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6. 축제팀 현경숙

New-Mountain(새뫼) 2023. 6. 2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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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축제팀 현경숙

 

  “이것들이 지금까지 정리된 프로그램이에요.”

  호흡이 버겁다. 십 분도 안되는 짧은 브리핑을 의자에 앉은 채로 하였음에도 현경숙은 힘들어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지역축제팀을 포함한 문화관광과 전 직원 모두가 모인 소회의실. 회의실 벽에 붙여둔 D-20이라는 A4 종이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인다. 테이블 위의 펼쳐진 계획서들보다 펄럭이는 종이가 더 눈에 들어온다. 곧 떨어질 것 같아 위태하다.

  “호박을 재료로 하는 요리 체험 부스는 전부 일곱 개이네요. 더 늘리거나 빼거나 할 거 없죠. 그러면 이대로 확정하여 팸플릿 인쇄 넣을게요.”

  처음 팀원들이 상견례를 할 때, 현경숙은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곧 출산해야 하는데, 이리 보냈다고 투덜거렸다. 축제일이 확정되자 축제를 시작하는 날과 셋째의 출산예정일이 같다고 허탈해 했다. 하는 데까지는 같이 하겠지만, 축제 사흘간은 함께 하지 못할 거라고 통보했다. 축제 전이라도 막내가 나올 기미가 있으면, 그 즉시 팀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했었다.

  기어이 마지막 숫자 0을 쓴 종이가 풀럭하며 바람에 떨어져 나간다. 이제 자연스럽게 D-2가 되었다. 서운호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확인하는 차원에서 서로 묻고 서로 답한다.

  그걸 들으며 옆자리의 송미영은 축제 계획서의 프로그램마다 주황색, 연두색, 노란색의 형광펜을 칠하고 있다. 진행 정도를 구분하는 것이다. 각각의 색깔들이 몇 퍼센트를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안하게도 나는 호박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서운호박제의 진척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신기정 짓기나 신기정가 가사비 세우기는 어떤 색으로 칠해졌을까 궁금해서 송미영의 계획서를 넘겨다 보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회의가 잠잠 잦아질 무렵, 현경숙이 입을 연다.

  “저, 그리고요. 제가 생각한 건데요. 프로그램을 한 개 더 넣으면 어떨까 하고요. 회의 시작하기 전에 과장님이랑 팀장님께는 잠깐 말씀드렸는데, 다른 분들도 좋다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하려고요.”

  우리 팀원 중에 유일하게 한 번도 호박벌 현장에 가 보지 않았지만, 팀장 다음으로, 아니 팀장보다 더 호박벌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현경숙이다. 축제와 관련된 모든 사업에 드는 예산과 물품, 자재 신청 상황, 협조 문건 등등이 현경숙의 키보드를 통해 정리되었다. 그리고 현경숙의 컴퓨터에서 최종 호박벌의 배치도와 행사 계획안이 출력되었다.

  “일을 더 벌였다고 뭐라 하시지는 마세요. 너무 행사가 단출해서요. 지금 시설에서 더 갖추지 않고도 할 수 있는 행사를 생각해 본 거예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며, 팀원들의 온라인 오프라인 메시지들이 도착할 때마다, 이런 시골 동네에 누가 오냐, 투덜거리며, 왜 이리 행사가 많아, 하면서 더 투덜거렸었는데, 자진하여 프로그램을 추가한단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러면서 한 장짜리 종이를 돌린다.

  ‘호박 쌓기’. 행사 제목인 듯한 넉 자의 글씨가 색깔별로 큼지막하다. ‘호’자의 히읗은 아예 웃고 있는 호박이다. 매번 보는 흰 A4 사무용지가 아니라 색색의 색지에 쓰인 글자들이 그림인 듯 글씨인 듯 유쾌하다. 보통의 계획안에 쓰이는 행사의 목적, 방침, 기대효과, 전망 이런 굵은 글씨들은 하나도 없고 글씨는 달랑 넉 자뿐이다. ‘호박 쌓기’.

  그리고 글자 아래에 호박 몇 개를 탑 쌓듯이 올려놓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아래는 큰 늙은 호박, 그 위에는 좀 작은 늙은 호박, 그렇게 늙은 호박이 몇 개 올라가다가 맨 위에는 푸른 단호박이 올라섰다. 그렇게 몇 층으로. 마치 등산로마다 쌓아두는 돌탑처럼.

  “아이들 쌓기 놀이 많이 하잖아요. 호박으로 그걸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애들이 호박을 혼자 들 수 있나? 늙은 호박은 꽤나 무거울 텐데. 천승남이 궁금해 한다.

  “아, 아이 혼자 하는 거는 아니고요. 같이 온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하는 거예요. 우리 예슬이처럼 호박 음식 좋아하지 않는 애들도 많아요. 국내산과 외국산 호박 맞추기, 아이들은 이런 거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고 보니 이번 호박제에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따로 없다. 가장 비슷한 것이 호박을 이용한 퓨전 음식 정도일까. 생각해 보니 축제에서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는 것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줄고 노령 인구만 늘어가는 서운군에서 애호박은 더는 달리지 않고 늙은 호박만 호박 넝쿨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운군의 서운호박제는 그런 축제였다.

  “그냥, 애들 놀이터나 마련해 주자고요.”

  현경숙은 아침에 시댁에 맡겨두고 온 두 딸에게 전화하곤 했다. 아니 작은딸은 아직 말을 못 하니까 큰딸이 주 대상이었다. 너무 지저분하게 어지럽히지 마라, 동생 울리지 마라, 학습지는 꼭 해라. 퇴근할 때 엄마가 뭐 사갈까?

  축제 준비 초창기에는 퇴근 시간을 기다려 탈출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지만, 축제 막바지에 다다르니 현경숙도 어쩔 수 없었다. 팀원들처럼 자장면을 배달시켜 저녁으로 때우고 여덟 시 아홉 시까지 야간 근무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당연히 두 딸에게 하는 통화도 잔소리에서 그리움으로 다시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갔다. 엄마도 우리 딸 보고 싶어, 왜 밥을 안 먹었어, 하며.

  “아이들이 재미없어 할 텐데, 엄마 아빠가 오지 않겠죠?”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발상이 좋다. 그거 좋네. 호박이야 농협에 협찬해 달라고 해서 한 트럭 싣고 오면 돼. 천승남의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손상섭만 인상을 찌푸린다. 부스를 더 설치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요. 문득 D-를 올려다본다. 이미 0이 떨어져 나갔기에 D-2이다.

  “그건 저도 알아요.”

  잠시 호흡을 고르고 배를 어루만진 다음에 현경숙이 나를 넘겨다본다.

  “그 정자 있잖아요. 호박벌 근처에 세우는 거 아닌가요?”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지만, 신기정은 곧 트럭에 실려 와서, 우리가 지정한 곳에 조립될 예정이다. 그것도 세 곳에나.

  “그 정자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따로 없잖아요?”

  없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정자를 세우고, 그 앞에 가사비를 세우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문서 작업을 도맡아 하고 있는 현경숙은 모두 꿰고 있을 것이다.

  “정자에서 하면 되잖아요. 사실 우리 축제에서 가장 많은 프로그램이 요리 체험인데, 아이들이 옆에 있으면 위험하잖아요. 그리고 정자라는 게 쉬려고 만드는 게 아닌가요? 쉬면서 호박 쌓기를 하는 거죠.”

  다들 나와 현경숙을 번갈아 바라본다. 어느덧 계륵이 되어버린 신기정. 아무도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호박벌 한구석에 멀뚱하게 서 있을 신기정 세 채의 역할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딱히 하는 것이 없었다. 또 가사비까지 세우고 난 뒤에 지역축제팀에서 김영태가 할 역할은 무엇인가. 딱히 할 것이 없다. 현경숙이 배부한 자료 어디에도 내 이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저기요, 호박 쌓기만 하지 말고, 호박 그리기도 추가하는 게 어떨까요? 정자가 또 있으니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특별하게 준비할 것도 없고요. 송미영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한다.

  축제팀이 드림팀이 맞다니까. 과장이 목소리가 흐뭇하다. 크게 반대하시는 분 없으면 현 주무관님의 제안대로 가 봅시다. 에, 그리고 김영태 주무관님이 정자를 만드셨으니까 정자 관리도 주무관님이 맡으시죠. 이렇게 과장이 정리하며 호박 쌓기는 마무리된다.

  송미영이 축제 계획안의 프로그램에 ‘정자에서 호박 쌓기’와 ‘정자에서 호박 그림 그리기’를 써넣는다. 다음으로 괄호를 치고 그 안에 ‘담당자 김영태’를 적은 후에 노란 형광펜으로 덮는다.

  이제 내가 축제 현장에서 할 일이 따로 생겨난다. 하지만 성가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 앉아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덜 미안하다. 당장은 호박 쌓기가 아니라 가사비 세우기가 먼저이겠지만.

  그 전에 당장 내가 할 일이 있기는 하다. 테이블 위로 어울리지 않게 날아다니는 0이라는 숫자를 집어 들어 의자 위에 올라간다. D-2의 오른쪽에 0을 붙여 D-20으로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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