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III. 춘향그리기 (3/3)

New-Mountain(새뫼) 2020. 6. 2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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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날 저무니 가자스라 임을 보러 가자스라

 

이때 책방에서 방자 놈이 여쭈오되,

“책 읽는 소리를 낮추어 하오. 어리석은 이들에게 소문이 나겠소.”

그럴수록 초조 번민하여 그렁저렁 밤을 새고, 조반 아침 전폐하고, 점심도 다 거르고 묻는 것이 해뿐이라.

“방자야, 해가 얼마나 갔나니?”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았소.”

“애고. 그 해가 어제는 뉘 부음 편지를 가지고 가는 듯이 줄달음질하여 가더니, 오늘은 어이 그리 넓은 하늘을 천천히 걸어가는고? 발바닥에 종기가 났나? 가래톳이 곪았는가? 삼벌이줄 잡아매고 네 면에 말뚝을 박았는가? 대신 지가를 잡히었나? 장승 걸음을 부러워하나? 어이 그리 더디 가노? 방자야, 해가 어디에로 갔나 보아라.”

“태양이 하늘 가운데 이르러 오도 가도 아니하오.”

“무정한 세월이 흐르는 물결과 같다고 하더니 허황한 글도 있구나. 붙인 듯이 박힌 해를 어이하여 다 보낼꼬? 방자야, 해가 어찌 되었느냐?”

“서산에 비껴서 종시 아니 넘어가오.”

“관청빗 불러다가 기름을 많이 가져 서산 뫼봉에 발라두라. 미끄러워 넘어가게 해 다오. 그리하고 해 지거든 즉시 거래하라.”

방자 놈 여쭈오되,

“서산에 지는 해는 보금자리 치느라고 눈을 꾸물꾸물하고, 동쪽 고개에 돋는 달은 높이 떠서 오느라고 바스락 바스락 소리하니, 황혼일시 분명하다. 가려 하오, 말려 하오?”

이도령의 거동 보소. 마음이 바쁘고 뜻이 근심이 되고 가슴도 답답하여 저녁상도 허둥지둥 방자 불러 분부하되,

“너나 먹고 어서 가자.”

저 방자 놈 거동 보소. 전에는 대궁술이나 얻어 먹어 나쁜 양을 주리다가 요사이는 온통 모두 후루루 떠먹이고 배가 봉긋하니 배를 슬슬 만지면서 게트림하며 하는 말이,

“남은 아무렇게나 되던지 나는 좋소. 춘향이 여남은이 있으면 겹흉년인들 어렵게 여기어 꺼릴까?”

하며 거들먹거려 하는 말이,

“가자 소리 작작 하오. 사또 분부에 가라 하였소? 왜장이 나면 가기는커녕 새로이 생으로 뜸을 뜨는 일이 생길 것이니, 폐문이나 한 연후에 사또 취침 기다려서 가거나 말거나 하옵소서.”

이도령 초조하여 이른 말이,

“그러하면 돈관이나 내어다가 문 닫는 놈 뇌물이나 주고 문 닫는 것을 좋게 바꾸어나 보자.”

방자가 여쭈오되,

“초경 삼점에 문을 닫는데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 문 닫는 게 웬일이오? 문 닫는 시간을 바꾼다는 말 듣도 보도 못하였소. 제발 덕분 잠깐만 참으시오.”

한창 이리할 제 갖은 취타 폐문한다.

“방자야, 동헌에 불이 꺼졌는지 낌새 보아라.”

이렇듯이 조급해 할 제 동헌에 불 꺼지고, 밤이 깊어서 아무 소리 없이 아주 고요해지니, 방자가 여쭈오되,

“밤이 깊어 사람 자취가 끊어지고 달 밝은데 바람 맑으니 가려 하오, 말려 하오?”

이도령의 거동 보소. 창공이 드넓게 펼쳐지니 북으로 갈 기러기는 의기양양하구나.

“좋을, 좋을시고. 가자, 가자세라. 임을 보러 가자세라.”

몸을 숨겨 성을 넘고 가만가만 찾아간다. 방자 놈은 앞을 서서 양각등에 불을 켜고, 염성문 네거리, 홍전문 세거리, 이 모롱이 저 모롱이 감고 돌아 반대로 돌아, 엄벙덤벙 수루루 훨쩍 돌아들어 모든 동네마다 찾아갈 제, 방자 놈이 별안간에 하는 말이,

“밤에는 예의를 갖추지 못함이요, 애써서 찾아내는 것이 친구라 하니 심심풀이 할 양으로 이마 때리기나 하나씩 하며 가세.”

이도령이 어이없어 이르되,

“방자야, 상하 체통 애짜하고 벌써 통하지 못한 것이 내가 실수했구나.”

방자 놈 대답하되,

“으라청청, 이 맛 보게. 피차 결혼하지 않은 아이들이 깊은 밤에 실없는 말로 놀리니 무엇이 망발이며, 자네 뒤에 양반 두 자 써 붙였나?”

“말이 이러하니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될세.”

“그리 마소. 속담에 이르기를 시루 쪄 가는 데 개 따르는 제격이라 하려니와, 자네 계집하러 가는 데 나는 무슨 짝으로 따라간단 말인가?”

이도령 이른 말이,

“네 말이 모두 인정에 어그러지는 말이로구나. 담을 쌓고 벽을 처도 이 판에는 그리 아니하느니라. 내가 그리 생소하냐? 네 비위에 아니 맞나 보구나. 애고, 내 아들이야. 오로지 비뚤기는 외탁하여 그러한가. 방자, 동생아 어서 가자.”

방자 놈 이도령을 속이려고 바른길을 두고 네다섯 차례를 둘러 가니, 어찌 끝을 알까 보나? 개미가 쳇바퀴 돌 듯 불알이 뻔히 뜨도록 돌아오다가 하는 말이,

“밤길이 멀다고 하더니 어제 가리키던 어림보다가는 팔팔결로 머니 향방을 어이 알리. 이는 아무래도 네 중병인가 하노라.”

방자 놈이 설렁설렁 앞서가서 춘향의 집 문 앞에 다다라서 돌아보고 하는 말이,

“두말 말고 이 집으로 그저 쑥 들어를 가오.”

“여보아라. 이 일이 분명 속임수로다. 기생의 집이 이토록 웅장하고 화려할까 보냐? 네가 나를 유인하여 세도가에 몰아넣고 수원 남문 밖에서 사는 정봉양의 아들을 만들려나 보구나.”

방자 웃고 하는 말이,

“염려를 턱 버리고 들어가만 보오.”

“아무래도 의심 되니 네 먼저 앞서 들어가라.”

“그리하면 들어가 다 수습한 후 나오리이다.”

“다 수습한단 말이 웬 말이니? 수상하고 맹랑한 놈. 함께 들어가자.”

저 방자의 거동 보소. 닫은 문을 발로 차고 와락 뛰어 들어가며,

“이 애, 춘향아, 자느냐, 깨었느냐? 도련님 와 계시니 바삐 나오너라.”

이때 춘향이 하얗게 꾸민 벽에 비단을 바른 창을 굳이 닫고 촛불 아래 혼자 앉아 벽오동 거문고를 무릎 위에 비껴 안고, 스스로 연주하며 스스로 노래하여 곱디고운 손가락으로 흘려 탈 제,

“사람을 기다리기 어려우니, 어려우니, 닭이 세 번 우니 밤은 이미 오경이라. 쌀앵동징 쌀앵동 흥청.

문앞에서 나서서 기다리니, 기다리니, 푸른 산은 만 겹이요, 푸른 말을 천 굽이로다. 쌀앵당증 쌀앵지랭

당둥둥 청청.”

이렇듯이 기다릴 제, 춘향 어미 내달아 방자 놈을 꾸짖으며,

“네가 향교 방자이냐? 밤중에 왜 와서 야단하느냐? 찢어발길 년의 볏다리를 둘러메고 나온 녀석 같으니 관속 녀석 꼴을 차마 보기 싫더라.”

방자 놈이 어이없어 춘향보고 하는 말이,

“이 애, 춘향아, 이것이 병이로다. 그 말을 너의 어머니에게 아니하였나 보구나. 여보 마누라. 남의 말을 듣고 말을 하시오. 뉘 아들놈이 잘못하였나 들어보시오. 지나간 장날 아침에 책방 도련님이 별안간에 광한루 구경 가자 하기에, 뫼시고 같더니 고사리에 인삼이요, 계란에 유골이요, 기침에 재채기요, 마디에 옹이로 저 아이가 마주 뵈는 언덕에서 그네를 뛰어 도련님의 눈에 들킨지라.

무엇이냐 묻기에 어찌하나 보자 하고 아기씨라 하다가 종시 속일 길 없어 바른대로 하였더니, 도련님이 미치게 불러오라 하시니, 하인의 도리 거역하지 못하여 불러다가 둘이 만나보고 수은 엉긴듯이 엉그러져 둘이 다 홑이불을 써 온갖 이삭단니하며 백년기약 언약하고, 오늘 저녁 오마하고 떡집에 산병 맞추듯, 사기전에 종자그릇 맞추듯 서로 맞추어 두고, 나에게 함께 가자 하시기로 뫼시고 온 일이지, 뉘 제 할미할 놈이 잘못하였소? 그 왜 공연히 욕을 더럭더럭 하여 계시오?”

춘향 어미 이 말 듣고 늙은 것이 별안간에 생딴전 하는 말이

“목소리를 들으니 네로구나. 나는 너인 줄은 알지 못하고 잘못하였다. 자라가는 아이들은 몰라보게 되었구나. 노하여 마라. 너의 어머니하고 나하고 나이가 꼭 같구나. 이애 춘향아. 책방 도련님 와 계시단다. 바삐 나와 잘 뫼시라. 이곳에서 즐겁게 지낸들 어늬 뉘가 괄시하리.”

창문에서 소리나더니 춘향이 영접한다. 저 춘향의 거동 보소. 치마꼬리 부여잡고 중문 밖에 내달아서 반겨 맞아 들어갈 제 춘향 어미 일부러 꾸미는 모습을 부려 별안간에 깜짝 놀라 하는 말이,

“이것이 웬일이오? 만일 사또 아시면 사람을 모두다 상하려 이런 일도 한단 말인가? 어서 바삐 돌아가오.”

 

이도령 대답이 어찌되었는고? 다음 차례를 눈여겨 살펴보라.

갑자년(1864년) 여름 유월 보름에 쓰기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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