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소설; 신기정을 찾아서

27. 축제팀 천승남

New-Mountain(새뫼) 2023. 6. 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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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축제팀 천승남

 

  신기정은 없었는데, 신기정을 세워야 한다. 신기정가가 가사비인지 시조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에 신기정가를 띄워 놓았지만, 딱히 한 것이 없다. 볼펜 끝만 물고 화면을 응시하면 날짜와 시간이 찍히는 화면보호기가 켜진다. 마우스를 흔들어 다시 신기정가를 띄우면 잠시 후에 화면보호기가 켜진다.

  지금 나는 신기정가를 내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정가의 작자, 산중처사로 빙의되어 가고 있다.

  다시 신기정가 안으로 들어간다. 산중처사, 아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가사의 작가는 신기정가를 지으며, 아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사를 지으며, 성수산 아니 불타산에서 행복했을까.

 

     杜鵑이ᄂᆞᆫ 우러녜니 巖花ᄂᆞᆫ 반만 픠고

     殘花 다 딘 後의 綠陰이 기퍼간다

    서리친 丹楓 남기 ᄭᅩᆺ도곤 불거시니

     造物이 헌ᄉᆞᄒᆞ야 氷雪에 잠겻에라

 

  주저리주저리 춘하추동을 늘어놓는 다른 가사와 달리 신기정가의 춘하추동은 간단하다. 단 넉 줄로 1년을 나타냈다. 1년을 넉 줄처럼 기쁜 마음으로 살았을까, 넉 줄을 1년처럼 느긋하게 살았을까. 그도 아니면 잊고 싶은 것을 다 지워버리니 저 넉 줄만 남은 것인가.

  분명한 것은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것. 내 시간과 산중처사의 시간은 다르다. 남태전통건축에 가사를 넘기기로 한 날짜가 사흘 앞이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무엇 때문에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매시간은 너무 지루하다. 하지만 너무 지루한 시간이 모인 하루하루는 너무 급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런 시간의 중간에 휴대전화가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아직 식사 전이지. 점심이나 같이할까?”

  전화기 너머로 천승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전에 호박벌 현장에 나갔었는데, 돌아온 모양이다.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하긴 앉아 있더라도 더는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정지시킨다.

  “안타까운데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있는데 슬프기도 해.”

  군청 앞에서 만난 천승남이 나를 이끈다. 방향이 밥집 쪽이다.

  “아직 소식 듣지 못했지?”

  밥집 앞에 이르러 천승남은 할미가 얼마 전에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간 정정했었는데, 갑자기 떠났고, 며칠 밥집이 문을 닫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군청 직원들이 수소문하여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연세가 있기는 했어도 아직은 가실 나이가 아닌데.”

  그러고 보니, 할미의 나이가 얼마였는지, 그동안 지병이 있었는지, 남긴 자손은 몇 명이나 되는지, 할미의 밥을 숱하게 얻어먹었어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어제 다시 문 열었대. 가 본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한번 가 보자고 불렀지. 할 말도 있고.”

  삐꺽거리는 미닫이문을 여니 외국인 이주 여성이 맞는다. 어서 와. 지난번에 본 적이 있는 할미의 베트남 조카며느리이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는 이제는 못 먹을 것 같네. 할미가 가고 어제부터 베트남 새댁이 쌀국수를 한다던데. 닭고기 국물과 쇠고기 국물 두 종류로만. 이 집 메뉴는 두 가지를 넘어가지 못하는구먼.”

  할미가 없어도 건물은 여전히 할미처럼 낡았다. 마지막으로 밥집에 왔을 때가 보름 전이었나. 그동안 이 밥집에 많은 일이 있었다. 보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메뉴판도 보인다. 창문에 누가 써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삐뚤빼뚤한 글씨로 쌀국수 개시라고 붙어 있다. 오늘 우리가 첫 손님이었을까. 베트남 새댁인 젊은 새 사장이 반가운 얼굴로 우리 앞에 선다. 뭘 줄까?

  “이런 제길, 한국말을 제대로 배웠어야지. 할미 말투 그대로이네. 손님한테 반말은.”

  천승남이 음식 맛이나 보자 하고 닭고기 쌀국수와 쇠고기 쌀국수를 하나씩 시킨다. 기다리면서 식당 안을 둘러본다. 그때보다 더 낡아졌다. 허름한 테이블과 의자, 실내 장식이 할미 때처럼 여전히 늙어 있다. 문득 민서와 함께 갔던 W시의 쌀국숫집이 떠오른다.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입맛. 그곳은 여기와는 달리 젊어 있었다.

  천승남도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장사를 계속하려면 뭔가 바뀐 게 있어야 하는데. 옛날 할미가 할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베트남 새댁이 쌀국수 두 그릇이 들고 온다. 메뉴가 바뀌었으니 그릇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새 그릇이 아니다. 심지어는 내 그릇과 천승남의 그릇도 다르다. 하나는 도자기로 된 그릇이고, 하나는 냉면집에서 쓰는 스테인리스 그릇이다.

  “제대로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네. 맛은 어떠려나.”

  쫄깃함은 조금 떨어지고, 향신료가 더 들어간 듯 맛과 향이 강하다. 먹을 만하였지만, 익숙한 맛이 아니다. 베트남에 가 본 적이 없기에, 천승남과 먹는 쌀국수와 민서와 먹었던 쌀국수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베트남 쌀국수 맛인지 알 수 없다.

  “내 입맛에는 별로네. 그쪽은 어때?”

  천승남이 내 그릇의 닭고기 국물을 떠 맛을 본다. 나도 따라 천승남의 그릇에서 소고기 국물을 떠먹어 본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치다가 동시에 숟가락을 놓는다. 나도 천승남도 국수를 반이나마 넘게 남긴다.

  “여기 카드 돼?”

  새댁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할미는 카드를 받지 않았다. 카드 단말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 안 받는다고 했는데, 군청 바로 앞에서 장사하며 카드를 받지 않은 것도 대단한 용기였다. 노인네니까 하고 그냥 묵인해 주었지만, 베트남 새댁에게까지 묵인될 것 같지는 않다.

  “사업자 등록은 하고 장사하나 몰라.”

  천승남이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지만, 벽에 붙어 있는 것은 낡은 달력뿐이다. 축제가 이제 보름 남았다.

  “제길. 사람만 바뀌고, 메뉴만 바뀌었지 나머지는 그대로네. 바뀐 게 없어.”

  천승남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새 사장을 불러 세우고 이것저것 일러준다.

  “잘 들어. 사업자 등록증 붙여. 카드도 받아야 해. 그리고 음식값도 써 놔야 하고, 그리고 또 뭐냐. 음식 원산지 표시, 그것도 해야 해. 장사 혼자 하는 거야?”

  그 말은 알아듣는다. 왔다 갔어. 남편 서울 갔어.

  “갈 길이 머네. 멀어. 잘 들어요. 내가 지금 한 말들 적어줄 테니까, 나중에 남편이 오면 꼭 해야 해. 밖에 있는 담배 피우는 데도 이제는 치워야 하고.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해. 안 그러면 영업정지 먹어요. 알겠지?”

  천승남이 달력에다가 이것저것 적는다. 사업자등록증, 카드단말기. 가격표시, 원산지표시.

  “꼭 해요.”

  치우라고는 했지만, 천승남과 나는 여전히 사랑채에 나와 담배를 피워 문다.

  “바뀌기가 쉽지 않겠구먼. 할미는 그럭저럭 버티었는데, 이 색시는 고향도 먼 데다가, 시간까지 옛날에 머물러 있어. 이 집에 앞으로 웬만해서는 안 오게 될 것 같은데. 아니 이 집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지?”

  천승남이 밥집을 돌아본다.

  “세상이 바뀌어 가는데, 같이 바뀌지 않으면, 바뀐 세상에서 어떻게 사나. 나는 바꿀 자신이 없어. 그래서 내가 그만두려는 거야. 이미 꼰대인데, 더 꼰대가 되면 안 되지. 남들 바뀌는 거 가지고 뭐라 해도 안 되는 거고.”.

  담배를 비벼끄고 일어선다. 참,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거.”

  천승남이 다시 자리에 앉는다.

  “말 안 할까 하다가 하는 거야. 오전에 호박벌에 군수가 왔어. 격려차 방문했다고 하는데, 일 제대로 하나 감시하러 왔겠지. 둘러보다가 민 팀장을 부르더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축제가 끝난 뒤에 축제 사업보고서를 구체적으로 남기라고 지시하더군.”

  팀장의 촉탁 기간이 언제까지였나?

  “팀장이 자기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서울로 올라가니까, 송미영이 잘 정리할 거라, 그랬지.”

  그랬더니?

  “갑자기 군수 표정이 싹 바뀌던데. 아마 자기 치적이 듬뿍 들어간 사업보고서가 갖고 싶은데, 송미영이 그걸 쓰면 어떻게 되겠어.”

  등나무 그늘 사건, 군수실 사건 등등이 지나간다. 천승남의 시선이 내게 머문다.

  “군수 표정을 살피던 박민구가 옆에서 그래. 김영태 주무관에게 맡기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더라고.”

  팀장은 뭐라고 했을까?

  “팀장? 팀장은 시큰둥하게, 본인 뜻에 따라야지요, 그러고 말던데.”

  천승남이 내 팔을 군청 쪽으로 이끈다.

  “갑자기 팀장이나 박민구에게 들으면 당황스러울까 봐 말하는 거야. 말할까 말까 망설이기는 했는데.”

  나란히 등나무 그늘에 앉는다.

  “싫으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라고. 좋으면 좋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축제 끝나고 혼자 남아 팀장도 하고 팀원도 하는 거야. 팀장은 서울로 돌아갈 거고, 송미영이랑 손상섭이는 원래 부서로 복귀할 거고, 현경숙이는 3년 휴직 들어가고, 나는 영영 휴직 들어간다고. 그럼 팀에 누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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