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시와 노래

법정스님의 시 '1974년 1월 - 어느 몰지각자의 노래'

New-Mountain(새뫼) 2024. 1. 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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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 어떤 몰지각자(沒知覺者)의 노래 

 

법정(法頂) 1974.1.

 
 

1.

나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자
대한민국 주민 3천5백만
다들 지각이 있는데
나는 지각을 잃은 한 사람.
 
그래서, 뻐스 안에서도
길거리에서
또한 주거지에서도
내 곁에는 노상
그림자 아닌 그림자가 따른다.
기관에서 고정배치된
네개의 사복
그 그림자들은
내가 어떤 동작을 하는지
스물네시간을 줄곧 엿본다.
 
이 절망의 도시에서
누구와 만나
어떤 빛깔의 말을 나누는지
뭘 먹고 뭘 배설하는지
그들은 곧잘 냄새를 맡는다.
 
나를 찾아온
선량한 내 이웃들을
불러 세워 검문하고
전화를 버젓이 가로채 듣는다.
그들은 둔갑술이라도 지녔는가
거죽은 비슷한 사람인데
새도 되고 쥐도 되어
낮과 밤의 동정을 살피니
 
 
2.
시정은 평온하더라
지각있는 사람들이 사는
그 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게 흐르더라
미끼를 보고 우르르 몰려드는
고기떼처럼
과세를 멸하고 면한다는
흥분한 활자에 눈을 빛내고
축축한 대중가요
끈적거리는 연속극에
한결같이 귀를 모으더라
오, 그러니 몰지각한 나와 내 동료들만
평온치 못하는가
주리를 틀리는가
 
 
3.
섣달 그믐
흩어졌던 이웃들이 모여
오손도손 나누는 정다운 제야
나는 검은색 코로나에 실려
낯선 사벽의 초대를 받는다.
이 시대
이 지역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떠는 곳.
밤새껏 낸냉수를 마셔가며
진술서에
강요된 자서전을 쓴다.
 
까맣게 잊어버린 전생
출생전의 수자를 되살리고
나도 모르는 내 일상의 양지를
그 음지의 거울앞에서 알아낸다.
 
손가락마다 등사잉크를 발라
검은 지문을 남기고
가슴에 명패를 달아
사진도 찍는다.
근래 이런 일이
내게는 익숙해 졌지만
섣달그믐 이 제야에는 성모 마리아의 품에라도
반쯤 기대고 싶었다.
 
 
4.
정월 초이틀
얼어붙은 추위속에
또 누가 나를 부르는가
비상 고등 군법회의
검찰부
염라청의 사자처럼
소환장을 내미는 가죽잠바 둘
나는 또 검은 코로나의 신세를 진다.
 
업경대 앞에 세워두고
나와 내 동료들의
우정을 시험한다.
나더러 유다가 되란 말인가
어림없는 수작  어림없는 수작 
함께 질 수 없는 짐일진대
내 짐은 내가 지리로다.
 
그 삼엄한 공간에서
몇사람의 동료들을 만났다.
오랫만에 마주친 나의 친구들
그새 몹시들 수척해졌네
얼마나 다스림을 받았을까
손을 마주 잡은 무게에서
말없이 주고 받은 그 눈길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우정을
절절하게 확인한다.
그렇다, 지옥에라도 함께 들어갈
뜻을 굳힌다.
 
 
5.
우리가 무슨 대역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서로 흘기지 말고 믿고 살자고
입 가지고 말도 좀 나누면서 살자고
우리 모두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보자고
남들처럼
허리 펴고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역사의 길목에서 길을 가리킨
그 손가락이 죄란 말인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사람이면 누구나 비슷비슷한
시력과 청력을 지니게 마련인데
부른 자와 불려간 자 사이는
보고 듣는 것마다
어찌 그다지도 땅과 하늘일까
혀에 익은 귀에 익은
똑같이 모국어를 쓰면서도
다스리는 자와 받는 자 사이는
이해의 거리가 십만팔천리
 
 
6.
저 포학무도한
전제군주 시절에도
상소하는 제도가 있었다.
억울한 백성들이 두들길
북이 있었다.
그런데
자유민주의 나라 대한 민국
1974년1월
백성들은 자갈을 물린 채
손발을 묶인 채
두둘길 북도
상소할 권리도 없이
쉬쉬 눈치만 살피면서
벙어리가 되었네
귀머거리 되었네
장님이 되었네.
 
 
7.
실려갔다가
내 발로 휘적휘적 돌아오는 길은
새삼스레
인간사가 서글퍼지네
기는 것은 짐승이요.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은 사람이라고
인간문화사에는 똑똑히 박혀있는데
오늘 우리들은 무엇인가
이러고도 사람이라 불릴 수 있을까
거죽만 사람인 인비인, 人非人
기어 다니는 짐승들 보기가 부끄럽네.
 
연탄불이 꺼져 썰렁한 방안
그건
우리 시대
이 지역의 기온
나는 춥고 억울해서
오들오들 떤다.
전에 없이 좀 미안하다.
내 육신에게
전에 없이 좀 안스럽다.
내 손과 발이.
 
이런 나를 위로하는
대지의 음성
남들이 해낸 일은
자네도 할 수 있을거야
아암, 할 수 있고 말고
할 수 있고 말고
 
 
8.
우리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일부 몰지각자
대한민국 주민 3천5백만
다들 말짱한 지각을 지녔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지각을 잃었는가
아, 이가 아린다
어금니가 아린다.
입을 가지고도 말을 못하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오늘도 부질없이
치과병원을 찾아 나선다.
흔들리는 그 계단을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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