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32. 여섯 살 변예슬

New-Mountain(새뫼) 2023. 7. 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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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여섯 살 변예슬

 

  성수산에서 내려온 물이 호박벌의 북쪽을 뚫고 흘러가고 있다. 성수산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모르지만, 서운군의 공식 강수량은 이틀간 합하여 55밀리였다. 다행히도 예상한 강수량을 밑돌았다. 또 태풍은 예상보다 빠르게 남쪽으로 지나갔다.

  서운군이 태풍 때문에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겨울 작목을 위한 새 비닐하우스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고, 벼 수확도 거의 끝난 상태였다. 다만 군청 앞에 있는 500년 된 느티나무의 큰 가지 셋 중 두 개가 부러졌는데, 살지 죽을지는 내년 봄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축제 개막일을 하루 앞둔 호박벌은 작업이 한창이다. 부스들이 만들어지고, 트럭들이 바삐 들락거린다. 질퍽한 바닥에는 고운 자갈들이 깔리고 있다. 정자는 연화정이 제일 먼저 세워졌고, 자맥정이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이다. 임수정은 막 공사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세 정자를 삼각형으로 하여 가운데쯤에 가사비를 나란히 세우고 있다. 원 대표는 늦어도 오늘 저녁이면 가사비와 정자 공사가 끝나도록 서두르겠다고 한다.

  잠깐 모이실래요, 정자 아래, 그러니까 자맥정 아래서요. 팀장의 문자가 도착한다. 단체 문자를 확인하고 팀원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원 대표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자맥정의 조립이 완료되었음을 통보한다. 그리고 바삐 임수정 쪽으로 걸어간다.

  천승남이 자맥정을 쓰다듬으며 발로 툭툭 기둥도 차본다. 이렇게 세워 두니까 제법 정자 같네. 팀장님, 군수가 테이프 끊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개시합시다. 천승남의 의견에 따라 다들 자맥정 위로 올라간다. 괜찮겠어, 하는 송미영의 걱정에, 별로 높지도 않은데요, 하며 현경숙이 송미영의 부축을 받으며 자맥정 위로 서너 계단을 오른다. 이미 세워진 연화정에 비해 자맥정은 훨씬 넓은데 높이는 낮다.

  엊저녁 원 대표가 전화로 물어왔다. 말씀하신 대로 정자 이름을 새긴 현판들을 준비했는데,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요?

  정자 모양이 같지는 않죠?

  네, 다 다릅니다. 넓이가 좁고 지붕이 높은 정자가 하나 있고, 반대로 넓은 데 낮은 게 있어요. 그리고 제일 모양이 근사한 게 하나 있어요. 우리도 처음 세워 보는데 기둥이 다섯 개에요. 지붕도 오각입니다.

  그러면 지붕이 높이 솟은 것을 임수정을 해 주세요. ‘수풀 림(林)’자에 ‘나무 수(樹)’자이니까. 그러면 다섯 기둥에 오각 지붕은 연화정으로 할까요? 원래 연화가 연꽃이라는 뜻은 아닌데, 예쁘다니까 연꽃으로 해 봅시다. 나머지 하나를 자맥정으로 하고.

  그 자맥정에 오른다. 잠깐, 하며 천승남이 한쪽 부스에 놓여 있던 박스를 뜯어 음료수와 빈 컵과 과자를 가져다 놓는다. 손상섭과 송미영이 부지런히 정자 바닥을 닦는다.

  좋구먼, 피크닉이 따로 없네. 근데 자맥이 무슨 뜻이야? 천승남이 컵을 돌리며 내게 묻는다. 도시의 큰길을 자맥이라고 하던데요. 현경숙이 대신 대답한다. 아, 자맥봉으로 가는 능선이 꽤 넓어요. 길을 닦아 놓은 것 같죠. 그래서 자맥봉이라고 했나 보다. 손상섭이 이어 말한다.

  이름에는 다 이유가 있어. 천승남이 현경숙의 배를 쳐다본다. 참, 경숙씨 셋째 이름은 뭐야? 아직요, 낳은 다음에 얼굴 보고 지으려고요. 그러고 보니 현경숙의 출산예정일이 내일이다. 축제 개막 테이프가 잘릴 때, 현경숙의 셋째 아이 탯줄도 잘릴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체크해 볼게요. 팀장이 주변을 정돈한다.

  먼저 손상섭이 일어서더니 정자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비가 걱정한 만큼 많이 오지 않아 잠긴 부분이 다행히 적다고, 축제 현장은 태풍으로부터 다행히 무사하다. 정자 쪽만 조금 잠기는데, 임수정에는 물줄기가 닿지 않을 거고,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맥정은 바로 옆으로 물이 흐르기는 하는데, 이틀 후에는 마를 것 같다. 저기 연화정 아래로는 축제가 끝날 때까지 물이 흐를 것이다.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오히려 모양이 그럴듯할 것이다. 깊이도 그리 깊지 않아서 징검다리 몇 개를 올려놓으면 통행에는 지장이 없다. 덧붙여 주차장과 행사장에 토사가 조금 쌓이기는 했지만, 지금 치우고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자리에 앉는다.

  천승남의 브리핑은 간단하다. 다 문제 없습니다요. 젖은 거 없고, 늦는 거 없어요.

  이때 현경숙이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 정자 위에서 보니까 경치가 괜찮네요. 위로 산이 보이고, 옆으로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이 호박벌에 정자를 짓자고 한 것이 신의 한 수였나 봐. 아, 여보야, 여기야.

  한 남자가 앞으로는 아이를 안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한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현경숙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정자 쪽으로 걸어온다. 지난 주말 사무실에서 보았던 현경숙네 가족 상봉의 풍경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내일은 병원에 가야 하니까 오늘 호박벌이랑 정자들을 보려고 애기 아빠한테 월차 내고 오라고 했어요.

  환영합니다. 올라와요. 천승남이 손짓하자, 먼저 큰아이가 오르고 예슬이 아빠가 작은아기를 안고 따라 오른다.

  “안녕하세요.”

  예슬이는 예의 배꼽 인사를 돌아가며 하고, 예슬이 아빠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주변을 돌아본다. 그 표정이 방금 아내가 지어 보였던 표정과 닮았다. 하지만 표현은 아내보다는 훨씬 짧다. 좋네요. 그리고는, 일하시는데 방해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앉은 채로 이야기한다. 이 정자들을 어린이들의 호박 체험 공간으로 쓰기로 했다. 서운지역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협조를 받았다. 여기 자맥정에서는 호박 그림 그리기, 연화정에서는 호박 퍼즐 맞추기, 임수정에서 호박 쌓기가 진행될 거다. 호박 쌓기는 위험할 수도 있어 우리 사무실의 공익을 따로 배치하기로 했다. 나는 왔다 갔다 하며 세 정자를 관리하겠다.

  이때 예슬이는 메고 온 가방을 풀러 한 짐을 꺼내 놓는다. 크레파스와 도화지. 그리고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자맥정에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는 예슬이가 된다. 노란 선들과 푸른 선들, 붉은 동그라미가 겹쳐진다. 색깔이 형태가 되고, 형태가 모여 그림이 된다. 잠시 송미영이 시선이 팀원들에게서 이탈하여 예슬이가 그리는 그림으로 옮겨 간다. 이를 시작으로 하나둘 그림에 시선을 꽂는다. 팀장 역시 예슬의 그림으로 시선을 옮긴다.

  팀원들의 시선이 딸에게 모이자 예슬이 아빠가 설명한다. 아, 유치원 숙제에요. 오는 주말에 가족과 같이 야외에 가서 그림 그려오기인데, 근데 주말에는 엄마가 병원에 가야 하니까. 그래서 오늘 같이 왔어요.

  예슬이는 쓱쓱 커다란 집처럼 정자를 다 그렸다. 그리고 그 집 안에 가족을 그려 넣는다. 그 집에서 예슬이는 노래를 하고 있고, 아빠는 동생은 안고 있고, 엄마는 손뼉을 치고 있다. 예슬의 그림에는 주변 풍경이 없다. 그래도 그림 안에서도 그림 밖에서도 참 행복한 집이다. 굳이 야외가 아니어도 그릴 수 있는 집. 중요한 것은 위치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다. 이것이 예슬이에게 가장 중요한 행복의 기준이다.

  예슬이의 그림을 보며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민서를 안았을 때가 언제였을까, 마지막으로 민서의 노래를 듣고 민서의 그림을 보았던 곳은 어디였을까. 그리고 오정민. 지난번 마지막 통화의 의도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후로 누이의 부탁에도 문자 한번 오고 간 적이 없다. 축제를 마치고 문자라도 보내볼까.

  어, 지금 안개가 내려오네요. 비가 온 다음에 끼는 성수산의 안개는 무지막지합니다. 지금 출발하셔야 할 것 같네요. 손상섭이 현경숙네 가족을 일으켜 세운다. 산이 머금고 있는 습기가 낮 동안의 햇볕에 증발되어 안개가 되어 호박벌로 밀려 내려오고 있다. 구름처럼, 냇물처럼. 무섭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예슬이 아빠가 예슬이를 불러 세운다. 예슬아, 이제 가 볼까.

  “요고만 더 그리고.”

  예슬이는 정자로 된 집 위로 왼쪽 위에 작은 집을 하나 더 그리고 있다. 내가 묻는다. 이건 누구 집이야?

  “엄마 배 속에 있는 콩콩이네 집.”

  우와. 다들 웃는다. 그러다가 문득 그림 속의 콩콩이네 집이 호박벌의 현실에서는 어디쯤에 있을까 살펴본다.

  왼쪽 위라면 성수산 산정이다. 잠시 산정을 바라보는데.

  거기 묘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성수산 산정 부근의 푸른 나무들은 지붕이 되고, 그 아래 암벽들은 벽이 되었다. 성수산 산정의 모습과 옆에서 막 짓기 시작하는 임수정의 모습이 그대로 일치한다. 이미 안개가 걷힌 산정에 오후의 햇살이 비추면서 완벽한 입체감이 부여된다. 그리고 자맥봉 옆의 안개와 임수봉 옆의 안개가 두 줄기로 따로 흐르다가 한데 모여 호박벌로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푸른 듯, 흰 듯, 긴 듯, 짧은 듯. 강물처럼.

 

      ᄒᆞᄅᆞ밤 비온 후의 物色이 달라디니

     구름 속 ᄲᅮ린 비ᄂᆞᆫ 그 아니 雙龍인가

     草屋下 말ᄀᆞᆫ 물이 구뷔구뷔 흘러시니

     긴 깁을 펼치ᄂᆞᆫ ᄃᆞᆺ 滄溪가 白波이라

     프르거든 희디 마나 길거ᄃᆞᆫ 넙디 마나

     山間의 汪汪ᄒᆞ니 물깁피 어이 알리

     

     하룻밤 비 온 후에 경치가 달라지니

     구름 속에 뿌린 비는 그 아니 쌍룡인가.

     초가 아래 맑은 물이 굽이굽이 흘렀으니

     긴 비단 펼치는 듯 푸른 물이 흰 파도라.

     푸르거든 희지 말지 길거든 넓지 말지

     산 사이로 물 흐르니 물 깊이 어이 알리.

 

  가사 속에서나 있었던 회룡강이 내 눈 앞으로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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