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52

(경판)남원고사 - III. 춘향그리기 (3/3)

다. 날 저무니 가자스라 임을 보러 가자스라 이때 책방에서 방자 놈이 여쭈오되, “책 읽는 소리를 낮추어 하오. 어리석은 이들에게 소문이 나겠소.” 그럴수록 초조 번민하여 그렁저렁 밤을 새고, 조반 아침 전폐하고, 점심도 다 거르고 묻는 것이 해뿐이라. “방자야, 해가 얼마나 갔나니?”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았소.” “애고. 그 해가 어제는 뉘 부음 편지를 가지고 가는 듯이 줄달음질하여 가더니, 오늘은 어이 그리 넓은 하늘을 천천히 걸어가는고? 발바닥에 종기가 났나? 가래톳이 곪았는가? 삼벌이줄 잡아매고 네 면에 말뚝을 박았는가? 대신 지가를 잡히었나? 장승 걸음을 부러워하나? 어이 그리 더디 가노? 방자야, 해가 어디에로 갔나 보아라.” “태양이 하늘 가운데 이르러 오도 가도 아니하오.” “무정한 ..

(경판)남원고사 - III. 춘향그리기 (2/3)

나. 춘향이를 보고지고, 잠깐 만나 보고지고 겨우 굴어 돌아오니 달빛이 정원에 서려 있고, 등불은 창에 빛나도다. 정신이 산란하고 문 듣고 보는 일이 황홀하여 진정할 길 전혀 없다. “애고, 이것이 웬일인고? 미친놈이 되겠구나. 내 눈에 춘향의 넋이 올라 어른 뵈는 것이 모두다 춘향이라. 육방 아전 춘향 같고, 방자 통인 춘향 같고, 관노, 사령 춘향 같고, 군노 급창 춘향 같고, 남원부사 춘향 같고, 대부인도 춘향 같고, 날짐승도 춘향 같고, 길짐승도 춘향 같고, 모두 미루어 뵈는 것이 다 춘향이라.” 저녁상을 물려 놓고 하는 말이, “목이 메어 못 먹겠다.” 방자 불러 묻는 말이, “네, 이 밥을 아느냐?” 방자 놈 여쭈오되, “아옵내다.” “안다 하니, 어찌하나니?” “쌀로 지은 것이 밥이올시다.”..

(경판)남원고사 - III. 춘향그리기 (1/3)

III. 춘향 그리기 가. 이 사랑 저 사랑 사랑사랑 내 사랑아 쓰기를 마치매 똘똘 말아 춘향에게 전하니, 춘향이 받아 보고 마음속에 크게 기뻐 이리 접첨 저리 접첨, 접첨접첨 접어다가 가슴 속에 품은 후에, “여보 도련님, 내 말 듣소. 발 없는 말이 멀리 날아서 천리를 간다 하니, 싸고 싼 사향내도 난다 하니, 이런 말이 누설하여 사또께서 아시고 엄하게 야단하고 호되게 매질하옵시면 자기가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생긴 재앙으로 받은 죄라 어디에 가 변명할까?” 이도령 이른 말이, “오냐. 그는 염려 마라. 내 어렸을 때 큰사랑에 가면 내의녀 기생들과 은근짜, 숫보기, 각각의 집 통지기들이 오락가락 하더구나. 만일 탄로가 나거들랑 그 말 하고 입을 막자꾸나.” 이렇듯이 수작하며 천금이나 얻은 듯이 즐겁기도..

(경판)남원고사 - II. 첫 만남 (4/4)

라. 도련님의 그 마음을 불망기에 쓰옵소서 춘향이 여쭈오되, “또한 진정의 말씀 하오리다. 도련님은 귀공자이시고, 소첩은 천한 기생이라. 지금은 아직 욕심으로 그리저리 하였다가 사또 벼슬을 내어놓고 돌아오신 후에 아직 미혼인 도련님에게 결혼을 권하지 아니하오리까. 권문세가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의 요조숙녀 벼슬이 높고 권세가 강하여 금슬 좋고 즐기실 제, 헌신같이 버리시면 속절없는 나의 신세 가련히도 되거니와, 독수공방 찬 자리 게 발 물어 던진 듯이 홀로 있어 봄날 좋은 시절의 늦은 때와 구월 가을 서릿바람 저문 날에 기러기가 떼 지어 날아가니 소식을 알기 어려움이요, 수심이 많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데 난간 앞의 매화는 서자의 죽은 혼이요, 창밖으로 흐르는 물은 두 왕비의 원망스러운 눈물이로..

(경판)남원고사 - II. 첫 만남 (3/4)

다. 천정연분 우리 둘이 백년해로 하여 보자 춘향이 하릴없어 따라온다. 치마꼬리 뒤 가닥을 얼싸안아 휘어다가 가슴 한복판에 떡 붙이고 옥 같은 걸음걸이와 꽃 같은 몸으로 천천히 걸어갈 제, 돌 많은 험한 산길과 한 가닥 깊은 비낀 길로 찾아가니 한단에서의 수릉의 걸음으로, 월나라 사람들 사이에서의 서시의 걸음으로, 흰 모래밭에 금자라 걸음으로, 양지 마당에 씨암탉의 걸음으로, 대명전 대들보에 명마기의 걸음으로, 광풍에 나비 놀 듯, 물속에 잉어 놀 듯 가만가만 사뿐싸뿐 걸어와서 광한루에 다다르니, 방자 놈 여쭈오되, “춘향이 현신 아뢰오.” 하니, 이때 이도령이 눈꼴이 다 틀리고 정신이 정처 없이 헤매어 떠돌다가 두 다리를 잔득 꼬고, 사리와 체면이 무궁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큰 가뭄 칠 년에 비 바라듯,..

(경판)남원고사 - II. 첫 만남 (2/4)

나. 방자야, 춘향이를 이리로 오라 하라 이도령 이 말 듣고, “얼싸 좋을시고.” 허둥지둥 허튼 말로 하는 말이, “이 애 방자야, 우리 둘이 의형제 하자. 방자 동생아, 날 살려라. 제가 만일 창녀일진대 한번 구경 못 할쏘냐? 네가 바삐 불러오라.” 방자 놈 거동 보소. 아주 펄쩍 뛰며 하는 말이, “이런 말씀 다시 마오. 저를 부르려 하면 밥풀 물고 새 새끼 부르듯 아주 쉽사오나, 만일 이 말씀이 사또 귓구멍으로 달음박질하여 들어갈 양이면 도련님은 관계가 없거니와, 방자 이놈은 팔자 없이 늙겠으니 그런 생각과 이런 분부는 꿈에도 마옵소서.” 이도령 이른 말이, “죽기 살기는 시왕전에 매었다 하니 경망스레 굴지 말고, 저만 어서 불러오라. 내일부터 관청에 나는 것을 도무지 휩쓸어다가 수달피 노끈으로 질..

(경판)남원고사 - II. 첫 만남 (1/4)

II. 첫 만남 가. 울긋불긋 그네 뛰는 저 선녀는 누구더냐 이런 경치 다 본 후의 광한루에 다다라서, “방자야, 도원이 어디메니? 무릉이 여기로다. 광한루도 좋거니와 오작교가 더욱 좋다. 견우별은 내가 되려니와 직녀별 뉘가 되리? 악양루, 등왕각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이에 더 좋으랴?” 방자 놈 여쭈오되, “이곳 경치 이렇기로 바람이 잔잔하고 날씨는 따뜻하여 고운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이 잦아질 제 신선이 내려와 노나이다.” 이도령 말이, “아마도 그러하면 네 말이 확실하다. 구름은 무심하게 봉우리에서 솟아나니, 권태로운 새 날기를 멈추고 돌아오는구나. 별유천지비인간을 예를 두고 이름이라.” 술병과 술잔으로 자작하여 서너 잔 기울이고 그저 여기저기 거닐면서 돌아보며 산천도 살펴보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경판)남원고사 - I. 광한루 풍경 (4/4)

라. 남원의 산천 경치 아름답고 성하구나 산천 경치를 역력히 살펴보니 산은 첩첩한 봉우리들이요, 물은 잔잔한 계곡물이로다. 기이한 바위 층층한 절벽에서 폭포의 푸른 물줄기가 떨어지고, 큰 소나무 우거지고, 벽도화 난만한데, 꽃 속의 잠든 나비 자취 소리에 훌훌 날고, 연잎에서 노는 갈매기는 빗소리 사이에서 한가하다. 쳐다보니 첩첩 겹쳐진 깊고 큰 골짜기와 많은 산봉우리 굽어보니 층층한 바위의 절벽이라. 먼 산은 가지가지, 가까운 산은 첩첩, 태산은 주춤, 낙화는 동동, 골짜기 물은 잔잔. 이 골짜기 물, 저 골짜기 물 한데 모여 굽이굽이 출렁출렁 흘러갈 제, 꽃은 피었다가 저절로 지고, 잎은 피었다가 추운 계절을 당하면 광풍에 다 떨어져 속절없이 낙엽이 되어 아주 펄펄 흩날리니 그도 또한 놀랍고 신기함이..

(경판)남원고사 - I. 광한루 풍경 (3/4)

다. 광한루 좋다하니 차비를 갖추어라 고려국 명산은 금강산이요, 기자의 왕성은 묘향산이라. 진주는 촉석루, 함흥은 낙민루, 평양은 연광정, 성천의 강선루, 밀양의 영남루, 창원의 벽허루, 해주의 부용당, 안주의 백상루, 의주의 통군정, 영동의 아홉 읍, 충청도의 네 군, 다 훌쩍 던져두고, 동불암, 서진관, 남삼막, 북승가이라. 남한 북한 청계 관악 도봉 망월은 용이 도사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은 모습으로 북두칠성을 괴온 듯한 경치가 거룩하다 하려니와, 본읍의 광한루가 경치가 매우 뛰어나 유명하여 시인 문인들이 소강남에 비기고 있고, 풍류와 호사 칭찬하되, 별유천지비인간으로 이르옵나이다.” “어허, 네 말 같을진대 뛰어난 경치 분명하다. 아무렇거나 구경 가자.” 방자 놈 여쭈오되, “아예 이런 분부는 마음..

(경판)남원고사 - I. 광한루 풍경 (2/4)

나. 방자야, 어디메로 봄나들이 나서 볼까 이 세상에 매우 이상하고 신통하고 거룩하고 기특하고, 도리에 어그러지고 맹랑하고 희한한 일이 있것다. 전라도 남원부사 이등 사또 도임했을 제, 자제 이도령이 나이 십육 세라. 얼굴은 진유자요, 풍채는 두목지라. 문장은 이태백이요, 필법은 왕희지라. 사또 사랑이 너무 지나쳐 도임 초에 책방에 기생을 뒷바라지하라 드리자 하니 색에 상할까 염려하고, 통인 수청 넣자 하니 남색에 빠질까 염려하여 관속에게 분부하되, “책방에 만일 기생 수청을 들이거나 반반한 통인 수청을 들이는 폐단이 있으면 너희를 잡아들여 유월도 뼈를 뚫고 온 후추를 박으면 웃고 죽으리라.” 이렇듯 분부를 지엄하고 극악하게 하니 어떤 역적의 아들놈이 살진 암캉아지 하나나 책방 근처에 보내리오. 책방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