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옮겨온 고전

정학유의 흑산도 여행기 '부해기(浮海記)'

New-Mountain(새뫼) 2023. 10. 20.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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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해기(浮海記)> 己巳(1808)

정학유

정민  역

 

 

2월 3일
지금 임금 원년 신유년(1801) 겨울에 -곧 가경 6년이다.-부(仲父)이신 손암 선생께서 흑산도로 귀양 가셨다. 섬은 나주 바다 가운데 있으니 큰 바다를 천 리나 건너야 한다. 바람과 파도가 몹시 거세서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이라도 감히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였다. 정묘년(1807) 봄에 학초(學樵)가 조운선을 타려고 행장을 이미 갖추었으나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중부께서는 아득히 기다리시다가 달을 넘기고서야 궂은 소식을 들었다. 궁하고 외로운 처지를 슬퍼하다가 도리어 병이 되어 해를 넘기도록 앓아 누워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었다. 무진년(1808) 봄에 내가 강진에 가서 거칠게 아버님을 봉양하였다. 아버님께서 내 손을 붙드시더니 울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뭍에서 살아 주위 환경과 서책이 완연히 인간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저 구름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그 형편이 어떠하겠느냐. 네가 한 번 가서 뵙도록 해라.”
이듬해(1809) 봄 -가경 14년 기사년이다.- 2월 계사일에 -초3일이다.- 내가 다산으로부터 아버님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사십 리를 가서 황령점(黃嶺店)*에서 쉬었다. 또 사십 리를 가서 도씨포(桃氏浦)*에서 잤다. -포구는 영암군(靈巖郡) 서쪽 20리에 있다.- 포구 사람 나군이 마치 친척처럼 정성껏 대접하였다. 하지만 섬사람 차 아무개*의 배가 이미 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배는길이가 4장(丈)이고 허리너비가 1장 남짓이었다. 양쪽 끝이 뾰족해서 그 모양이 베 짜는 북과 같고 또 복어와도 비슷했다. 거룻배 치고는 작은 것인데 섬사람들은 이를 두고 중선(中舶)이라고 말한다. 벼 110석을 실었다. -1섬은 20두이다.- 배를 모는 자는 8명인데, 배 허리의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이 1책도 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펴서 물건을 재는 것을 책이라 한다.-사람 이대근(李大根)은 경주 이씨로 그런대로 문자를 알았는데 제 입으로 팔별(八鼈)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2월 4일
이튿날 갑오일, 날씨 흐림. 동틀 무렵 사공이 선왕(船王)*에게 제사를 올리고, 제사를 마친 뒤에 배에 올라 닻줄을 풀었다. 배가 막 항구를 벗어나자 바람이 크게 불고 파도가 사나워 바로 닻을 내렸다. 도씨포와의 거리는 1궁(弓)*이었다. 뱃사람들은 뜸을 닫고 노름을 하였다. 두보의 시에, 

 

   장년과 삼로(三老)*가 길게 노래하는 속에   長年三老長歌裏
   대낮 높은 파도 중에 노름을 하는구나.         白晝攤錢高浪中*

 

라 하였으니 물가의 풍속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밤중에 달빛이 희미하였으므로 소동파의 시를 읊조렸다. 그 시는 이렇다.

 

   미풍이 우수수 물풀을 불어가니                  微風蕭蕭吹菰蒲
   비가 오나 내다보니 호수 가득 달빛일세.      開門看雨月滿湖
   어둔 조수 밀려와서 지렁이를 조문하고        暗潮生渚弔寒蚓

   지는 달 버들에 걸려 매달린 거미 보네.        落月挂柳看懸蛛*

 

2월 5일
이튿날 을미, 날씨 맑음. 해 뜰 무렵 배를 놓으니 조수가 지고 바람이 순하여 잠깐만에 5, 60리를 갔다. 정오가 되지 않아 정개도(鼎蓋島)*에 이르렀다. -이곳 말로 소당섬이다.- 높새바람(高鳥風)이 문득 마파람(馬兒風)으로 변하므로 마침내 닻을 내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모양은 마치 굴레를 벗은 천마의 네 발굽이 거침없이 단번에 천 리를 내달아 제어할 수 없다가, 갑자기 긴 구덩이와 큰 웅덩이를 만나 주춤대며 나아가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이 때문에 안타까워 탄식하니 가는 길이 지체되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새(鳥)는 을(乙)이니 을은 동방으로, 높새라는 것은 북동풍을 말한다. 오(午)는 말(馬)이니 말은 남방을 뜻한다. 정개도에는 학성군(鶴城君)의 묘가 있는데 학성군은 영암 사람이다. 그 힘이 범을 때려잡았으므로 이 곳 사람들은 그를 김 장군이라 하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 김완(金完)*이다.- 밤에 별빛과 달빛이 몹시 밝았다.  


2월 6일
이튿날 병신일, 맑음. 동이 트자 배가 출발했다. 순풍을 얻어 서쪽으로 40리를 가서 목포보(木浦堡)* 앞에 닿으니 수면이 시원스레 툭 트여 있었다. 뱃사람은 이를 두고 나팔해라고 하는데, 위쪽이 좁고 아래쪽이 넓어서 그 모양이 나팔과 같기 때문이었다. 뱃사람이 이곳에 이르러 또 선왕(船王)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10여 리를 가자 역풍이 크게 일어나므로 고하도(高霞島)* 앞에서 닻을 내렸다. -[여지승람]에는 고하도(高下島)라 하였다.- 바람과 파도가 흉흉하여 멀미가 나 병이 날 지경이었으나 토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생과 함께 언덕에 올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유적비*를 읽었다. 이는 경종대왕 임인년(1722) 4월에 세운 것이다.
고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조태구(趙泰耉)*가 글씨를 썼으며 운곡(雲谷) 이광좌(李光佐)*가 전액을 썼다. 지금으로부터 88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벗겨져 나가 읽을 수 없는 글자가 많았다. 대개 옛날 충무공께서 목포보의 장(將)이 되어 양식을 쌓아 백성을 모으고, 고하도 앞에서 왜구를 막아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비석을 세워 공을 기록한 것이다. 섬에 사는 고로(故老)의 말은 이러했다.
“하루는 양식이 다 떨어지자 왜인이 이를 염탐해 알고서 우리 성채를 범하려 하였습지요. 이공께서 가마니를 모아다가 -속언에 빈 자리라 한다.- 흙을 채워 산처럼 만들고 따로 석회즙을 가져다가 항구에다 버렸습니다. 그것이 마치 쌀을 이는 것 같았으므로, 왜인이 양식이 여태 다 떨어지지 않았다고 여겨 감히 침범해오지 못했답니다.”
저녁에 다시 배로 들어와 밥을 조금 먹고, 촌사에 투숙하였다. 밤새도록 큰 바람이 불어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2월 7일
2월 7일 정유, 흐린 구름이 개지 않았다. 한낮이 되자 우레를 동반한 비와 큰 바람이 불어, 고하도의 촌가에 머물렀다. 주인집의 열 살 난 아들이 증선지(曾先之)의  <사략(史略)> 첫째 권을 안고 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훈장에게 배운 것을 점검해 보니 포저(苞苴)*의 ‘저(苴)’ 자를 ‘차(且)’로 읽고, 여알(女謁)*의 ‘알(謁)’은 ‘갈(碣)’로 읽는다. ‘도도평장(都都平丈)’*은 안이나 바깥이나 다 같은 모양이다. -<요산당기(堯山堂紀)>에 이렇게 말했다. “시골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면서 ‘욱욱호문재(郁郁乎文哉)’를 ‘도도평장아(都都平丈我)’로 읽었다.”- 이 때문에 한차례 웃고서 내가 그 잘못을 바로 잡아 주었다. 그러자 주인이 술을 내오고 생선회로 대접하였다. 또 한 가지 기이한 일이었다.

2월 8일
무술일, 맑음. 동이 트자 닻줄을 풀고 서쪽으로 10여리를 갔다. 바닷가의 여러 산들이 이곳에 이르러 대문이 되었다. 이름은 죽진(竹津)이다. -방언으로는 ‘대라래(大羅來)’라 한다.- 동쪽으로 우수군 절도영이 바라다 보이는데 100리가 채 되지 않았다. 이 날은 날씨가 따뜻하고 물결이 고요해서 거울 같은 수면이 마치 기름을 뿌려 둔 것 같았다. 해문을 조금 벗어나자 구름 안개가 아스라하고, 저 멀리 섬들은 공이나 총알 같았다. 노 젓는 소리가 삐거덕거리니, 어부가로 서로 화답하였다. 뱃전에 편히 앉자 자못 거나한 흥취가 있었다. 이곳의 지명은 교거해(攪車海)라 하는데, - 방언으로는 씨아해(氏兒海)다.*- 물의 형세가 감돌아 나가는 것이 마치 박면교거(剝棉攪車)*와 같기 때문이다. 종일 바람이 없어 간신히 사십 여리를 갔다. 지좌도(只佐島)*를 지나 밤중에 팔금도(八琴島)*에 정박하였다. 언덕으로 올라가 촌가에서 잤다.

 

2월 9일
기해일, 아침 흐림. 닻줄을 풀어 항구에 이르자 큰 바람을 만났다. 폭우가 쏟아지므로 배를 돌려 항구로 드니 거센 물결이 배를 온통 뒤흔들어 기울어져 뒤집힐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다급하게 가슴을 쳤다. 간신히 앞서 있던 곳에 배를 대고 다시금 촌가에서 잤다. 
나는 본래 압해 사람이다. 압해도(押海島)는 팔금도(八琴島)의 서북쪽에 있는데, 떨어진 거리가 30여 리 쯤 된다. -<여지승람>에는 압해(壓海)라고 했다.- 지금까지 정 정승*의 묘가 남아 있다. 예전 선조이신 참의 정시윤 공께서 일찍이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호남에 오셨다가 마침내 이 섬에 들어가 정승의 묘를 배알하였다. 뒤에 순천 도호부사가 되어 다시 이곳에 행차하였다. 이제 내가 바로 바라다보이는 거리에서 지나가면서도 제 뿌리가 되는 곳을 돌아볼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슬퍼하였다.

2월 10일
경자일, 바람이 음산하게 불며 날이 개지 않았다. 이 때문에 팔금도에 머물렀다. 섬사람의 생활을 보니, 다만 낙제(絡蹄)를 잡는 것을 일로 삼는다. -낙제란 이름은 <여지승람>과 허준의 <동의보감>에 보인다.- 낙제라는 것은 낙지이다. 팔초어(八梢魚), 즉 문어와 같은데 크기가 조금 작다. 그래서 작은 팔초어라고도 부른다. 썰물이 진 뒤에 펄을 뒤져 잡는다.

2월 11일
신축일. 날씨 맑음. 미풍이 불다. -11일이다.- 아침에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비금도(飛禽島)를 지났다. -<여지승람>에는 비이도(飛尒島)라 한다.- 또 20리를 가서 관청도(觀靑島)*에 이르자 날이 어둑해졌다. 들으니 2월 6일 밤에 -내가 고하도에 묵었을 때이다.- 홍의도(紅衣島)*와 태사도(太師島)* 두 섬의 배가 송도(松島)* 앞쪽에 이르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그 위태롭기가 이와 같다. 비금도에는 큰 염전이 있어, 나주의 여러 섬이 모두 공급해주기만을 바란다고 한다. 관청도는 큰 바다가 열리는 입구다. 예전에는 진정(津亭) 수십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단지 한 집만 남아 있다. 어떤 이는 관청도의 관청이 관청(官廳)이라고 한다. 고려 때 물길로 개경에 조회하는 자가 군산보(羣山堡)에서부터 길을 취해 이 섬에 이르러 바람을 기다렸으므로 늘 관청을 두었다. 이 때문에 이제껏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밤에 촌가에서 쉬는데 한밤중에 뱃사람이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순풍이 붑니다.” 그래서 배에 올라 항구를 벗어나자 비로소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서편을 바라보니 구름과 물이 가이없다. 지는 달이 바다에 걸려 가물가물 떨어질 듯한 것이 마치 병든 눈에 등불이 가물대는 것만 같았다. 10여 리를 가서 송도의 서편에 이르자 비로소 먼동이 터왔다.

 

2월 12일
임인일, -12일- 맑음. 동틀 무렵 송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서남쪽을 멀리 바라보니 물과 하늘이 한 빛깔이었다. 뱃사람들이 모두 경건하게 목욕하고 성대하게 상을 차려 선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순조롭게 건너가기를 기도했다. 제사를 마치고는 밥을 먹고, 큰 깃발을 세워 북을 둥둥 치면서 배를 출발했다. 이날은 바람의 힘이 너무 약해 비록 돛을 걸기는 했어도 노 젓기를 멈추지 않았다. 뱃사람들은 걱정이었지만 나는 즐거웠다. 흑산의 바다는 혹 1000리라 하고, 700리라고도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물길로 900여 리라 했으니 이것이 믿을 만한 글이다. 하지만 눈을 비비며 서편을 바라보아도 흑산도는 보이지 않았는데, 안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다. 북극의 고도*는 250리마다 1도씩 차이가 난다. 1000리라면 4도의 차이다. 이로써 미루어볼 때 대지 위의 물이 둥글게 감돌아 수백 리 바깥의 것은 건너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한라산처럼 산꼭대기가 우뚝하게 곧장 허공 속으로 솟은 것이라면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둥근 물체는 가운데가 불쑥 솟아 서로를 가리기 때문이다.
반나절을 서쪽으로 가자 한바다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푸른 산 한 줄기가 보이는데, 희미하게 물에 잠긴 하늘에 나와 있다. 물어보니 바로 흑산도였다. 이날은 날씨가 몹시 맑아 이곳에 이르러서도 마치 몽롱한 안개가 희미한 것 같음을 볼 수 있었지만, 좀 더 가까이 가야 비로소 볼 수 있다고 한다. 바다 가운데에 이르자 작은 섬이 있는데, 교맥도(蕎麥島)*라 하였다. -이곳 말로는 모밀섬이다.- 둘레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지만 바위 암초가 검과 같아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이곳에 이르러 또 선왕에게 제사를 올리고, 제사를 마치고는 점심밥을 먹었다.
막 밥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바다 가운데에서 일어나니 하늘을 쪼개고 땅을 찢는 듯하였다. 뱃사공이 수저를 놓칠 정도였다. 나 또한 크게 놀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물어보니 고래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이때 고래 다섯 마리가 나와 노닐며 멀리서 거슬러 왔다. 그 중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물을 뿜는데, 그 형세가 마치 흰 무지개* 같고, 높이는 백 길 남짓이었다. 처음 입에서 물을 뿜자 물기둥이 하늘 끝까지 떠받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리어 옥 같은 눈이 땅 위로 떨어졌다. 햇빛에 반사되어 비치자 광채가 현란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물을 뿜고는 소리치고, 소리치다가 물을 뿜으니 이와 같은 것이 한 식경이나 되었다. -대략 한 차례 물을 뿜고 한 차례 소리치는 것이 4~50차례 이상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집채만큼 커서, 쇳덩이를 내려치는 듯하였다. 집채만큼 크다보니 무쇠 쟁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급하고 빠르기가 우레 소리보다 더했다. 다만 우레 소리는 우르릉거리는데 반해, 고래의 소리는 쩌렁거렸다.
고래 두 마리는 배 왼편에 있었는데, 교맥도를 스치며 동쪽으로 갔다. 오른쪽에 있던 고래 세 마리는 송도(松島)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갔다. 소리친 것은 왼편의 고래였다. 물을 뿜을 때는 고개를 치켜 등마루를 솟구치니, 마치 물건을 운반하는 큰 배와 같았다. 수면에서 몸을 뒤집자 검은 거죽이 몹시 어두웠고 비린내가 확 끼쳐 왔다. 겁이 나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몇 리를 더 가고 나서야 겨우 기운을 펴고 숨을 쉴 수 있었다.
또 서쪽으로 수 백리를 가자, 바람의 힘이 차츰 팽팽해져 신발 무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소장공(蘇長公)의 다음 시*를 외워 보았다.
   

   개인 구름 밝은 달빛 그 누가 꾸몄던고       雲散月明誰點綴
   하늘 모습 바다 빛깔 본래부터 해맑다네.    天容海色本澄淸
   남쪽 변방 죽을 뻔 함 내 한하지 않으리라   九死南荒吾不恨
   이번 노님 기막히기 평생의 으뜸일세.        玆遊奇絶冠平生

 

날이 늦은 뒤에야 흑산도에 점점 가까워졌다. 속으로 기쁘기가 마치 봉래(蓬萊)와 방장(方丈)*에 들어가는 것만 같았지만, 혹 바람에 끌려 멀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영산도(影山島)*에 이르자 바람이 더욱 세졌다. 5리를 더 가서 흑산도에 도착했다. 사미촌(沙尾村)*의 거처에서 중부(仲父)께 절을 올렸다.

 

2월 13일
계묘일. 모습을 자세히 우러러 뵙고서 학초를 잃은 슬픔과 아픔*을 두루 말씀드렸다. 신유년(1801)으로부터 9년 사이에 집안 식구가 죽고 태어난 것과 조야(朝野)의 지위가 오르고 몰락한 것을 물으시는 대로 대답을 올려드렸다. 어부가 무릉도원에 들어가 한나라 적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흑산도에는 큰 섬과 작은 섬이 있다. 작은 것을 우이도(牛耳島)*라 하는 -방언에는 소개(小開, 소귀)라 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우개도(牛開島)라 한다.- 보장(堡將)*은 언제나 우이도에 머물다가 다만 여름에만 한 차례 큰 섬으로 와서 보리를 거두고 고혈을 짜서 돌아간다. 귀양 온 사람이 있으면 가시울로 위리안치한 자만 우이도에 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자기가 선택한 대로 들어준다. 중부께서도 처음에는 우이도에 계시다가, 집과 곡식 마련이 불편한지라 을축년(1805) 여름에 큰 섬으로 이주하셨다. 처음에는 보촌(堡村)*에 사시다가 얼마 안 있어 사미촌으로 옮기셨다.
송나라 때 서긍은 <사고려록(使高麗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흑산도는 백산도(白山島)*의 동남쪽에 있다. 나라 안에서 큰 죄를 지어 죽음을 면한 자가 이곳으로 많이들 유배온다.” 여기서 이곳은 큰 섬을 가리킨다. 흑산도는 길이가 30여 리이고 너비는 10리에 지나지 않는다.
온 산이 모두 검은 돌인데 그 빛깔은 옻칠한 것 같아 한 점의 흰 자갈도 없다. 땅 깊은 곳에 들어가 있는 것에 혹 벼루감이 있는데 흡주(歙州)에서 나는 것만 못지않다. 일찍이 미불(米芾)의 <연사(硯史)>를 보니 이렇게 말하였다. “흡주연(歙州硯)*은 고운 비단 무늬에 별이 없는 것을 상품으로 친다. 또한 자금빛으로 거위 눈알 무늬가 있는 것과 금사(金絲) 무늬가 있는 것을 모두 훌륭한 제품으로 일컫는다.” 지금 흑산의 벼루에도 이러한 종류가 있다. 다만 이곳 사람들이 어리석어 쓸 줄을 모르니 몹시 애석하다. 어진 이와 재주 있는 이가 궁벽한 고장에서 나서 늙는 동안 조정에 천거되어 발탁되지 못해 초목과 더불어 썩고 마는 것이 흑산도의 벼루와 다를 것이 없다.
땅에는 오곡이 없다. 오직 기장과 보리를 이따금 자투리 땅에 심곤 한다. 또한 여러 가지 과일도 없다. 지난해에 표류선 한 척이 배에 온통 함소(含消), 즉 배[梨]를 가득 실었는데 이곳 사람들이 가져다가 이를 심었더니 그 품질이 자못 훌륭했다. 다만 접을 붙이지 않아서 그 성품을 다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으니 몹시 애석하다. 산다(山茶)와 석류가 있다. -방언에 산다를 동백이라 한다. -온산을 메우고 골짜기를 덮은 것은 모두 동청(冬靑), 즉 사철나무이다.* 새는 다만 까마귀와 솔개*, 닭과 참새가 있을 뿐 나머지 다른 것은 없다. 제비는 모두 산에 둥지를 튼다. 이따금씩 인가로 들어와 몇 마디 재잘대고는 가버리니 참으로 기이하다 할 만하다. 털 짐승은 개와 소, 고양이와 쥐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다 없다.
중부께 글을 배우던 자가 당나라의 소시(小詩)를 배우다가 이렇게 물었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고 보니(馬上逢寒食).’*라는 시에서, 말은 대체 어떤 동물인가요?”
중부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소와 비슷하지만 뿔이 없고 발굽은 둥글며 갈기는 길다. 타고 다니기만 하고 밭 갈지는 않는 것이 이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낙타와 사자와 코끼리를 본 적이 없어서 낙타를 두고 말 등에 종기가 났다고 하고 코끼리를 보고 소의 코를 잡아당겼다고 하는 것과 오십보백보이니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이곳의 풍속은 이제껏 감히 개를 집에서 기르지 못한다. 한차례 국을 끓여 올렸더니 요망한 말이 들끓었다. 이 때문에 개를 집에서 기르지 않아 모두 산짐승이 되었다. 매번 날이 캄캄해진 뒤에는 뭇 개들이 몰래 마을을 다니는데 물고기 뼈와 내장을 먹으려는 것이다. -<내칙>에 “물고기는 내장을 제거한다.”고 하였다.- 도둑질을 경계하는 바가 없는데도 오히려 다시금 으르렁거리며 짖는다. 이것이 내가 <산견(山犬)> 시*를 지은 까닭이다. 우이도는 관청도 남쪽에 있다. 바다 건너 100리에 불과하니 든바다(內洋)의 지역이다.

 

2월 15일
15일, 을사일. 황시(皇尸)*의 뜻에 대해 들었다. 아버님이 지으신 <시변(尸變)>의 뜻과 더불어 조금 차이가 있었다.* 우이도 사람 문순득이라는 이가 신유년(1801) 겨울에 태사도로 가다가 바람을 맞아 표류하여 유구국(流求國,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유구에서 풀려나 복건으로 보내졌는데, 또 표류하여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에 이르렀다. 안남(安南, 베트남)으로 가는 길을 따라 광동과 오문(嶴門, 마카오)을 거쳐, 마침내 남경에서 북경으로 올라가 의주를 거쳐 우이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기간은 3년에 지나지 않는데, 바람에 쓸려 표류한 이래로 널리 유람한 장대함이 이같은 경우가 없었다.
이에 앞서 신유년(1801) 가을에 표류선 한 척이 제주에 이르렀다. 다섯 사람이 물을 긷기 위해 육지에 내렸다. 우리나라 사람이 깃발을 들고 나팔을 불자 배가 놀라서 달아나는 바람에 다섯 사람만 홀로 낙오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요동으로 놓아 보내니, 요동을 다스리는 관리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며 우리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한양에서는 다시 제주로 돌려보내 머물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피부색이 검고 단추를 채운 옷을 입고 있었다. 신분이 높은 자는 머리를 땋았고, 입으로 언제나 ‘마가오(馬哥奧)’라는 세 글자를 외웠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문순득이 일찍이 나주성에서 이 다섯 사람을 보았었다. 그러다가 광동에 도착하여 그들의 방언을 들어보니 이른바 ‘마가오’라는 것은 오문의 이름이었다. 안남과 여송 사람들이 모두 오문으로 모여들어 조사하여 문순득이 사실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 뭇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무리지어 욕을 하며 “약방(藥房) 사람은 나쁘다.”고 말했다. ‘약방’이라는 것은 여송의 방언으로 조선을 두고 약방이라 하였다.* 문순득이 그들의 피부색이 검고 단추 옷을 입고 있으며, 신분이 높은 자가 머리를 땋은 것이 지난번 자기가 본 다섯 사람과 서로 같은 것을 보고 비로소 다섯 사람이 여송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마가오’라고 말했던 것은 마카오에 가기만 하면 제 몸이 문득 살 수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문순득이 한양에 도착해서 이 같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믿지 않았다. 연전에 유구 사람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을 때 다섯 명을 내보이니 과연 여송 사람이었다. 유구인들에게 그들을 배에 싣고 돌아가게 하려 했지만 유구인들이 사양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제주에서 죽었고 나머지 넷은 지금까지 살아 있는데, 짚신을 짜서 먹고 산다. 문순득이 여송 사람들이 자신을 잘 대접해 준 은혜를 고맙게 여겨 늘 이들을 위해 관에다 알리려 하였지만 또한 능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2월 16일
병오. 수진본(褎珍本) 관화(官話)* 한 권을 얻었다. 지난해 겨울 12월에 표류선 한 척이 흑산도의 장섬항(長苫港)64)에 왔다가, 암초에 부딪쳐 배가 부서진 일이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이 뱃머리에 서서 싹싹 빌며 목숨을 구걸하더니 몸을 던져 뭍으로 올라오려다가 모두 바위에 부딪쳐서 죽었다. 배에 실려 있던 감초는 모두 바닷물에 절여져 쓸 수가 없었다. 마을 아이가 그들의 주머니를 뒤져서 책 한 권을 얻었다.
책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옹정 6년(1728) 11월 21일, 내각에서 화석(和碩) 이친왕(怡親王) 등에게 교부하여 삼가 새로 뽑힌 지현(知縣) 풍우기(馮又基)의 보고에 따라 황제께 아룁니다. 신이 삼가 황제의 유시를 읽어 보니 ‘복건과 광동 사람들은 관화(官話)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으므로 지방에서 훈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황상께서 헤아려 살피심이 주도면밀하사 조금도 비추지 않음이 없어, 멀리 치우친 바닷가 사람조차도 한 가지 도리로 같은 풍속의 성대함을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신은 어리석어 각 지방의 언어가 같지 않더라도 글자의 음만은 사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방 말에 따라 책을 읽어 글자 음이 익숙해지고 나면, 비록 관화를 배운다 해도 또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청컨대 각 성의 학교에 신칙하시어 책을 읽을 때 다시는 지방 말을 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글자 음이 바로잡히면 관화는 절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관리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관리와 백성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피차간에 의미가 잘 통해서 통역하는 자가 농간을 부리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예부(禮部)로 하여금 광동 순무에게 자문을 내려 <남북정음관화직해(南北正音官話直解)> 1권을 간행하게 하소서.”
갈래별로 나눠 그 음을 번역하였는데 예를 들어 ‘황혼’은 ‘광곤’이라 하고, ‘창천’을 ‘창첨’, ‘호박’은 ‘고박’이라 하고, ‘황금’을 ‘광근’이라 하는 따위가 모두 10쪽이요,* 또 문답이 있는 대화로 <노걸대(老乞大)>나 <박통사(朴通事)>*와 같은 것이 몇 쪽이었다. 또 사물의 이름을 풀이해 옮긴 것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수염 많은 사람을 호자(鬍子)라 하고, 맹인을 할자(瞎子)라 한 따위가 모두 8, 9쪽이어서 또한 자못 볼 만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내버려진 유해를 거두어 묻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지금껏 백사장에 그대로 놓여 있으니 몹시 근심할 만하다. 대개 표류선이 섬에 정박하면 지방관에게 알려서 검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관리와 토교(土校)가 어민을 가혹하게 침탈하여 걸핏하면 비용이 수천여 꿰미에 이르므로 고기 잡는 어부와 떠돌이 백성이 반드시 유랑민이 되고 만다. 이 때문에 숨겨두고 소문내지 않는다. 또 손을 대서 묻어주었다가는 모진 심문을 받아야 하므로 파리와 모기떼에게 내버려두게 되는 것이다. 죄는 고을 수령이 용렬하고 어두워서 아전들이 제멋대로 구는 것을 살피지 못한 데 있으니, 섬의 백성들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무릇 바다 섬에서는 때때로 주먹질하여 싸우다가 살상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문득 모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숨겨 감추곤 한다. 이 또한 아전과 장교의 수탈 때문이지 섬 백성의 죄가 아니다.

2월 18일
무신일, 중부를 모시고 흑산도의 꼭대기*에 올랐다. 위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수백 명이 앉을 만하였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어 이름하야 홍석(鴻石)이라 한다. 맑고 찬 샘물이 바위틈에서 나온다. 산꽃이 활짝 피었으니 모두 진달래였다. 술을 내오고 회를 치게 하여 답답한 회포를 푸니 참으로 즐거웠다. 날씨가 흐리지 않으면 제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제주가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비가 올 조짐이다. 기운이 올라가 반사되어 비친 것이니, 그 이치가 그러하다.
홍의도(紅衣島)는 흑산도의 서쪽으로 10여 리에 있고, 가가도(可佳島)*는 흑산도에서 서남쪽으로 4~500리에 있다. 가가도의 백성은 흑산도를 이름난 큰 성읍처럼 보아 그 성대한 문물을 우러러 흠모한다. 흑산도의 백성들은 가가도를 마치 나주의 이속들이 흑산도를 보듯 한다. 관청 바깥에 머물게 하며 종처럼 대우하고 당에 올라 절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어리석고 순박함을 이용해 제멋대로 착취하곤 한다.
태사도(太師島)는 흑산도의 남쪽 100여 리에 있다. 문물은 가가도보다는 조금 나아 보이나 흑산도의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겨 이승(夷丞)*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가을에 태사도의 백성들이 흑산도에 왔다가 처음으로 장기(棋)를 배워 돌아가서 퍼뜨렸다. 흑산도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교활한 오랑캐가 우리를 흉내 내려 하니, 가서 때려 부숴 감히 다시는 익히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말했다. 만재도(滿載島)*는 흑산도 서쪽 수백 리에 있다. 이곳은 해남에 거주하고 있는 고 이조판서 이상의(李尙毅)* 공의 후손이라는 자가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

2월 19일
19일에 중부를 모시고 나사동(螺螄洞)* -방언으로는 소라굴이다.- 으로 놀러갔다. 서긍의 <사고려록(使高麗錄)>에, “흑산은 처음 바라보면 지극히 높고 가팔라서 산세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다. 앞쪽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가운데가 비어 마치 동굴 같다. 양쪽 사이에 시내가 있어 배를 감출만 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사동을 두고 한 말이다. 나사동은 사촌(沙村)을 막아주는 문이 된다. 바위 구멍이 움푹 패여 형세가 마치 무지개 같은데 높이는 4~5장 가량 된다. 처음 들어가면 옹성(罋城)과 같고 더 들어가면 음삼하고 컴컴해서 찬 기운이 뼈에 저민다. 십여 걸음을 가면 바위가 또 우멍하게 열리면서 골짜기가 환해지고 해와 달이 드러난다. 고개를 내밀어 굽어보면 어지러운 바위가 답쌓였고 성난 물결이 들이쳐서 우르릉거리다가 바람과 우레가 때려 대는 것만 같았다. 내 생각에 이발(李渤)*의 석종산(石鐘山)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천지가 처음 개벽할 적에 대개 이 흙산이 바람과 물에 씻긴 바 되어 살이 떨어지고 뼈만 남아 그 형상이 둥그렇게 말려 돌아가 마치 나사가 도는 것 같았으므로 이 같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어지러운 바위 너머로는 언덕의 형세가 감싸 안았다.
또 작은 섬 두 개가 앞쪽에 있으니 이름하야 꽃섬(花苫)*이라 한다. 바람의 힘을 조금 막아주어, 서긍이 배를 감출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꽃섬에 들어가는 포구 여자들은 모두 뗏목을 탄다. 골짜기에 똑바로 앉아있노라면 이따금 한 여인네가 머리를 풀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바다에 떠서 가곤 하였다.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이는 이른바 교인(鮫人, 인어)입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피부가 검어서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또한 종류의 물에 사는 생물이 있는데 대합과 비슷했지만 대합은 아니었다. 온몸에 가시털이 고슴도치처럼 돋아 있다. 중부가 이를 이름하야 위합(蝟蛤)*이라 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살펴보니 합 중에 털이 있는 것을 함진이라 한다고 했다. 담채(淡菜), 홍합 또한 털이 있는데 가시털이 있어야만 위합일 뿐이다. 가시에는 독이 있어서 찔린 사람은 잘 낫지 않는다.

 

2월 25일
여러 날 경전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시경의 여러 편 시와 논어의 여러 조목들은 모두 아버님께서 설명하시던 것과 천 리 떨어진 곳임에도 꼭 같았다.

3월 1일
신유일. 오늘은 중부의 생신일이다. 소사미(小沙尾)*의 냇가 바위 위에다 술과 안주와 꽃지짐을 마련했다. 이곳은 원래 습지로 평평한 곳인데 바위 언덕이 감싸 안아 바다 빛이 보이지 않는지라 아름답고 툭 트여서 산림의 운치가 있었다. 냇물은 맑아서 항구 같지 않았다. 예전에 절집이 있었는데* 무너진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중부께서 옮겨 와 사실 뜻이 있으셨다.
보촌의 소교(小校) 이행묵(李行黙)*의 집은 중부께서 예전에 살던 곳이다. 사람됨이 넉넉해서 온 섬의 어른 노릇을 했다. 굳이 나더러 자기 집에 옮겨 가자고 하였다. 집은 정결하고 넓어서 서울과 다름이 없었다. 먹을 것을 잔뜩 마련하여 예모를 다 하였다. 이날은 보촌에서 잤다. 보촌에는 행관(行官)이 있는데, 초가집 몇 칸뿐이었다. 촌락은 제법 조밀하였다. 조암(鰷巖)*의 아래로는 맑은 못이 임해 있어 노닐며 감상할 만하였다.

 

3월 2일
사촌으로 돌아왔다.

3월 14일
한기에 쐬어 병을 얻었다가 닷새 만에 나았다. 인삼 한 뿌리를 씹어 먹었다.

3월 20일
중부를 모시고 심촌(深村)*에서 잤다. -방언으로는 기품이(其品伊)라 한다.- 장차 돌아오려 할 때 웬 배가 홍어를 가득 싣고 있는데 장차 도씨포로 간다고 했다.

3월 21일
맑음. 동틀 무렵에 울면서 중부와 작별하고 배에 올랐다. 산 북쪽을 안고 돌아 몇 리를 가서 바다가 열리는 곳에 이르러 바람을 기다렸다. 정오에야 편풍을 얻어 배를 놓았다.* 처음에는 작루(鵲漊) -루(漊)는 평성이다. 방언에큰 물결을 루라 하는데 흰 파도가 까치 떼처럼 일어나는 것을 작루라 한다.-가 일어나더니 점차 곡루(谷漊) -큰 물결의 기세가 산골짜기 같은 것을 곡루라 한다.- 가 되었다. 다만 목화(木華)의 <해부(海賦)>*를 읊조렸다. 그 시에 이르기를 “섣돌아서 굴이 되고 솟구치면 도깨비라. 해동(海童)이 길에서 맞이하고 마함(馬銜)은 길가에 섰네.* 하늘 바퀴 빙빙 돌아 격렬하게 구르는 듯. 지축은 내뽑혀서 다투어 돌아가네.”라고 한 것이 모두 훌륭하게 형용한 것이었다.
<남사(南史)>에서는 장융(張融)의 부가 목화의 <해부(海賦)>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거기서는 “여울이 돌아 흐르니 해와 달도 놀라는 듯, 물결이 일렁이자 은하수가 엎어질 듯”이라 하였으니 또한 진실로 기이한 말이었다. 배는 빠르기가 나는 듯 하여 멀미가 나서 병이 날 지경이었다. 뜸 아래에서 설핏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이미 관청도(觀靑島)에 정박해있었다. 마을에서 잤다.

 

3월 22일
맑다가 저녁에 흐리다. 첫닭이 울 때 닻을 풀어 간신히 교거해(攪車海)에 이르러서야 북풍을 만났다. 옹섬(罋苫)을 거쳐 -방언으로는 독섬(獨苫)이라 한다.- 밤중에 목포보(木浦堡) 앞에 정박하였다. 옹섬은 죽진(竹津)의 북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이를 일러 구보(舊步)라 한다. -방언에 보를 걸음(乞音)이라 한다.-

 

3월 23일
아침에 비가 오다가 늦게야 갰다. 정오에 닻을 풀어 편풍을 얻어서 저물녘에 도씨포(桃氏浦)에 정박하였다. 나씨(羅氏)의 집에서 잤다.

3월 24일
맑음. 정오에 황령점(黃嶺店)에서 쉬고 날이 저문 뒤에야 다산으로 돌아왔다.

 

 

* 황령점(黃嶺店): 황령(黃嶺)은 오늘날 전남 강진군 성전면에 위치한 누릿재를 가리킨다. 월출산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영암에서 남쪽의 강진 및 해남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노루재, 노릿재라고도 한다.
* 도씨포(桃氏浦): 도씨포는 영암군 도포리(道浦里)의 옛 지명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다가 들어오는 포구로 어업이 성행하였으나 영산강 하구언이 생긴 뒤 육지로 변했다. 도싯개, 도삿개, 도포라고도 한다.
* 차 아무개: 흑산도 사리 마을에 가장 먼저 입도한 집안이 ‘차씨’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후손은 없다.
* 팔별(八鼈)의 후손: 박팽년의 사위인 경주 이씨 이공린(李公麟)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권8 <몽별(夢鼈)>에 이공린과 여덟 자라에 얽힌 이야기가 보인다. 이공린은 여덟 사람이 나타나 살려주기를 비는 꿈을 꾸고 부엌에서 요리되던 여덟 자라 중 일곱 마리를 살려 주었다. 이공린은 아들 여덟 명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귀(李龜)․이오(李鼇)․이별(李鼈)․이타(李鼉)․이경(李鯁)․이곤(李鯤)․이원(李黿)으로 하였다. 그중 이원(李黿)은 사화를 당하여 참수되었다. 흑산도의 경주 이씨는 진리 마을에는 경주 이씨 창평공파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영암 도포면 수산리에서 살다가 섬으로 들어왔다. 심리에는 청호공파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영암 망호리에서 입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산도 거주 경주 이씨 후손 이영일의 제보에 따랐다.

* 선왕(船王): 선왕은 배서낭이라고 한다. 배를 지켜주는 수호신의 의미이다.
* 1궁(弓): 1궁은 화살을 쏠 때 표적과의 거리로 6척, 또는 8척을 말한다. 매우 가깝다는 뜻이다.
* 삼로(三老): 뱃머리에서 삿대로 뱃길을 이끄는 고사(篙師). 장년(長年)은 뱃머리에서 삿대로 뱃길을 이끄는 고사이고, 삼로(三老)는 배의 고물에서 키를 잡는 소공(艄工)이다.
* 장년과 삼로(三老) …… 노름을 하는구나. : 이 시구는 두보의 <기주가십절구(夔州歌十絶句)> 중 제7수의 3, 4구이다.

* 미풍이 우수수 …… 거미 보네: 이 시는 소동파의 <주중야기(舟中夜起)>이다.

* 정개도(鼎蓋島): 정개도는 섬 모양이 솥뚜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오늘날 영암군 시종면에 속해있다. ‘소당’은 솥뚜껑의 우리말 이름이다. 지금은 육지로 변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여수에 별도의 정개도가 있으나 이 글 속의 섬과는 무관하다.
* 김완(金完): 김완(1577-1635)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지금의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에서 태어났다. 정유재란 중에 전라 병사 이복남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1615년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사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현재 그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에 세우는 비)가 영암군 시종면에 있다.
* 목포보(木浦堡): 목포보는 오늘날 목포시 만호동에 있던 목포진(木浦鎭)의 수군진영을 말한다.
* 고하도(高霞島): 고하도는 오늘날 목포시 달동에 속한 섬이다. 현재 목포대교로 뭍과 이어져 육로 통행이 가능하다.
*  이순신(李舜臣)의 유적비: 이 비석은 현재 고하도에 서 있다. 비석의 명칭은 <유명조선국 고삼도통제사 증좌의정충무이공 고하도유허기사비(有明朝鮮國 故三道統制使贈左議政忠武李公 高下島遺墟記事碑)>이다. 남구만(南九萬)이 비문을 지었고, 조태구(趙泰耉)가 글씨를 썼으며, 이광좌(李光佐)가 전액을 썼다. 비문은 17행 48자이다. 비문의 내용이 <약천집(藥泉集)> 권19에 <고하도이충무공기사비(高下島李忠武公記事碑)>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 남구만(南九萬): 남구만(1629-1711)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을 탄핵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다. 기사환국 후에는 유배되기도 하였다. 문집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 조태구(趙泰耉): 조태구(1660-1723)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노론(老論)과 대립하던 중 노론 4대신의 주청으로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시되자 이를 반대, 대리청정을 환수시켰다. 이어 노론 4대신을 역모죄로 몰아 사사(賜死)하게 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 이광좌(李光佐): 이광좌(1674-1740)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727년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경종실록>, <숙종실록> 등의 편찬을 맡았으며,  영조에게 탕평을 상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 포저(苞苴): 포저는 물건을 싸는 것과 물건 밑에 까는 것이라는 뜻으로 뇌물로 보내는 물건을 이르던 말이다.
* 여알(女謁): 여알은 대궐 안에서 정사(政事)를 어지럽히는 여자이다.
* 도도평장(都都平丈): 도도평장은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욱욱호문(郁郁乎文)”이라 한 것을 무식한 시골 훈장이 잘못 읽어 ‘도도평장(都都平丈)’이라고 가르쳤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무식한 훈장이 학생들을 잘못 가르치는 것을 비꼬아 하는 말이다.

* 씨아해: 오늘날은 ‘시아바다’로 부른다.
* 박면교거(剝棉攪車): 박면교거는 목화 씨앗을 앗아내는 기계 장치로, 나사 모양으로 된 사이에 목화를 넣으면 나사가 돌면서 씨앗을 분리시킨다. 교거는 우리말로 ‘씨아’라 한다.
* 지좌도(只佐島): 지좌도는 신안군 안좌면(安佐面)에 속한 섬으로, 기좌도(箕佐島)와 안창도 사이의 갯펄이 매립되어 하나의 섬으로 합쳐져 오늘날은 안좌도라고 부른다. 1896년 기좌도․안창도․자라도는 기좌면이라 하여 지도군으로, 팔금도는 완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기좌면은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 팔금도(八禽島): 팔금도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팔금면에 속한 섬이다. 새 형상의 금당산이 있으며, 섬 주위에 매도, 거문도 등 8개의 섬이 있어 ‘여덟 팔(八)’과 ‘새 금(禽)’을 따서 ‘팔금도’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금(禽)’ 대신 ‘거문고 금(琴)’자를 썼다. 지금은 목포를 거쳐 암태도에서 이어지는 다리로 연륙되어 있다.

* 정 정승(丁政丞): 정 정승은 중국에서 건너온 압해 정씨의 시조 정덕성(丁德盛)을 가리킨다. 당 문종 때 대승상을 지냈으며 무종 때 압해도에 유배된 후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  관청도(觀靑島): 관청도는 오늘날 쾌속선이 기항하는 비금면 수대리 일대를 가리킨다.
* 홍의도(紅衣島): 홍의도는 오늘날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홍도(紅島)의 옛 이름이다.
* 태사도(太師島): 태사도는 오늘날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중태도(中苔島)를 가리킨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120km 지점에 있으며, 중태도․하태도와 함께 태도군도를 이룬다.
* 송도(松島): 관청도에서 10리라 했으니, 비금도 서쪽 끝에 있는 무인도로 추정된다.

* 북극의 고도: 원문의 북극출지(北極出地)는 북극고도(北極高度)라고도 한다. 지면에서 북극성을 바라본 각도, 즉 북극성에서 오는 별빛과 지면이 이루는 각도를 말하는데, 오늘날 위도의 개념과 비슷하다.
* 교맥도(蕎麥島): 교맥도는 흑산면 영산리에 있는 무인도로 현재는 매물도로 부른다. 섬의 생긴 모양이 메밀을 닮았대서 얻은 명칭이다.

* 흰 무지개: 원문의 백홍(白虹)은 보통은 태양 둘레에 생기는 백색의 호(弧)를 말하는 데, 여기서는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의 흰색 포말을 말한다.

* 신발 무늬: 소식의 <유금산사(游金山寺)> 시에 “넓은 물결 산들바람 신발 무늬 섬세한데, 반공의 붉은 노을 고기꼬리 붉은 듯해.(微風萬頃靴文細, 丹霞半空魚尾赤.)”라 한 데서 따왔다. 바람이 불어 수면에 생긴 무늬가 신발 무늬와 비슷하다는 의미이다.
* 소장공(蘇長公)의 시: 다음은 소식(蘇軾)의 <유월이십일야도해(六月二十日夜渡海)>이다.

* 봉래(蓬萊)와 방장(方丈): 봉래(蓬萊)․방장(方丈)은 영주(瀛洲)와 함께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금강산과 지리산을 가리키기도 한다.
* 영산도(影山島): 관청도에서 곧장 사미촌에 도착했다면 흑산도 동쪽에 위치한 영산도로 보인다. 영산도는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인데, 흑산도 동쪽 해안에서 4km 가량 떨어진 해상에 있다.
* 사미촌(沙尾村): 사미촌은 오늘날 흑산도 사리 마을을 말한다. 정약전의 사촌서당이 이곳에 있었다.
* 슬픔과 아픔: 원문의 비산(悲酸)은 비도산고(悲悼酸苦)의 줄임말로 손아랫사람을 여읜 슬픔을 뜻하는 표현. 여기서는 정학초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오지 못하고 자신이 대신 오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 우이도(牛耳島): 우이도는 신안군 도초면에 딸린 2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의 주도(主島)이다. 섬의 서쪽 양단에 도출된 반도가 소의 귀 모양과 비슷하여 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전에는 흑산진에 속해있어 소흑산도라고도 불렸다.
* 보장(堡將): 1676년에 본도인 우이도와 흑산도에 각각 관해(官廨)를 설치하여 우수영 소속 별장 1인씩을 두었다.
* 보촌(堡村): 보촌은 흑산진의 진보(鎭堡)가 있던 진리(鎭里) 마을을 가리킨다. 이 집이 소교 이행묵의 집일 경우, 후손 이영일 씨에 따르면 그 위치는 현재 진리마을 초등학교 서쪽 담장 너머로 추정된다.
* 서긍(徐兢): 송나라 서긍(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말한다. 1123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이 한 달간 개경에 머물면서 그 견문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보고서이다. 위 대목은 같은 책 권35, 해도 2 <흑산> 조에 보인다.

* 백산도(白山島): 흑산도에서 서북쪽으로 1리 거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장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흡주연(歙州硯): 이것은 강서성(江西省) 무원현(婺源縣) 흡계(歙溪)에서 나는 유명한 벼루로 무원이 옛날 흡주(歙州)에 속해 있어 흡주연 또는 흡연이라고 한다. 무원연(婺源硯), 용미연(龍尾硯)이라고도 한다. 석질이 매우 단단한데다 매끄럽고 조밀해서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 단연(端硯)과 함께 벼루의 명품으로 꼽는다. 이에 관한 기록은 <연사(硯史)>, <흡주연보(歙州硯譜)>, <흡연설(歙硯說)> 등에 자세히 보인다.

* 사철나무: 구실잣밤나무 또는 후박나무로 추정된다.
* 까마귀와 솔개: 겨울 철새인 까마귀가 머물러 있을 시기이고, 솔개는 흰꼬리 수리로 추정된다.
*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고 보니(馬上逢寒食): 당(唐)나라 송지문(宋之問)의 <도중한식(途中寒食)>의 첫 두 구절이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고 보니 근심 속에 저무는 봄이로구나.(馬上逢寒食, 愁中屬暮春.)”
* 우리나라 사람들이 ……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 견문이 적어 처음 보는 사물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혹론(理惑論)>에 “속담에 ‘견문이 적으면 괴이한 것이 많아 낙타를 보고 말 등에 종기가 났다고 말한다.(諺云, 少所見, 多所怪, 睹馲駝, 言馬腫背.)”고 하였다.
* <산견(山犬)> 시: 정학유의 문집 <운포유고(耘逋遺稿)> 권3에 실린 <현산잡시> 중 제 4수를 가리킨다.
* 황시(皇尸): 황시는 임금을 표상한 시동(尸童)을 말한 것으로, 군시(君尸)의 존칭이다.

* 시변(尸變): 다산이 별도로 <시변>이란 글을 남긴 것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다산시문집> 권 10에 수록된 <원무(原舞)>에 ‘황시’에 관한 한 차례 언급이 보일 뿐이다. 현재의 글만으로는 전후 맥락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 약방(藥房): 약방은 실제로는 조선의 별칭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포르투갈어로 ‘Japan’을 그들 발음으로 ‘야빵’으로 읽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이 제주도를 일본으로 오인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정약전이 문순득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표해시말(漂海始末)>에도 나온다.

* 수진본(袖珍本): 수진본은 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작은 휴대용 책자를 말한다. 관화(官話)는 북경어 회화책으로 광동성 사람들이 북경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회화의 용례를 적어 둔 책이다.
* 장섬항(長苫港): 장도로 추정된다. 다만 장도에는 백사장이 없다.

* 농간을 부리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 원문의 무폐(舞幣)는 무폐(舞弊)로도 쓰며 농간을 부려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 황혼은 …… 10쪽이요: 이 구절은 관화의 음을 광동어로 읽을 때의 발음으로 표기한 예를 보인 것이다.
*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노걸대와 박통사는 모두 조선시대의 중국어 학습서이다. 성종 때 최세진이 쓴 것을 1677년 권대훈, 박세화 등이 다시 고증하여 수정, 간행하였다.

* 흑산도의 꼭대기: 문암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너럭바위: 너럭바위는 사리의 사촌서당 건너편 뒷산인 문암산 줄기의 너른 암반을 가리킨다. 문암산 남쪽 능선에 넓은 바위가 두 군데 있는데, 심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쪽은 ‘매마당’이라 하고, 그 아래 쪽에 사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쪽에도 반석이 있다. 글 속의 너럭바위는 매마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가가도(可佳島): 가가도는 가거도를 말한다.

* 이승(夷丞): 이승은 업신여겨 부르는 호칭으로 오랑캐의 하인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 만재도(滿載島): 만재도는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이다.
* 이상의(李尙毅): 이상의(1560-1624)는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少陵)이다. 임진왜란 당시 검찰사(檢察使)로 선조를 호종했다. 1597년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거쳤다. 사후에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 나사동(螺螄洞): 사리 마을 남쪽 선창 끝자락에 있는 굴이다.
* 이발(李渤): 이발(?-831)은 당나라 귀종(歸宗) 지상(智常)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 자는 담지(澹之)이다. 한유의 권유로 환속하였다. 憲宗 元和 연간에 江州刺史를 지냈는데, 그의 글 가운데 <변석종산기(辨石鍾山記)>가 있다. 소동파도 <석종산기(石鍾山記)>를 남겼는데 글 속에서 이발의 석종산을 언급했다.

* 꽃섬(花苫): 현재 칠형제 섬이라고 부르는 무인도 중 한 곳이다. 솔섬, 꽃섬, 귀섬, 바당섬 등으로 부른다.
* 위합(蝟蛤): 보라 성게를 쪼개서 성게알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흔히 손에 가시가 박힌다.

* 소사미(小沙尾): 소사미는 현재 흑산면 소사리로 잔모래미라 부른다. 마을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마을을 끼고 소사천이 흐르는데, 시내 위쪽에 지금은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 절집이 있었는데: <유대흑기>를 보면 마을 상단 계곡에 해은사(海隱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나온다. 현재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자리다.
* 이행묵(李行黙, 1765-1850):  <경주이씨 익재공파 만향계열보(萬香系列譜)>에 따르면 이행묵은 자가 성시(聖詩)이고, 묘소는 흑산면 천촌리 후록에 있다고 나온다. 그는 경주 이씨 팔별의 후손으로 이춘식(李春植, 1710-1798)의 손자다. 이춘식은 김약행이 쓴 <유대흑기>에 대장(代將)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 조암(鰷巖): 조암은 현재 흑산면 진리 바닷가에 있는 신안철새전시관 뒤편으로 만입되어 돌아 들어간 연못가 바위를 가리킨다. 조수에 따라 물이 드나든다. 현지에서는 숭어 바위로 부른다.
* 심촌(深村): 심촌은 현재 흑산면 심리이다. 현지 방언으로는 ‘지푸미’라고 한다.

* 정오에야 … 배를 놓았다: 심리에서 출발해 장도 앞을 지나 호쟁이 부근에서 바람을 기다린 듯하다.
* 목화(木華)의 <해부(海賦)>: 목화는 자가 현허(玄虛)로, 위나라 혜제(惠帝) 때의 문인이다. 그가 지은 <해부(海賦)>가 <문선(文選)>에 실려 있다.
* 해동(海童)이 …… 마함(馬銜)은 길가에 섰네. : 해동(海童)과 마함(馬銜)은 모두 바다 신의 이름이다. 문선(文選)의 주석에 해동은 해신의 동자이고, 마함은 말의 머리 모양으로 뿔 하나에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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