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소설과 산문

이명선의 '홍경래전' - 14. 정주 농성

New-Mountain(새뫼) 2022. 11. 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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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定州(정주) 籠城(농성)

 

송림의 패전으로 남군은 정주로 몰리고, 사송야의 패전으로 북군은 그 중심을 잃게 되어, 이미 대세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다. 허황, 김견신을 대장으로 하는 의주의 의병은, 정월 십일 일에 사용이 지키는 양책참을 쳐 회복하고 더욱 기세를 높이며 남하하고, 사송야 싸움에 이긴 관군은, 이와 전후하여 선천을 쳐 회복하고, 의기충천하여, 북쪽으로 처 올라왔다. 남하하는 의병과 북행하는 관군 틈에 끼이어, 잔병을 거두어 사이 길로 숨어서 정주성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때는 청천강 이북의 팔읍을 점령하여 평안도 전부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를 보이든 경래의 혁명군도, 기병한 지 이십여 일에 작전의 실패와 반역자의 속출로 도처에서 패퇴하여, 정월 이십 일경에는 정주성 단 하나를 보존하게 되었다. 이거나마 각처에서 관군과 의병이 칠팔천이나 모여들어 겹겹이 둘러쌌음으로, 정주성의 운명도 이미 결정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주성이 함락함에는 전후 사 개월이나 걸리었다. 신미년(辛未年) 십이월 십팔일 기병한 이래, 임신년(壬申年) 사 월 십구일 북장대(北將台)가 폭발하여 정주성이 완전히 함락한 날까지 통산하면, 실로 다섯 달에 걸치는 것이다.

정주성 공방전(攻防戰)에 있어서의 양군의 가지 가지의 고심, 교묘한 작전의 안출, 새로운 무기의 발명 등, 이야기 거리가 많으나, 여기서는 일일이 그것을 기록할 여유가 없다. 다만 불과 이삼천밖에 되지 않는 경래의 혁명군이, 고립 무원한 외로운 성을 지키어 사 개월이나 싸워나갔다는 것은 그들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운명의 공통됨을 자각하여, 참으로 일치 협력하여 가장 대담하게, 가장 용감하게 싸운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그리고 여기서도 홍총각이 제일 용감하게 초인적인 활약을 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정주성의 함락과 함께 경래 군칙, 홍총각, 희저, 사용 등은 어찌 되었나?

— 이 중에서 사용은 제 이회 공격전에 전사하고, 그 이외는 정주성이 함락할 때에, 혹 은 성과 운명을 같이하고, 혹은 관군에게 사로잡히어 서울로 호송되어 참혹한 사형을 받았다.

경래는 정주성과 운명을 같이 하여, 장렬한 전사를 하였는데, 그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는 이 중에는, 혹은 그때 죽은 것은 가짜 경래고, 진짜 경래는 거기서 빠져서 도망하여 산속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경래가 죽었던 살았던, 용이 되려다가 용이 못된 것만은 사실이며, 용강(龍岡) 이시미는 기어이 이시미에 그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一九四七, 一. 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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