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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의 '홍경래전' - 13. 반역자

New-Mountain(새뫼) 2022. 11. 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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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反逆者 (반역자)

 

경래는 송림 싸움에 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아주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성곽이 견고하여 지키는데 유리한 정주에 우선 임시로 입성하여, 여기를 지키면서, 북군의 남하하는 것을 기다리고 창성(昌城) 강계(江界) 등지의 구원병을 재촉하여, 다시 남진을 꾀하자는 것이, 경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제 상처도 완전히 나아서, 직접 진두에 나서서 지휘하게 되면, 사기(士氣)도 왕성해지겠고 전국을 다시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창시와 송지염(宋之濂)이, 둘이 경래 앞에 나타나 난국의 타개책을 말하였다. 송지염은 원래 강계(江界)의 향임(鄕任)으로, 만주에 있는 중국 상인들과 어울리어 크게 장사를 시작하였다가, 수천 냥의 공금만 허비하고 이것을 갚을 길이 없어 고민하든 차에, 마침 다복동에서 경래가 기병하여 그 형제가 매우 우세하다는 소문을 듣고, 전부터 친교가 있는 창시를 찾아서 경래의 진에 참가하게 되었던 사람이다. 외양이 퍽이나 늠름하게 생기고, 언변이 능란하여, 어디다 내놓아도 단단히 한목 보는 사람이다. 능청맞게 협잡질을 잘하여,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속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송림 싸움에서 경래가 패하여 정주로 밀려들게 되자, 지염은 창시를 쏘삭거리어 자기를 호병(胡兵)에게 후원을 청하러 가는 특사로 하여달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자기가 그전에 장사 관계로 호인들과도 교제가 많아서, 자기가 가기만 하면 성공할 자신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둘이 경래 앞에 나타나서 이것을 말하였을 때에, 경래는 시험 삼아, 근자에 만주 우모령(牛毛嶺)이라는 곳에 새로 일어나서, 그 지방 일대를 점령하였다는 마적단의 이야기라든가, 칠팔 년 전에 자기가 직접 가서 만나본, 마적단의 두목 정시수(鄭始守)의 최근의 동향이라든가,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지염은 청산유수처럼 한마디 막히지 않고,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만추의 지리에도 능통하고, 말도 통하고, 그러한 마적단 두목들과도 이미 그 전부터 다소 친교가 있는 듯하였다.

경래는 지염이 요구하는 대로 일만 냥이나 되는 대금을 주어, 되도록 속히 그들을 안내하여 올 것을 부탁하였다. 지염은 소 여러 필에다가 돈을 나누어 싣고, 그날로 북쪽을 향하여 총총하게 떠나갔다.

그리고 창시 자신은, 자기가 북군에 가서 남군의 곤란한 사정을 전달하고, 또 북군의 작전을 되도록 빨리 끝마치도록 독촉하여, 의주까지 함락시키고 서 바로 남하하도록 지도하겠다고 말하였다. 총참모로 있는 군칙이 이번 작전에 실패하여 곤란한 입장에 있는 이때에, 참모의 자리에 앉은 자기로서, 하등의 적극적인 타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래는 창시의 이 말 대로, 그를 북군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때까지 대체로 순조롭게 진출한 북군이 그 작전을 끝마치고 빨리 남하한다는 것은, 경래로서는 제일 기대하는 바이었다. 아니, 이제 와서는 이 난국을 타개하여, 다시 안주, 평양으로 내밀게 되고 안 되는 것은 북군의 작전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창시도 그날로 출발하여, 부원수 김사용이 머물러있는 양책참(良策站)으로 향하였다. 양책참은 선천서 의주로 통하는 대로상에 있는 요지로, 사용은 제초와 함께 여기서 의주 공격의 작전을 의논 중이었다. 창시는 남군이 송림 싸움에 패하여 정주에 입성하여, 여기서 관군을 막고 있으며 북군이 의주를 함락시키고 빨리 남하하기를 고대고대 한다는 것을 전하였다. 그리고 덮어놓고 의주 공격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북군의 입장도 그리 용이하지 않았다. 각지에 소위 의병(義兵)이라는 것이 이러나, 이미 한번 점령한 지역도 새로운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게다가 남쪽에서 수천 명의 관군이 밀고 올려온다면, 의병의 기세를 더욱 돋굴 것은 환 - 한 일이었다.

사용은 제초와 창시와 곰곰이 생각다가, 우선 제초를 다시 선천으로 내려가, 남군과 북군과의 연락을 확보케 하고, 사용과 창시는 허항(許沆), 김견신(金見臣)을 중심으로 한 의주의 강력한 의병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 이외에는 아무 방법도 없었다.

한편 관군에서는 이십구 일에 송림 싸움에 이겨 가지고, 심십 일에는 단숨에 박천 가산을 회복하고, 경래의 근거지 다복동을 습격하여 민가도 병사도 모두들 불 질러버렸다. 그리고 연하여 태천을 회복하고, 정월 초삼일에는 경래가 지키는 정주성 밖에 도착하여, 정주를 포위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정주도 단숨에 회복하려고 세 차례나 군사를 재촉하여 돌격하여 보았으나, 성 밑까지 다다르자마자 성 위에서 큰 돌을 내려 굴리고 뜨거운 물을 내려 부어, 죽어 넘어지는 자, 부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세 차례 다 많은 희생만 내고 헛되이 물러섰다. 그리하여 당초의 방침을 변경하여, 정주성은 우선 포위한 채로 내버려 두고, 정주 이북의 북군을 공격하여, 먼저 이것을 섬멸하여 버리기로 정하였디.

이 작전에 의하여, 정주 바로 북쪽에 있는 곽산을, 초팔일에 후원장(後援將) 이영식 (李永植)과, 우익장(右翼將) 오치수(吳致壽)가 이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이영식은 송림 싸움에도 큰 공을 세웠었으나, 곽산은 이번에 제가 원 노릇을 하다가 혼이 난 곳이라, 그 원한을 풀기 위하여, 제가 자원하여 출동한 것이다.

이천 명의 대군이 불의에 쳐들어오니, 곽산을 시키든 소수의 수비군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방도가 없었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유진장(留鎭將) 박성신(朴星信)이 소를 잡고 술을 빚어, 군졸들과 한참 즐기든 판이라, 제대로 싸워 보도 못하고 참패하여, 순식간에 곽산은 관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성신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선천으로 달려가서, 제초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후원을 정하였다. 제초는 이날 막, 남군과 북군의 연락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책참에서 내려온 판이었다. 몹시 피곤하고, 또 군졸도 그 수가 삼사백에 불과하였으나 제초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곽산으로 향하여 말을 달리였다. 곽산 싸움에서 도망갔든 군졸들도, 제초의 후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모여들어, 그럭저럭 천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곽산을 회복한 관군은, 구일에 좌익장(左翼將) 윤욱렬(尹郁烈)이 인솔한 칠백여 명의 군사가 새로 도착하였음으로, 도합 이천칠백 명에 달하였다. 수로서 거의 삼배 가 되니, 양군이 부닥칠 때에, 관군이 절대로 우세할 것은 처음부터 뻔 - 한 일이다.

곽산읍 서편에 사송야(四松野)라는 들이 있어, 양군은 여기서 부닥쳤다.

이 싸움은 송림 싸움 이상의 대격전이며, 또 북군이 유지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되는 - 북군의 운명을 좌우하는 큰 싸움이었다. 제초는 진두에 나서서 필사의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워낙 수가 부족하여, 한참 싸우다 보니 제초의 군사는 관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평야에서는 무기에 별차가 없는 이상, 결국 그 군사의 수효의 다과가 대세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제초는 대혼란을 일으키어 이리저리 닫는 군졸을 모아 이끌며 또 얼마 동안 싸워보았으나, 시각이 지날수록 더욱 혼란을 일으키어, 독력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초는 싸움을 단념하며, 양책참에 가서 다시 진용을 정비하여 내려옴만 같지 못하다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칼을 휘둘러 관군 오륙 명을 한꺼번에 베어 넘기고, 그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중도에서, 돌연 매복하고 있던 관군의 일부대가 나타나 길을 딱 막았다. 제초는 필사의 힘을 다하여, 길 막는 자들을 베이며 몸을 날리다가, 말 등자가 끊어지며 말에서 뚝 떨어졌다. 말에서 떨어져서도 한참 접전을 하였으나, 겹겹이 싸고 덤비는 수백 명의 군사를 혼자서 막아낼 길이 없어, 기어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거짓 꾀여서 이영식의 진까지 끌고 가, 거기서 칼로 베어 죽였다.

사송야의 패전과 제초의 죽음이 한번 전하여지자, 그때까지 파죽지세로 연전연승하던 북군은 모두 낙심천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초는 북군의 선봉장으로 가장 용감히 싸웠으며, 북군이 그처럼 기세를 올린 것도, 사실은 제초의 공로에 힘입은 바 많았다. 창시는 사용을 보고,

“이제는 새로운 무슨 방도를 강구하여야지, 그대로는 중과부적이라, 접전하는 대로 패할 것이니, 애매한 장수와 군졸만 죽이지 맙시다. 창성(昌城)에 신도회의에도 참가한 내응 동지가 하나 있어, 산간의 선방포수(善防砲手)들을 영솔하고 있는데, 이제는 내가 가서 그 선방포수들을 다리고 오는 수밖에 없겠오. 이것은 대원수께서도 전부터 계획했던 것으로, 지금 다시 대 원수께 여쭈어볼 것도 없을 것이오. 또 사세가 위급하여 그럴 겨를도 없겠오.”

하고, 사용의 동의를 얻어, 군졸을 둘을 거느리고 창성으로 향하여 떠나갔다.

창시가 선방포수를 동원하기 위하여 창성에 가겠다는 것은, 물론 전연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창시의 심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정주서 송지염(宋之濂)과 상의하여 떠나올 때에, 이미 둘 사이에는 은연중에 한 개의 약속이 있었다. 그것은 송림 싸움에 패한 것으로 보아, 다시 형세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둘이 각각 떠나가서 되는 대로해보다가, 요행히 전국이 바로 잡히면 경래의 편에 다시 가담하고, 그렇게 안되면 그 막대한 돈을 가지고, 산속에 숨어버리든지, 시침이 딱 떼고 관군의 편을 들든지 하자는 것이다. 어느 편이 이기든지, 어느 편이 지든지, 형세를 잘 살피어 우세한 편에 가담하자는 것이다. 글깨나 배워서 약아빠진 자들이란, 결정적 단계에 이르면 이처럼 동요하고, 반역 행위도 사양치 않는 것이다.

창시는 구성(龜城) 지경에 이르러, 길에서 행동이 수상한 자를 하나 만났다. 군졸을 시켜 잡아다가 족치니, 그는 철산 사는 조문형(趙文亨)이라는 자로 사용의 진에 있다가 도망하여 이리 피해온 것이 판명되었다. 창시는 군법 위반이라고 바로 베이려다가, 그자가 하도 애걸복걸하고, 또 저 자신의 심정이 심정인 만치, 그대로 다리고 창성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며칠 후에 날이 저물어 산속에 막을 치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창시의 호주머니에 은패(銀牌)가 번적거리는 것을 보고, 문형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은패는 내응 동지들 사이에 미리 다 배부되어 있어, 무슨 연락할 일이 있어, 서로 만날 때에는, 이것을 내 가지고 맞추어 보아, 부합하면 서로 의심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 앞에 내놓지 않는 법이다.”

창시는 은패를 들고서 이처럼 반 자랑삼아 설명을 하고, 다시 깊숙하게 감추고, 들어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액운이었다. 문형은 이 은패를 보고, 이런 것을 가졌으니 필시 상당한 간부일 것이라, 이 목만 베어 가지고 관군에 갖다가 바치면, 많은 상을 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자는 체하고 누워 있다가 몰래 창시 칼을 빼어, 한칼에 창시의 목을 베어 들고 발꿈치를 돌리어 서쪽으로 도망질하였다.

문형이 선천에 이르러, 창시의 목을 장차 관군에게 바치려 할 때에, 마침 선천부사 김 익순(金益淳)을 만나, 일천 냥을 받고 그에게 팔았다. 익순은 이 창시의 목을 들고 정주의 관군에 나타나, 이것은 자기가 고심참담하여 베인 것이니, 이것으로 전일에 사용에게 항복한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기어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탄로되어, 익순도, 문형도 모두 관군에게 사형을 받고 말았다.

이리하여 반역하려다가 미처 반역하지 못하고 죽은 창사의 목을 중심으로 하여 양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든 두 사람의 목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한편 호병의 후원을 청하러 만주를 향하여 간 송지염(宋之濂)은, 일만 냥의 대금을 가지고 우선 고향인 강계(江界)에 들러, 집어쓴 공금 삼천 냥을 싹 다 갚아버리었다. 그리고서는 양진의 형세만 관망하고 있다가, 경래 편이 불리하여, 북군도 멸망하고 외로이 정주성에 농성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백팔십도로 전환하여 나머지 돈으로 대대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가지고, 관군에 가담하여 정주성 공략에 단단히 한몫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호병을 초청해올 중대 사명을 띤 경래의 전권대사는, 하룻밤 사이에 이를 배반하고, 도리어 경래의 혁명군을 에워싸고 총칼을 겨누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역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지염은 이 전쟁을 통하여 돈벌이도 제일 잘하고, 공도 크게 세운 최대의 선공자가 되었다.

(후에 어떤 사람이, 지염의 이러한 파렴치한 반역 행위를 비난하니, 일대의 반역자 지 염은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내가 처음에 경래의 혁명군에 가담한 것은, 어떻게 해서 이 혁명군을 때려 부술까, 그 기밀을 탐지하기 위하여 가담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관군 편이지, 절대로 경래의 편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그때 일만 냥이라는 대금을 꺼내오지 않았더라면, 경래는 그 돈의 힘으로 훨씬 더 오래 버티었을는지도 모른다.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듯이, 경래의 혁명군을 때려 부수려면 그 진중에 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반역 행위는 언제든지 합리화할 수 있으며, 또 합리화할 구실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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