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8. 학회장 차기석

New-Mountain(새뫼) 2023. 6. 2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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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학회장 차기석

 

  책상 위에 올려둔 탁상 달력의 12일에 붉은 큰 동그라미가 둘러 있다. 이제 이틀 앞이다. 드디어 컴퓨터 속에 들어 있던 가사가 출력되어 책상 위에 올라왔다. 세상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현대어 가사이다. 그 옆에 ‘신기성가 산중처자’라는 이름의 시조도 출력하여 가사 옆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아니 다 끝나지 않았다. 남은 일이 있다. 이틀 후 남태전통건축에 갈 때, 이 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삿짐을 다 싸서 트럭에 실어 놓았는데, 갑자기 한 무더기 짐이 갑자기 더 나온 모양새다.

  가능한 선택지를 생각해 본다. 시조를 아예 버리는 것. 또는 원래 순서대로 가사는 가사대로 시조는 시조대로 나란히 싣는 것.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시조를 어느 정도 문맥에 맞게끔 가사 중간에 끼워 넣는 것.

  고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 가사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신기성가’인가, ‘신기정가’인가, ‘산중처자’인가, 그냥 미상인가. 만일 선택지에 따라 제목이 달라진다면, 경우의 수가 몇 가지나 더 나오는지 더 생각해 본다. 아, 거기에 작자 문제도 있다. ‘산중처사’인가, 아니면 미상인가. 경우의 수가 더 늘어나고 있다.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최선인지 알 수 있는 지적 경험이 내게는 없다. 혹시 선택을 잘못하였을 때, 나와 축제팀과 서운군이 맞게 될 바람이 어느 정도 세기인지도 모른다. 이때 정 교수가 떠오른다. 정 교수에게 선택을 부탁하면 좀 더 나은 결과가 가능하지 않을까. 잘못된 선택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그래서 정 교수에게 전화한다.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한다. 역시 받지 않는다. 문자로 보내려니, 좁은 휴대전화 창에 이 많은 고민을 욱여넣을 재주가 없다. 언제 읽고 언제 답을 해 줄지도 알 수 없다. 아예 학과 사무실로 전화해 본다. 그랬더니 방금 상갓집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학회 교수의 모친상이란다. 아마 오늘은 학교로 돌아오시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 장례식장의 위치를 알려준다.

  위치를 검색해 보니, J시의 인근이다. 시계를 본다. 막 다섯 시를 넘어선다. 잠깐 고민하다가 가사와 시조를 출력한 종이를 서류 봉투에 담아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내비게이션에 장례식장을 찍고, 두 시간 지나 장례식장에 도착한다.

  여러 상갓집 중, ○○대학교 하는 리본이 붙은 화환이 많은 곳에 정 교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갓집인지라 부의금 봉투를 얻어 만 원권 몇 장을 넣는다. 서운군청 김 아무개 쓰려다가, 김 아무개가 누군지도 모를 것 같고, J대학교 국문학과 졸업생 김 아무개라고 쓰려다가, 상주가 J대학교를 졸업했는지를 알 수 없어, 그냥 김영태 석 자만 써서 접수하고 문상은 생략한다.

  마침 정 교수가 밖에서 들어오다가 이런 나와 눈이 맞는다. 조교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를 구석 자리로 이끈다. 저기 계신 분들이 학회 교수님들인데, J대학교 동문들도 몇 분 계신다고 인사나 하라고 한다. 저 자리에 어떻게, 하고 사양하니, 가서 말씀 들어보면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듣게 될 거라며 끌어간다. 정 교수는 내 고민을 알고 있다.

  붉어진 얼굴빛이 많은 게 자리를 정한 지 오래되었나 보다. 여전히 소주잔이 돌고 있다. 정 교수는 그 좌중에 나를 인사시킨다. 제가 나온 대학 학과의 몇 년 후배인데, 지금은 서운군에서 일하고 있다고.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인사를 한다. 하지만 나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자리가 불편하다. 이때 좌중의 중앙에 앉은 지긋한 사람이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건넨다.

  “나 학회장 차기석입니다. 정 선생 후배라면, 내 후배도 되겠네요. 성 선생은 어찌 알고? 성 선생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오늘 상주가 성 교수라는 사람인가 보다. 학회장이라는 이는 상갓집의 상주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듯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대답하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더 많다. 몸을 돌려 술을 마셔야 하는지, 그냥 마셔도 되는지, 그것도 어렵다. 그래서 적당하게 몸을 돌려 소주잔을 털어 넣는다. 정 교수가 따라 주는 술도 마저 마시다가 아차 한다. 술을 마셨으니 서운군까지 차를 끌고 갈 방법이 없어졌다.

  학회에 대한 화제가 좌중에서 끊어지자, 정 교수가 서운군 호박 축제 얘기를 대강한다. 흥미를 느끼는지 오가던 소주잔이 멈추면서 나를 향하는 시선이 늘어난다. 정 교수가 축제의 진척 정도를 묻고, 나는 서운호박제와 신기정과 신기정가에 대해 간단하게 말한다. 곧 공장에 원고를 넘겨야 하기에 정 교수의 도움을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선택지가 있다는 말은 빼고.

  “참 공무원들 발상이라는 게.”

  학회장이 혀를 끌끌 차며 좌중에 동의를 구한다.

  “그걸 해석해서 뭐 하겠다고. 해석하면 읽을 사람이나 있나?”

  이 비석을 군수 누가 세웠다, 하고 맨 뒤에다가 군수 이름을 넣잖아요. 학회장 옆에 앉아 있던 이가 맞장구를 친다.

  “문학 작품은 연구자들에게 맡겨 연구를 해야지. 그게 무슨 축제 거리가 된다고.”

  호박으로 축제를 하는데, 거기다가 가사를 끌어들인다는 거잖아요. 누구 발상인지 기특한 것인지 발칙한 것인지. 또 옆 사람이 끌끌 혀를 찬다.

  “작품이 뭐라고 했지?”

  신기정가입니다. 정 교수가 대신 대답한다.

  “신기정가라. 아,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정 선생이 새로 발굴한 작품이라고 학회에서 소개했던 작품?”

  정 교수가 끄덕거리자 학회장은 소주잔을 다시 기울이더니 내게 건넨다.

  “그거 출처도 불분명하고, 담긴 내용도 별거 없어서 딱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없던 것으로 토론했던 거 아니었나?”

 여기저기에서 짜깁기한 작품이었죠. 다른 교수가 덧붙인다. 정 교수는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버려두었더니, 공무원들이 재활용하네.”

  학회장은 크게 웃으며, 좌중에게도 웃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우리 후배님은 그것 때문에 서운군에서 여기까지 행차하셨구먼. 정 선생, 신기 그 무언가 하는 가사, 후속 연구는 따로 하지 않았지?”

  역시 정 교수의 대답이 없자 학회장은,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정 선생은 정이 많아서 그걸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어느 역 앞에다 세운 비석에 이름을 넣었다가, 망신당한 일도 있었지?”

  다들 정 교수와 학회장을 번갈아 보며, 서먹해가는 분위기를 어색해한다. 정 교수가 뭐라 말하려 하자, 정 교수 앞에 있던 사람이 서둘러 분위기를 정리한다. 우리 회장님 좀 많이 드셨네요.

  “술은 술이고, 연구는 연구지. 우리는 연구를 해서 그 결과를 논문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거라. 문중이나 군청의 일에 기웃거리는 게 우리 교수들이 하는 일이 아니에요. 이름 욕심, 돈 욕심에 여기저기에 발을 들이밀다가는 발목이 잡히기 마련이거든.”

주위를 둘러보던 학회장의 시선이 내게 멈춘다.

  “우리 후배야,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거겠지만, 뭐 가사를 요샛말로 풀어. 그러면 그게 무슨 가사가 되나? 공무원이라서 바른말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게 중요해요. 젊은 교수들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하는 거라.”

  내가 왜 이 자리에서 학회장의 강의를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이들과 토론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필요한 것뿐이다. 하지만 선택지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또 선택지가 또 생겨났다. 차를 몰고 서운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예 글렀다. 어디에서 어떻게 이 밤을 보내야 할까.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앞에 있는 잔을 털어 넣고는 일어난다. 뒤따라 정 교수가 나온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정 교수가 장례식장 앞까지 배웅한다. 우리 학회에서는 어른인지라 말 나누기가 어려워요. 비로소 들고 온 서류 봉투가 생각이 난다. 이걸 지금 내민들, 볼 겨를이 있을까.

  그래도 봉투를 건네며 간단하게 묻는다. 신기정가를 현대어로 풀어본 것입니다. 선배님께서 보시고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정 교수가 서류 봉투를 열어 클립으로 묶인 몇 개의 종이 뭉치를 확인한다. 하지만 뭉치들을 꺼내지는 않는다. 양이 꽤 많네요. 혹 이것 중에서 내가 골라야 하는 건가요? 정 교수는 내 마음을 읽는다. 하지만 곧 서류 봉투를 닫는다. 고생 참 많으셨네요. 근데, 이게 학회 논문도 아니고, 어떤 것인들 상관이 있을까요? 후배님이 제일 마음에 드는 거로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너무 간단한 답이다. 그런 대답을 들으려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선택받고 싶어서 온 것이다. 하지만 정 교수는 선택의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정 교수가 감수했다던 시조비가 떠오른다.

  영풍군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 그거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아니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거예요. 제막식장이나 학회에서 부끄러운 말을 꺼냈던 게 내 잘못이지요.

  그래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신기정가가 유명한 작품이어서 연구가 많이 된 작품이라면, 논쟁거리가 되겠죠. 근데, 이건 연구자가 없는 작품이에요. 이제는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이 후배님이 될 텐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어요.

  혹시 나중에라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이본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춘향전이 몇 가지나 있는지 아세요. 수십 가지에요. 여러 신기정가 중에 하나를 가사비에 올렸다고 하면 돼요.

  그렇게 마무리된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정 교수가 나를 불러세운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가사비에 내 이름을 넣지는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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