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31. 지역축제팀

New-Mountain(새뫼) 2023. 7. 4.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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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지역축제팀

 

  어제 일요일 밤, 현대어로 옮긴 신기정가를 J대학교 정일영 교수와 가사연구원 주신호 연구사에게 메일로 보냈다. 한 번 읽어 보시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오늘 아침 컴퓨터를 켜 보고 메일함을 열어보니, 답이 없다. 주 연구사는 조금 전에 메일을 받았고, 정 교수는 아직 메일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약속한 월요일 아침, 현대어로 번역된 신기정가를 usb에 담고 원 대표에게 전화한다. 곧 출발합니다. 아, 저는 지금 협력업체에 와 있습니다. 이리로 직접 오시죠. 내비게이션에 찍으라며 주소를 하나를 보내 준다. J시 인근의 공단이다.

  차를 몰고 간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에서 이르는 곳에 원 대표가 우산을 받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가리키는 곳에 주차하고 나란히 걸어간다. 협력업체입니다. 노하우도 있고 실력도 있어요. J도에서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나무는 금요일에 이미 옮겨두었습니다. 아마 세팅이 되어 있을 겁니다. 원 대표는 공장을 둘러보는 나를 작은 컨테이너 둘을 연결한 사무실로 이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내 usb를 받아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젊은이에게 넘긴다. 젊은이는 usb를 컴퓨터에 넣고 hwp파일을 txt파일로 바꾼 다음에 종이에 출력하여 내게 건네준다. 교정 보셔야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재촉에 부랴부랴 신기정가를 교정한다. 오타 몇 개가 고쳐진다. 그리고 맨 뒤에서 두 번째 행. ‘이내 생애 정녕히 이러하니’를 ‘처사 생애 정녕히 이러하니’로 고친다. 내 선택지의 합리화를 위해서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이 말에 교정한 것을 컴퓨터에 입력하던 젊은이가 뒤를 돌아본다. 지은이는 있는데, 옮긴이가 없네요.

  그게 필요한가요? 보통은 어떻게 하나요? 젊은이에게 묻는다. 많이 넣습니다. 감수 누구, 자문 누구, 해제 누구, 이런 식으로.

이 글은 그런 분이 없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왜 선생님이 하셨잖아요. 선생님 이름이라도 넣으세요. 원 대표가 참견한다. 그러나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정 교수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사양한다. 하지만, 원 대표는 다시 권한다. 그동안 애쓰신 게 있는데.

  그럼 이렇게 합시다. ‘지은이 산중처사’, ‘옮긴이 서운군청 지역축제팀’. 대신 옮긴이는 맨 뒤에다 넣어주세요.

  내가 일러준 대로 젊은이가 입력하고 마우스를 딸깍한다. 작업이 시작되었네요. 원 대표가 나를 컨테이너 바로 옆의 다른 컨테이너로 데려간다. 이제 신기정가가 나무 위에 새겨지고 있다.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1/16줄, 2/16줄, 끌이 나무판을 파고들며 오른쪽으로 흘렀다가 다시 왼쪽으로 흘러온다. 이런 식으로 한 줄을 다 새기기 위해서는 끌이 16번을 왕복한다고 원 대표가 설명한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는 것에 맞추어 휴대전화가 울린다. 팀장이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사무실로 돌아오란다. 원 대표를 돌아보니 오늘 밤새 작업을 해야 하니까 먼저 가라고 한다. 남아서 작업 상황을 체크하고 마치는 대로 알려 준단다. 결국 16번 왕복하여 ‘신기정가’ 제목 한 줄 완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차에 오른다.

  10월의 늦은 태풍. 자동차 라디오에서는 원래 남해안으로 지날 것 같던 태풍이 진로를 바꾸어 빠른 속도로 J도의 중앙부를 관통할 것 같다고 한다. 빗방울이 차창을 매섭게 때리기 시작할 무렵에 군청으로 돌아온다.

  무거운 하늘처럼 지역축제팀 사무실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팀장이 앉으라고 고갯짓을 한다. 사무실 벽에 붙은 D-6이 가장 먼저 눈에 뜨인다. D-4가 맞는데, 경황이 없어 숫자를 바꾸지 못했다. 숫자를 바꾸는 것은 내 몫이었다. D-0가 이번 주 금요일이니까 꼭 나흘이 남았다. 그리고 내 책상 위에 한 장짜리 종이가 올려져 있다. 송미영의 글투이다.

  “계속해서 말씀드릴게요. 내일 새벽에 태풍이 우리나라에 상륙한대요. 화요일 하루 동안 남부지방을 관통해서 수요일 오전에는 완전히 빠져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서운군은 대략 화요일 오후 두 시나 세 시쯤 지나갈 것 같다고 지역 기상청에서 알려주었고요. 빠져나가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 되어. 아이, 내가 무슨 예보관도 아니고. 기상청 자료 그대로 뽑아 놓은 거니까 읽어 보세요.”

  “수요일에 태풍이 끝나면, 그러면 시간상으로는 가능한가요?”

  팀장의 걱정에,

  “빠듯하기는 하지만 예보대로만 된다면 시간을 맞출 수는 있어요.”

  송미영이 사무실에 걸려 있는 달력 앞으로 가서 날짜를 꼽아 본다.

  “시간을 맞추기는? 한 이틀 잘라먹겠네.”

  천승남의 투덜거림을 팀장이 잘라버리고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한다.

  “이미 설치된 구조물이나 부스는 바람에 피해 보지 않게 단단히 단속하세요. 내일부터 설치하려 한 부스는 모레 아침으로 미룰게요. 부스에 들여놓기로 했던 한 집기류를 부스 설치와 동시에 들여보냅니다. 전기와 전산 시설도 수요일 오후부터 시작합니다. 그동안 각종 자재나 물품은 협조 얻어 천북면 면사무소나 농협이나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즉시 이동시키세요.”

  “정신없구먼, 도배하고 있는데, 이삿짐이 들이닥치네.”

  “되겠죠?”

  팀장이 천승남에게 재차 확인한다.

  “방법이 있습니까? 태풍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이번에는 팀장의 시선이 내게 옮아온다.

  “정자와 가사비는요?”

  정자를 세우기 위한 기초는 이미 마친 상태이고, 정자의 부속물들도 거의 준비가 다 되었다. 하루에 하나씩 현장에서 조립한다고 했는데, 늦어도 목요일까지는 모두 조립할 수 있게 재촉해 보겠다. 가사비는 시작하는 거 보고 오는 길이다.

  하지만 팀장의 시선은 내가 아닌 건너편 테이블을 응시한다. 거기에는 송미영과 손상섭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주고받고 있다.

  “미영씨. 다른 문제 있나요?”

  “그게……. 태풍이 내일 통과하는데, 오늘 밤부터 비가 많이 온다고 하네요. 최고 100밀리 정도. 내일 저녁에 그치기는 한다는데…….”

  손상섭이 송미영의 말을 급하게 자르고 들어온다.

  “에, 그런데, 호박벌이 상습 침수지역입니다. 그 정도 비라면 성수산에서 흘러내린 물에 잠길 수도 있어요.”

  “몇 프로나 돼요?”

  팀장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잠길 확률? 아니면 잠길 면적?”

  천승남이 다급하게 끼어든다.

  “둘 다요.”

  팀장이 목소리가 더 다급하다.

  “3년 전인가 비 80밀리가 하루 동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호박벌의 일부가 잠겼죠. 호박제가 열리는 땅의 한 1/3 정도였나.”

  손상섭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다.

  “1/3이라면 어느 쪽이야? 미호리쪽이야, 운박리쪽이야?”

  천승남이 한쪽 벽에 걸린 조감도 앞으로 이동하며 손가락으로 몇 지점을 찍는다.

  “산 아래, 그러니까. 정자를 세우려고 하는 쪽이네요.”

  얼마나? 무의식중에 내뱉은 내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내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얼마나 잠겼는가, 아니면 이제 얼마나 잠길 것 같은가를 구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상섭은 용케 알아듣는다.

  “깊지는 않았어요. 50센치쯤. 한 이틀 잠겼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긴 게 아니고 새로 물길이 생긴 거라고 하는데 맞겠네요. 일주일 정도 흐르다가 물이 말라버렸죠.”

  “80밀리에 50센치면, 100밀리면 몇 센치에요?”

  현경숙이 정말 궁금한 듯이 묻는다.

  “그게 간단한 비례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요. 비도 와 봐야 알고, 물도 흘러내려 와 봐야 아는 거라서.”

  “50센치 정도면, 정자 아래로 정말 물이 흘러가는 거네. 정말 물이 흐르는 정자가 호박벌에 있었던 거 아녜요?”

  현경숙이 내게 묻는다. 팀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해맑은 표정으로. 이런 현경숙의 시선을 따라 천승남과 송미영과 손상섭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팀장이 일어서며 서류 뭉치를 탁탁 정돈한다.

  “더 미룰 수 없다는 것은 다 아실 거예요. 다시 얘기합니다. 바깥 작업은 즉시 중단합니다. 이미 설치된 시설이나 쌓아둔 자재들은 피해 입지 않게 협조 얻을 수 있는 데는 모두 전화해 보세요. 영태 선배, 정자나 가사비는 설치가 완료될 때까지 체크하시고요. 상섭 씨는 중장비를 동원하면 물길을 조금이나마 바깥쪽으로 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천 주무관님은 비가 그치는 대로 자재가 즉시 들어갈 수 있게 스탠바이 하시고요. 미영 씨는 상황이 바뀌는 대로 체크해서 저랑 팀원들에게 즉각 전파하세요. 그리고 경숙 씨는……. 경숙 씨는, 얼마나 남았죠?”

  “서운호박제는 나흘 남았고, 제 출산예정일도 나흘 남았네요.”

  “허, 호박둥이네.”

  천승남이 자신의 농담이 대견한 듯 크게 웃었지만,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웃음소리는 곧 묻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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