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II. 첫 만남 (4/4)

New-Mountain(새뫼) 2020. 6. 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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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도련님의 그 마음을 불망기에 쓰옵소서

 

춘향이 여쭈오되,

“또한 진정의 말씀 하오리다. 도련님은 귀공자이시고, 소첩은 천한 기생이라. 지금은 아직 욕심으로 그리저리 하였다가 사또 벼슬을 내어놓고 돌아오신 후에 아직 미혼인 도련님에게 결혼을 권하지 아니하오리까. 권문세가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의 요조숙녀 벼슬이 높고 권세가 강하여 금슬 좋고 즐기실 제, 헌신같이 버리시면 속절없는 나의 신세 가련히도 되거니와, 독수공방 찬 자리 게 발 물어 던진 듯이 홀로 있어 봄날 좋은 시절의 늦은 때와 구월 가을 서릿바람 저문 날에 기러기가 떼 지어 날아가니 소식을 알기 어려움이요, 수심이 많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데 난간 앞의 매화는 서자의 죽은 혼이요, 창밖으로 흐르는 물은 두 왕비의 원망스러운 눈물이로다. 산은 길고 물은 머나먼 데 자세히 생각하나 근심으로 넋이 빠질 적에 누구를 바라고 살라 하오. 아무래도 이 분부 시행 못 하겠소.”

이도령이 심신이 황홀하여 여러 말로 타이르며 하는 말이,

“사람들이 보통 하는 말로 이르기를 길옆의 버들과 담장 위의 꽃은 사람이 누구나 꺾을 수 있음이요, 산 꿩과 들오리는 순하게 길들이기 어렵다 하였더니, 너와 같은 곧고 깨끗한 여자의 마음이 고금천지에 또 있으랴? 얌전하고 기특하다. 아무려나 그런 일은 조금도 염려 마라. 인연을 맺어도 아주 장가처럼 맺고, 사또 벼슬의 임기가 찼다 가게 되어도 너를 두고 어찌 가리. 조금도 의심 마라. 명주 적삼 속자락에 싸고 간들 두고 가며, 장판교 위 아두같이 품고 간들 두고 가며, 임금을 끌어안고 물에 뛰어든 육수부같이 안고 간들 두고 가며, 많은 백성들이 황제로 추대하던 순임금처럼 업고 간들 두고 가며,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을 듯이 용력이 장대한들 같이 뛰어간들 두고 가며, 우리 대부인은 두고 갈지라도 양반의 자식 되고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단 말인가. 데려가되 향정자에 윗사람을 모시고 따라가듯 하여 뫼시리라.”

춘향이 이 말 듣고, 흰 이를 빛내며 잠깐 웃고 이르되,

“산 사람도 향정자 타고 가오?”

“아차, 잊었구나. 쌍가마에 뫼시리라.”

“대부인 타실 것을 어찌 타오리까?”

“대부인은 집안 어른이라 허물없는 터이니, 위급하면 삿갓가마는 못 타시랴? 잡말 말고 허락하라.”

춘향이 하릴없어 여쭈오되,

“도련님 굳은 뜻이 굳이 그러하실진대 변변하지 못한 소첩이 황공함을 이기지 못함이라. 어찌 뜻을 이어받지 않으리이까? 다만 세상사를 짐작하기 어려우니, 후일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이 없지 못할지라. 한 장의 문서를 만들어 소첩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옵소서.”

이도령이 허락 못 받을까 몹시 고민하더니, 저의 말을 듣고 스스로 이기지 못할 정도로 기쁘고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대범하더라. 천만다행하여 얼른 대답하는 말이,

“그 무엇이 어려움이 있으리오.”

흥을 겨워 색 있는 한 폭의 화전지를 골라 두루루 말아 후루루 펼쳐 들고, 용미연에 먹을 갈아 순황모무심필을 가운데쯤에 흠석 풀어, 글씨를 단숨에 써 내리니 점 하나 더할 것이 없는 글이라.

붓을 놓으니 바람과 구름을 놀라게 하고, 시를 이루니 귀신을 울게 하였더라.

그 글에 하였으되,

“서울에서 온 과객이 산천 경치 구경하고자 우연히 광한루에 올랐더니, 생각밖에 하늘이 맺은 인연이 지극히 중하여 삼세의 숙원을 만나오니, 이는 이른바 천생배필이라. 백년기약 맹세할 제 천지 일월성신, 후토, 온 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하늘 신이 함께 살피시니, 산천은 변하기 쉬우나, 이 마음은 변함이 없으리라. 오랜 세월 기다려온 아름다운 이와 다행히 만나게 되어 함께 살다 함께 묻히려 인연을 맺사오니, 구름 속의 달이요, 물 위의 연꽃이로다. 요지에서 서왕모와 목왕의 기이한 만남과도 같고, 양대에서 초양왕과 무산선녀의 사랑과도 같도다. 때 좋은 시절이요, 하늘이 준 좋은 기회로다. 

물수리는 정답게 황하 섬 기슭에서 울고,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나는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노니, 금슬이 지속됨은 무궁하리라. 애초에 뽕나무밭에서 만나자는 것과 같은 약속은 없었지만, 오늘 달빛 아래서 서로 만났으니, 이미 약속을 저버림이리오. 하루 잠시 이별함이 물과 구름처럼 사이가 벌어질 것이나, 백년해로는 이미 기약이 있음을 알리로다. 일이 모름지기 은밀하나 이미 미인의 시원스러운 허락을 받은 것이요, 내가 다만 이리로 온 것은 이것 역시 방자의 소원이니라.

동쪽 정원 봄꽃들은 언제 다 떨어질지 모를 일이라. 언덕 모퉁이 황조도 역시 스스로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음이로다. 스스로 한번 살펴보니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도다.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근심이 되어 다른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음이요, 먼 지방에서 거처하게 하는 것은 그대가 걱정할 바가 아니니라. 희미한 달빛에 기약을 어기면은 일의 중간에서 모두 늙을 것이요, 스스로 중매를 하고자 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지킬 것이고, 모름지기 근심하지 말고, 이것으로써 신표를 삼으라.

모년 모월 모일 삼청동 이몽룡은 삼가 적노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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