자’라는 시조가 있다. 앞 장에 제목을 적고, 뒷장에 시조를 적은 것이다.

  그런데 다들 왜 이 작품을 ‘신기정가’로 알게 되었을까. 원 가사의 복사본에서 ‘신기정가’가 적힌 부분을 찾아본다.

 

     愚意ᄅᆞᆯ ᄌᆞ아나셔 新記○歌 지노라니

     어리석음 자아내서 신기〇가 짓노라니

 

  정 교수가 ‘정(亭)’으로 풀었던 ‘신기정가’의 세 번째 글자. 당연히 ‘정(亭)’이려니 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흐릿하게 쓰여 무슨 글자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가사만을 연구하시려고 시조를 빼신 것인지, 아니면 시조의 존재를 모르셨던 것인지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주 연구사의 메일이 떠오른다. 정 교수는 네 번째 장에 적힌 시조를 몰랐을 수도 있다. 이 가사를 얼마나 받을 수 있겠느냐는 시골 노인의 성화에 얼른 복사하고 돌려주었다고 하지 않았나. 앞의 석 장만 복사하고 마지막 장은 놓쳤을까. 그래서 석 장만으로 연구하다가, 문맥에 맞추어 ‘신기정가’라고 한 것일까. 이런 추정이 가능할까.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있다. 왜 첫 장에서 제목을 ‘신기정가’라고 하고, 작자를 ‘산중처사’라고 했을까. 첫 번째 장의 맨 오른쪽에 있는 제목과 작자를 다시 살펴본다. 가사 본문보다도 오히려 글자가 작다. 글자체도 다른 것 같다.

  다시 손상섭을 부른다. 이 글자체랑 이 글자체가 같아? 손상섭이 복사본을 들고 좌우를 돌려가며 살펴본다. 다른데요. 제목이 마이너스 60킬로급이라면, 왼쪽의 글들은 마이너스 70킬로급이네요. 왼쪽에 있는 놈들이 볼륨이 더 있어요. 그럼 이것은? 세 번째 장의 ‘신긔셩가 산듕쳐ᄌᆞ’ 보여 준다. 이게 제일 볼륨이 있네요. 이건 마이너스 80킬로급 정도.

  글자체는?

  제목이랑 가사랑, 글씨체가 조금 다른 거 같은데요. 이거랑 가사는 글씨체가 같아요. 예 분명히 같네요.

  그러면서 세 번째 장의 ‘신긔셩가 산듕쳐ᄌᆞ’ 가리킨다. 그러다가, 잠깐만요, 하며 첫 번째 장을 다시 들어 창가에 비추어 본다. 이거 글자에 테두리를 두른 것 같은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복사본이나, 원본을 찍을 사진 파일에서도 그렇게 보인다. ‘新記亭歌 山中處士 신긔졍가 산듕쳐ᄉᆞ’에 네모 테두리가 둘려 있다.

  얼른 가사연구원에 전화를 하여 주신호 연구사를 부탁한다. 서운군 김영태입니다. 신기정가 제목 부분에 무슨 테두리 같은 게 있던데요? 네 맞습니다. 배접했습니다. 대답이 금방 나온다.

  배접이라면? 위에다 다른 종이를 붙인 것이죠. 혹시 그 아래에 다른 글이 있을까봐 살펴보았기 때문에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글은 없었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흔한가요?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그것 말고도 특이했던 게 더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도? 예. 보통 제목은 맨 앞에 쓰는데, 이 작품은 제목이 맨 앞에도 있었고, 맨 뒤에도 있었습니다. 또 제목 아래에 작자 이름이 있는데, 이런 건 요즘에야 그렇게 쓰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른 누군가가 뒤에 있는 제목과 작자 이름을 따로 적어 앞부분의 여백에 붙인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 네, 글자체가 분명히 다르니까요.

  누가 그랬을까요? 그건 제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아마, 처음부터 원 종이에다 쓰기에 부담스러우니까, 다른 종이에다 몇 번 써 보고 그중에 잘 쓴 것을 골라 오려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배접한 뒷부분에 아무 글자도 없었던 게 그런 추측을 하게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짐작으로는 제목이 맨 뒤에 있어서, 앞에다 써서 잘 보이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닌지, 역시 추측입니다만.

  다시 정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작자 이름으로 ‘처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던 그 말. 그렇다면 신기정가의 작자는 산중처사가 아닐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가사의 제목이 신기정가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내 추정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전화를 끊기 전에 궁금했던 것을 주 연구사에게 묻는다. 지난번에 성수산에 와 보고 싶다고 하셨죠? 신기정가에는 성수산이 나오지 않는데?

  아, 그거요. 지도를 보니까 서운군에 성수산이 있던데요. 시조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었고요.

  시조에요? 네, ‘별별이 나무 위에 빛나니’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지도에 있는 성수산이 그것이겠거니 했습니다. ‘별 성(星)’자에 ‘나무 수(樹)’자. 성수산을 한자로 그렇게 쓰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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