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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의 '홍경래전' - 12. 송림싸움

New-Mountain(새뫼) 2022. 10. 3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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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松林(송림) 싸움

 

이십 일 밤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어 혼수상태에 빠졌던 경래는, 그 이튿 날 저녁에야 겨우 의식을 회복하였고, 이십이 일 점심때부터 겨우 정신을 차리어 들어 누운 채로 군칙 등과 만나서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명령한 것이, 송림에 있는 홍총각에게 밀서를 보내어, 안주 공격을 중지시키는 일이었다. 자기들도 모르게 이러한 커다란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군칙은 펄펄 뛰며, 홍총각을 곧 불러다가 규율을 위반한 책임을 추궁하자고 서둘렀다. 경래는 책임을 추궁할 의사는 없었으나, 대린 이하 네 명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안주 병사 이해우가 무슨 커다란 모략을 하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음으로, 어쨌든 우선 홍총각을 박천으로 부르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아서, 밀서 속에다가 그러한 명령을 내리었던 것이다.

홍총각이 박천에 도착하여 대본영에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군칙은 가장 준열한 태도로 홍총각의 규율 위반을 문초하러 들었다. 군칙 편으로서는, 그 전에 회의가 있을 때마다 안하무인의 불손한 태도로 자기들을 모욕하고, 고집을 세우든 홍총각을, 이번 기회에 단단히 혼을 내어, 버릇을 가르쳐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홍총각은 조금도 굴복지 않고, 도리어 이때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맹렬하게 군칙에게 덤벼들었다. - 전쟁이라는 것은 원래 위험한 것으로, 위험한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처음부터 전쟁에 참가한 것이 잘못이다.

관 쓰고 강도질을 하는 원놈을 하나둘 죽였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선봉장에 임명된 사람이 조금 대담한 기습작전(奇襲作戰)을 하려 한다고 벌벌 떨고 있으니, 이래가지고 무엇이 된단 말이냐? 이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고 안전한 길만 찾다가는, 도리어 우리의 목이 달아나고, 적에게 먼저 공격을 받을 것은 생각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내가 총참모 네 내가 제갈량이네 하고 책상 앞에만 엎드려 있어야, 일이 될 턱이 없다. 그러한 총참모 밑에서는 선봉장 노릇은 절대로 못 하겠으니, 처벌하고 싶거든 처벌하고, 마음대로 하라!

홍총각은 이 이상 더 바랄 것도 없고, 또 상관이라고 꺼릴 것도 없어서, 속에 있는 대로 울분을 한꺼번에 막 쏟아놓았다. 군칙은 너무나 기가 막히어, 바로는 대항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윽고 경래가 보다 못하여

“우리는 지금 지극히 위태로운 시기에 놓여있으니, 그처럼 우리 내부에서 총참모와 선봉장이 서로 이러니저러니 언쟁할 여유가 없는 것이오. 조그마한 과실은 서로 묻어 주고 가려주어, 될 수 있는 데까지 서로 협력하여, 이 난국을 앞으로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 이것이나 상의하기로 합시다.”

하고, 둘을 뜯어말리어, 이야기의 방향을 들리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곧 제게 안주 공격의 명령만 내려주시오. 단번에 이해우라 는 놈의 목을 베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 반역자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만인의 눈앞에 보여주겠습니다.”

총각은 기세가 등등하게 여전히 안주 공격을 주장하였다.

“북군이 남하하는 것을 기다리어 우리의 전 병력을 기울여서 공격하여도 함락될지 어떨지가 의문인데, 선봉장이 혼자 백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안주를 공격한다는 것은, 선봉장 혼자는 아무리 용감하여도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대원수께서 이처럼 누워 계신 데, 그러한 위험한 작전을 세우는 것은, 내가 총참모로 있는 한, 용인 못하겠습니다.”

군칙은 또 한사코 반대하였다. 홍총각으로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이 이상 군칙의 무리들과 다투는 것은 지긋지긋하였고, 거의 피치 못할 운명인 것도 같았다. 또 경래로서도 저 자신이 일어나도 못하고 누워 있는 몸으로 무슨 새로운 대담한 작전을 운운할 여지가 없었다. 결국은 처음 작전대로 북군의 남하하는 것을 기다리어 안주 공격을 개시할 것을 -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에도 주위에 있는 소도시에 대한 작전은 착착 진행되었다. 더구나 김사용의 북군은 눈부신 진출을 계속하였다.

사용은 이십이 일에 정주에 입성하였다가, 이십사 일에는 다시 북행하여 선천(宣川)으로 향하였다. 이때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은, 김봉관(金鳳寬)의 진술로 철산(鐵山)에 있는 내응 동지 정복일(鄭復一)을 잡아 족치다가, 의외로 대규모인데 겁이 덜컥 나서, 검산산성(劍山山城)의 방비를 검열하겠다고 핑계하고, 선천읍을 버리고 그리로 도망가버렸다. 그리하여 이십사 일 당일로 사용은 단숨에 선천읍을 완전히 점령하고, 검산산성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익순을 잡아 내리어 정식으로 항복을 받았다.

사용은 내응 동지 유문제(劉文濟)로 유영장(留營將)을 삼고, 자기는 다시 철산(鐵山) 으로 향하였다. 철산에는 정경행(鄭敬行), 정복일(鄭復一) 같은 유력한 내응 동지들이 그 전부터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유포시키어 읍내의 인심을 동요시키었음으로, 철산부사 이장겸(李章謙)은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십오 일에 선천의 동정을 몰래 살피어보려고 선천 지경으로 향하였다. 그때 마침 선천읍 옥중에서 나와서 철산으로 향하든 복일에게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사로잡히고, 이내 철산읍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 바로 북쪽에 있는 용천(龍川)도 이와 전후하여 함락하였다. 용천부사 권수(權琇)는 읍의 북쪽에 있는 용골산성(龍骨山城)에 의거하여 반항하여 싸우다가, 이태 만에 성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도망가 버렸다.

북군은 이처럼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올려 밀었는데, 한편 남군도 이십삼 일에는 박천의 북쪽에 있는 태천(泰川)을 점령하였다. 태천현감 유정양(柳鼎養)은, 도저히 단독으로 막아내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영변(寧變)의 약산 산성(藥山山城)으로 도망하여, 태천읍은 아주 간단하게 함락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영변(寧變), 구성(龜城), 의주(義州)는, 내응 동지들의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함락되지 않고, 시일의 갈수록 방비가 견고하게 되었다. 경래의 점령 지구에 서 도망간 원과 그 주위에 있는 다른 골 원들이 위태로운 이 세 읍으로 모이어, 정보를 교환하고 군졸을 동원하여, 일치 협력하였음으로, 도리어 이쪽을 위협하게 되었다. 더구나 의주에는 허항(許沆), 김견신(金見臣) 등의 의병대장(義兵大將)이 의병을 모집하여, 한편 방비를 엄중히 하고, 한편 공격 태세를 위하여 기세를 울리었다. 그리하여 결국 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용천의 여덟 읍이 함락되었으나, 청천강 이북을 완전히 평정하여 뒷근심 없이 만들어 가지고, 안주, 평양으로 향하겠다는 - 당초의 계획은, 여기에 이르러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형세가 이처럼 돌아가니, 만전지책(萬全之策)이라 하여, 소극적인 작전만 일삼아오던 군칙, 창시도 이미 때는 늦었으나마 남군만으로 안주 공격을 감행할 것을 결의하게 되 었다. 그리하여 이십육 일 밤에 본진을 박천으로부터 송림(松林)으로 옮기었다. 아직도 기동이 부자유한 경래는 사인교를 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맨 뒤에 따라섰다. 일반 군졸들도 경래의 부상을 대개 짐작은 하였으나, 수뇌부 이외에는, 경래는 그때까지도 절대로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십이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이십일 일 밤에, 평양감사 이만수(李晩秀)로부터 경래의 기병을 급보하는 밀계(密啓)가 서울 중앙 정부에 도착하였다. 이 변보(變報)를 듣고 서울 양반들은 모두 황겁하여 처자를 시골로 보내느라고 대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그렇게 바로 서울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되고, 또 이요헌(李堯憲)을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를 삼고, 박기풍(朴基豊)으로 순무중군(巡撫中軍)을 삼 아, 훈, 금, 어,(訓, 禁, 御) 삼영(三營)의 정병을 거느리고, 이십칠 일 오시에 서울을 출발하게 하니, 서울 양반들도 그제야 적이 안심하였다. 서울서 보낸 이 박기풍의 부대는 송림 싸움에는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안주 병영에서 관하 각 군에 엄령을 나리 어 중병을 독촉한 결과, 숙천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를 위시하여, 중화(中和), 순천(順天), 함종(咸從), 덕천(德川), 영유(永柔), 증산(甑山), 순안(順安) 각 군의 수령 이 각기 군병(軍兵)을 거느리고 모여든 수효가 불과 오륙일 동안에 이천 명을 넘게 되었다. 물론 이 중에는 노약(老弱)한 자가 많아서, 제일선에서 직접 활약할 수 있는 자는 약 천여 명이었으나, 서울을 위시하여 남쪽에서 속속 후원병이 올 것이라, 우선 이것만으로 먼저 공격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십구 일 아침에 천여 명의 관군이 세 길로 나누어 빙판이 진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저것들이 강을 다 건너 진을 정비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는 것이 옳을 것 같으니, 어서 공격 명령을 내려주오.”

홍총각은 송림에서 이것을 바라보고, 군칙에게 이처럼 재촉하였다. 군칙이 임시로 총 지휘를 담당하였다. 이때에 경래는 진두에 나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박천서 올 때에 사인교를 탔었으나, 너무나 무리였었음으로, 상처가 도지고 열이 바짝 심하여, 꼼짝을 못 하였다.

군칙은 홍총각의 재촉에 응하지 않았다. 적은 벌서 여러 날 대기하고 있던 것이요, 이쪽은 여기 도착하여 이삼일이 못 되어 지리에 어두우니, 함부로 망동하다가는, 도리어 적의 모략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적이 모두 건너면, 뒤가 바로 강이라, 퇴각이 부자유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그것을 분산시키어 그 하나하나를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다.

이윽고 관군은 강을 다 건너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관군의 진용은 주장, 평안병영 우후 이해승 (主將) (平安兵營 虞侯 李海昇) 우익장, 순천군수 오치수 (右翼將) (順天郡守 吳致壽) 좌익장, 함종부사 윤욱렬 (左翼將) (咸從府使 尹郁烈) 이처럼 삼진으로 나누어 오치수는 동편에, 이욱렬은 서편에, 이해승은 중앙 후방에 진을 쳤었다.

경래의 진에서도 일천오백여의 군졸을 삼진으로 나누어, 홍총각, 윤후험(尹厚險), 변 대언(邊大彦)이 각각 인솔하고 여기에 대적하였다. 군칙의 포위 작전의 명령대로, 윤후험은 일지병(一枝兵)을 거느리고 이해승의 뒤로 돌아나가고, 변대언은 일지병을 거느리고 적현(赤峴)을 쫓아 에워싸고, 홍총각은 일지병을 거느리고 이해승의 진을 향하여 정면에서 들이쳤다.

홍총각으로서는, 너무나 늦게 오기는 하였으나, 기다리고 기다리었던 결전이다. 그가 과거 일년 이상을 두고 조련하여 제 손으로 길러낸 삼백여 명의 정예부대를 독촉하여, 칼을 빼 들고 진두에 서서 좌충우돌하며 돌격하여 밀고 들어갔다. 이 공격이 너무나 용감하고 맹렬하여, 이해승의 진이 차차로 위태로워서, 좌익장 육욱렬과 합진하기를 청하 지 않을 수 없이 되었다. 그러나 윤욱렬은, 적에게 약한 것을 보일 수 없다 하며, 약간의 군졸을 분파(分派)하였을 뿐으로, 이해승의 진세는 시시각각으로 곤란하게 되었다. 더구나 윤후험이 이해승의 진을 뒤로서 포위하였음으로, 이제는 이해승의 진은 중위(重圍)에 빠져, 혼란을 일으키며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퇴각하게 되었다.

이때 평안병사 이해우(李海愚)는 백상루(百祥樓)에서 진세를 살피고 있다가, 이해승의 진이 대단히 위태로운 것을 보고, 그 전 곽산군수 이영식(李永植)을 시키어 성내에 남아있든 천여 명의 군졸을 일시에 출동시키어 윤후험의 진을 습격하게 하였다. 경래의 진에서는, 관군이 의외로 수가 많은 데 놀랬다. 관군의 후원장(後援將) 이영식은, 제 일가족을 전부 잃어서 불과 같은 복수심으로 진두에 서서 군졸을 독촉하였음으로, 맨 늙은이, 어린아이들인데도 불구하고, 크게 기세를 올리었다. 그리하여 단번에 형세는 역전(逆轉)하여, 차차로 경래의 진이 밀리게 되었다. 더구나 관군에는 화총이 많아, 탄환이 비 오듯하여, 경래의 진의 기병(騎兵)이 연하여 꺼꾸러지니, 이때문에 더욱 혼란이 일어나, 홍총각의 정예부대의 용맹으로도, 대세는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되었다. 결진(結陣)! - 아무리 외쳐보아야, 한번 밀리기 시작한 군졸은, 떼를 지어 우 - 도망질쳤다.

이리하여 제갈량으로 자처하든 군칙의 작전은 안주병사 이해우 앞에 완전히 패퇴하고 말았다. 우선 눈앞에 적만을 보고, 뒤에 대비하고 있는 적을 못 보았던 것이, 군칙의 오산의 제일 큰 원인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하게 저물어갈 무렵에, 경래는 사인교를 타고 패잔병 이 백여 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를 향하여 도망하였다. 경래가 정주를 택한 것은, 박천이나 가산은 성이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였고, 또 적의 근거지에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복동에 있던 수뇌부들의 가족들도 이때 모두 정주로 끌어들였다.

경래는 사인교 속에서 복장을 치면서 탄식하였다. 십여 년 동안 고심 참담하여 계획하여 일으킨 일이, 이루어지느냐 실패하느냐 결정되는 - 결전의 마당에 직접 나서서 지휘하지 못하고, 이처럼 패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기가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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