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소설과 산문

다시 꺼내 읽는 김훈의 '자전거여행'

New-Mountain(새뫼) 2019. 5. 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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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 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 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서울의 종묘 숲이나 경주의 계림, 반월성의 숲은 신성한 숲이다. 그 숲들은 역사의 정통성과 시원始原의 순결을 옹위하고 있다. 피고 또 지는 왕조들은 썩어서 무너져 갔어도, 봄마다 새 잎으로 피어나는 그 무너진 왕조들의 숲 속에서 삶은 여전히 경건하고 순결한 것이어서 종묘의 숲과 계림의 숲은 그 숲에 가해진 정치적 치욕에 물들지 않는다. 그 숲은 숲이 아니고 산 속 무인지경의 숲이 아니라, 사람 사는 동네와 잇닿은 마을의 숲이다. 울창한 숲이 신성한 숲이 아니고, 헐벗은 숲이 남루한 숲이 아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숲도 초라하지 않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현실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불온하다.

 유림儒林의 숲은 불온하고, 유가적 가치와 질서로부터 소외되어 숲으로 모여든 무리로써의 산림山林은 더욱 불온하고, 소외된 무장 집단으로서의 녹림綠林의 불온은 이미 작동하는 불온이다. 가장 늙은 숲이 가장 새로운 숲이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이 새로움이 숲의 평화일 터인데, 숲은 안식과 혁명을 모두 끌어안는 그 고요함으로서 신성하다. 시간을 소생시키는 숲의 새로움은 이퇴계와 로빈후드를 동시에 길러내고도 사람 지나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물리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몰가치하다. 물리적 자연이 그 안에 윤리적 가치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것은 영원한 인과법칙의 적용을 받는 자연과학의 자리일 뿐이다. 이 무정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시켜 주는 것은 삶의 신비다. 사람의 언어가 숲의 작동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숲이 사람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까닭은 숲에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숲이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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