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33. 기획관 송미영

New-Mountain(새뫼) 2023. 7. 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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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기획관 기획관 송미영

 

  “문화관광과에 오래 있었어도 문화원은 처음 와 보네요.”

  문화원 현관 바로 옆의 소파에 앉으며 송미영이 밝게 웃는다.

  “여기서는 성수산이 안 보이네요. 저 산은 이름이 뭐에요?”

  처음 문화원에 왔을 때보다 산빛은 더 야위어졌다. 햇빛도 짧아지면서 누런빛이 비슷하게 내리쬐면서 앙상함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곳으로 옮겨 온 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주변 지명은 아는 게 없다. 문화원 직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냥, 앞산이래. 눈이 오면 군데군데 있는 파란 산죽이랑 어울려서 볼 만한 그림이 된다고 하던데.

  “가사 한 편 쓰더니 주무관님 시인이 다 되셨네요. 저 나무도 느티나무인가요? 멀쩡하네. 군청 앞의 느티나무는 못살 거 같다고 하던데요.”

  느티나무가 아니라 팽나무이다. 여기는 읍내만큼 태풍이 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긴 읍내에서도 태풍에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은 것은 건물 간판이었다. 여기는 간판을 세울 만한 건물 자체가 없다.

  오랜만에 보는 송미영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보인다. 내려놓은 종이컵에 붉은 립스틱이 짙게 묻은 것을 보고, 예전보다 화장이 짙어졌음을 발견한다. 청바지가 아닌 투피스 정장 차림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제 호박벌에서 뛰어다닐 일이 없어져서 그런 것인가.

  다른 이들에 대한 안부를 서로 나눈다. 촉탁직이었던 팀장은 서울로 올라가 송미영에 간간 문자 하는 정도. 손상섭은 지역개발과로 복귀하여 여전히 자기 몸을 개발하러 다닌다고. 천승남은 명퇴를 곧 앞두고 지금은 휴가 중이란다. 현경숙은 세 번째 딸을 낳고 출산휴가가 육아휴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무관님 지금 하는 일 어때요? 재미있어요?”

  지금 나는 서운호박제의 백서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서운호박제 사업보고서’라고 했다가, ‘서운호박제 백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백서가 사업보고서보다 전통적인 뉘앙스를 더 풍긴다는 군수의 아이디어를 따른 것이다. 천승남의 걱정처럼 백서는 내 차지가 되었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백서를 쓰기로 했지만, 문화관광과에서도 축산지원과에서도 다 끝나버린 서운호박제의 백서를 쓰기에는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서운호박제는 끝이 났고, 지역축제팀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지역축제팀 사무실도 없어졌다. 천승남의 예언 그대로 나만 서운호박제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백서를 마칠 때까지 이곳 문화원으로 잠시 파견을 나온 것이다. 파견에 다시 파견.

  그런데 아직 송미영에게 문화원에 온 목적을 묻지 않았다. 원래 문화관광과 직원이었으니까 그 일로 왔으려나 할 뿐이다.

  “저도 파견되었어요. 기획실로. 예전에 박민구가 앉아 있던 자리, 지금 거기 앉아 있어요.”

  뜻밖이다. 송미영을 바로 옆자리에 앉혀 두는 군수의 속셈을 알 수 없다. 싫은 소리를 아예 안 들으려고 아예 옆에 앉혀 두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하던 싫은 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고 옆에 앉혀 둔 것인가. 단정한 투피스 정장 속에서 송미영은 피곤해 보인다. 그런데 박민구는 어찌 되었나?

  “원래 축산지원과 소속이었으니까 그리로 돌아갔죠. 군수가 박민구를 쫓아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박민구 헛발질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잖아요. 엉뚱하게 그 헛발질을 내가 맞게 됐네요.”

  대강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래도 마땅한 구실은 없으니까, 문화관광과의 송미영을 기획관으로 올리는 것으로 교통정리를 끝낸 것이다. 말 많은 송미영을 기획관으로 올렸으니 명분도 세웠다. 역시 군수는 정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원래 소속이었으니까 돌아갔다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늘은 주무관님 보려고 왔어요. 말을 돌릴 필요 없겠네요.”

  말을 돌릴 줄 모르던 송미영인데, 지금까지 말을 돌린 것이다.

  “그냥 메시지나 문자로 알려드릴까 하다가. 아직 정식 발령이 난 것도 아니라서요.”

  발령, 누구의 발령?

  “주무관님도 축산지원과로 복귀 발령이 날 거예요. 아마 다음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쯤이에요. 주무관님도 들으셨겠지만, 지금 조류독감 때문에 군청이 비상이에요. 그래서 축산지원과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을 다 복귀시키고 있어요. 주무관님도 원래 축산지원과 소속이었잖아요. 의외로 그쪽 경험이 있던 분들이 많지 않더라고요.”

  예전 구제역 파동 때, 축산지원과에 근무하던 많은 직원들이 기회가 닿는 대로, 아니면 기회를 만들어서 하나둘 축산지원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은 고되었고, 보람은 적었으며, 생명에 대해 죄스러웠을 것이다. 나나 박민구는 그런 이유로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로 다시 돌아간단다. 지금 서운군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는 몇 마리나 될까. 돼지를 키우던 농가들이 오리로 많이 갈아탔으니, 군내에 닭과 오리의 숫자가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다. 예전 축산지원과에서 다루던 숫자들이 빠르게 머릿속으로 흘러간다. 그중 내가 맡아야 할, 죽여야 할 생명은 얼마나 될까.

  “군수실에서 인사팀장이 군수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자리에 나를 배석시키더라고요. 나랑 주무관님이랑 같은 팀이었다는 알 텐데. 미리 알려주라고 한 거였는지…….”

  그럼 지금 쓰고 있는 서운호박제 백서는?

  “주무관님 성격에 백서 만든다고 한참 달리실 거 같아서,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하려고 오늘 온 거예요.”

  사실 지역축제팀의 팀원들이 만들었던 자료들을 모두 모아와 컴퓨터 안에 모아두기는 하였지만, 아직 글로 엮지는 않았다. 기한을 정해놓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 이 일로 아예 내년 1월 정기인사 때까지 뭉갤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제 서운호박제 백서는 누가?

  “일단 그 일은 기획실로 넘어와요. 담당자는 저고요.”

  기획관에 백서까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 사실은요. 백서 찍어낼 예산 없어요. 독감 잡는데 군청의 남은 예산 탁탁 다 털었어요. 또 내년에는 호박제를 하고 싶어도 못 해요. 일단 군의회에서 크게 클레임을 걸고 있고.”

  서운호박제의 참여 인원은 처음 예상의 1/4을 밑돌았다. 콘텐츠 부족, 홍보 부족, 접근성 부족, 호박 수확철에 맞지 않는 축제 일정 등등을 백서에 담을 생각이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직전에 몰아닥친 태풍 때문이었지만.

  “그리고 호박벌이 원래 국유지가 아니었던 건 아시죠?

  전임 군수 문중 땅이라고 했던가?

  “거기에서 내년에는 땅 임대를 연장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대요.”

  당적이 다른 전임 군수나 대부분의 군 의원들이 현 군수의 실정을 그대로 둘 리 없다. 그렇게 현 군수의 실패한 군정으로 서운호박제를 남기려는 것이다.

  “호박벌에 있는 시설물들도 곧 철거할 거예요. 대부분 가건물이니 상관은 없는데, 그런데.”

  송미영이 잠깐 말을 끊고 내 눈치를 본다. 그러나 시선을 곧 팽나무를 보며 사무적으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정자가 세 채나 있잖아요. 걔들이 문제였는데, 결국 처분하기로 결정했어요. 자맥정은 군 노인센터에 기증하고, 임수정은 서운초등학교로 옮긴대요. 연화정은 군청 앞 밥집 터에 세우고 있는 큰 한정식집에다 판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가사비가 문제에요. 얘들은 세 개가 한 세트라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는데.”

  송미영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한다.

  “마땅히 보낼 데가 없어요. 그래서 여기 문화원으로 옮기려고요. 와서 보니까 문화원 마당이 좁기는 하네요. 그래도 창고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렇게 하자고 제가 군수에게 건의했어요. 군수가 허락하더라고요. 모레 지역 기관장 회의에서 군수가 문화원장에게 협조를 구할 거예요. 옮겨오는 데 필요한 예산은 연화정을 매각한 대금으로 충당한다고 하네요.”

  그렇게 되는구나. 문득 창밖이 어둑어둑해진다. 눈이 올 것 같다.

  “주무관님께 미리 말씀 못 드리고 진행해서 죄송해요. 워낙 일이 급하게 돌아갔네요.”

  원래 신기정이라는 정자는 없었잖아. 신기정가라는 가사만 있었지. 아니 가사의 제목도 신기정가가 아니었잖아.

  “가사비가 살아남으려면 주무관님이 신경을 쓰셔야 할 거예요. 설치될 위치 정하시고, 가사비가 실려 오면 제대로 설치되는지 살펴주세요. 가사비의 순서가 뒤섞이면 안 되잖아요. 늦어도 사흘 내로는 도착할 거예요.”

  송미영의 시선이 이름 없는 앞산을 향한다. 그러다가 한 마디를 더 던진다.

  “눈이 오네요. 서두르셔야겠네요.”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나는 신기정가를 여기에 두고 떠나게 된다. 그러면 신기정가는 그렇게 여기 문화원 마당에서 다시 잠적할 것이다. 다시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

 

     아희야 柴扉ᄅᆞᆯ 다다라 이 山 밧긔 날오소냐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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